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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한국에 최초로 상주한 개신교 의료선교사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2/26 [06:15]

알렌

한국에 최초로 상주한 개신교 의료선교사

최재건 | 입력 : 2021/02/26 [06:15]

 

                                                 호레이스 알렌:

                               한국에 상주한 최초의 개신교 의료 선교사

 

 

 알렌의 최초 건강 진료 보고서(1885.10) - 당당뉴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 4. 23. ~ 1932. 12. 11)은 한국에 상주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18849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국내에 정착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 보다 먼저 구츠라프나, 토마스등은 한국 서해쪽을 일시 지나간 선교사들이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파송의 의료 선교사였다. 그러나 선교사로서는 입국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주재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아직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선교사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차라리 무급의사가 더더욱 안전하다"라고 주장하고 알렌을 '미국공사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에 임명하여 주한 미국공사관의 공의 자격으로 내한했다. 알렌은 선교사로 일하다가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으로도 봉직했다.

 

 

 

알렌은 18584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Etthan Allen)가의 후손이었다.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을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에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188325살 때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교(University of Miami)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도 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의료선교사로서 지원하여 1883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파송 되었다. 그러나 상해에 정착하지 못하고 남경으로 옮겼으나 거기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 서구인을 향해 쌓인 중국인들의 감정 노출이 그렇게 된 주된 이유였다. 그는 조선이 새 선교지로 선정된 사실을 알고 188469일 지인들의 권고를 힘입어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여 722일 선교부의 허락을 받았다.

 

18849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의 상주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공식적 활동은 상해에 출산관계로 남아있던 아내를 데리고 온 후인 1026일에 시작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조정은 선교활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그의 직함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공의였다. 후에는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 공사관의 공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공의로 근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의료선교사업을 모색하였다.

 

알렌에게 바라던 선교 활동 계기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통해서였다. 188412월 우정국 낙성식 때 일어난 정변에서 민영익(閔泳翊)이 자상(刺傷)을 입었다. 사경을 헤매는데 어의들은 속수 무책이었다. 묄렌돌프(Paul G. von Möllendorff)가 알렌을 소개하여 치료하게 되었다. 민영익은 민비의 조카로서 왕실의 실세였다. 종래의 한방의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수술을 하고 치료하여 3개월 만에 완치시켰다.

 

알렌이 민영익을 완치한 것으로 조야에서 서양의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죽은자도 살린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그 소식을 들은 자가 죽은 시계도 들고 와 살려내라는 일화도 남겼다. 또한 민영익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던 알렌을 보고, 중노동인줄 알고 자기 집 하인을 보낼 테니 쉬시라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 후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병원 설립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주한 미국 대리공사인 조지 포크(George C. Foulk, 1856-1893)와 조선 정부의 외무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던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의논하여 병원 건설안을 제출하였다.

 

병원 건설안에는 병원설립과 의학교육 실시에 필요한 깨끗한 집 한 채, 조명과 연료비, 의사와 환자를 돕는 자들에 대한 인건비, 가난한 환자를 위한 급식비, 약재비 300원 가량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있었다.

 

한국의 조야에서 근대식 병원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었던 때였던 관계로 외아문 독판은 병원 신설이 필요하며 병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집도 한 채가 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 곳은 재동에 있던 홍영식(洪英植, 1855-1885)의 집으로 갑신정변 때 그가 죽임을 당한 후 흉가로 남아 있었다. 이 곳에서 한국 최초로 서양 의사에 의한 양방 병원이 1885410일에 개원되었다.

 

처음에 병원이 개설될 때는 그 이름이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이었다. 이 이름은 고종이 412일에 내린 이름이었는데, 426일에 제중원 (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바뀌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에서 사람을 구제하는 집으로 바뀌었다.

 

이 병원은 조선정부와 미국공사관을 통하여 미국 북장로교회해외 선교부와의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왕립병원으로서 그 운영체제는 행정과 재정을 조선 정부가 관장했으나 치료와 의학교육 및 이 일의 경비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맡게 하는 이원체제였다.

 

선교부로서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의 자유가 없어서 선교부 소속을 분명하게 할 수도 없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선교비가 충분하지 않은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어 쌍방의 의견이 합치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어 명으로 이 병원이 Royal Hospital, Government Hospital, Public Hospital, His Majesty's Hospital, Imperial Hospital 등으로 혼용되었다.

 

알렌은 민영익 치료를 개인적인 성취의 기회로 삼지 않고 의료선교사로 적절하게 소임을 다함으로써 한국선교의 문을 여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입국 초기에는 선교사인 사실을 들어낼 수 없어서 미국 공사관의 공의란 사실을 내세웠으나 한국이 장차 기독교 국가가 될 그 날을 보기 위해 살고 싶다(I hope to live to see the day when she shall be a Christian nation)”고 피력할 정도로 뚜렷한 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알렌은 18863월에는 제중원에 조수 양성을 위한 서양의학 교육도 실시하였다. 교수는 알렌, 혜론, 언더우드였다. 학생은 처음에 16명이 선발되었으나 시험으로 4명이 탈락하고 12명이었다.

 

그 후 의학교 명의의 교육이 정상적으로 계속되지 못하다가 에비슨의 부임 후에 제중원이 선교부 중심으로 운영하게 되는 대 개혁이 있었다. 1899년에는 제중원의학교가 새로 출발하게 되었다.

 

1900년 에비슨의 뉴욕선교대회에서 연설이후 세브란스의 도움으로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변경되었다. 1907년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 7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제중원의 설립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자 세브란스 병원 및 의과대학, 나아가 연세대학교 창립의 실질적 기점이 되었다.

 

제중원 초대 원장(1885. 4-1887. 7)으로 첫해 활동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고한 중요한 기록도 남겼다. 여의사를 초빙하여 부녀과를 신설하고 콜레라가 전염병으로 전국을 휩쓸었을 때 한국에서 최초로 손을 씼으라, 물을 끌여 마시라는 예방법을 알리고 위생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 코레라는 쥐 귀신의 소행이니 고양이 부적을 대문에 붙이라는 전염 병에 대한 미신적인 인식의 퇴치에 노력하여 대민 계몽활동 부분에서도 공헌하였다.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어의로서의 서양 의술을 베푸는 일에도 진력하였다. 조정에서는 1886513일 알렌에게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첩을 내렸다. 같은 해 927일에는 다시 정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특별히 제수하고, 18871123일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직첩을 주어 의료사업에 공헌함을 기렸다.

 

18878월에 주미조선공사관의 초대 전권대신인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을 보좌하는 고문역인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제중원을 떠났다.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의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1889년에 6월에 그의 후임이었던 헤론이 죽자 다시 제중원 원장역을 (1890.8-1891.4) 맡기도 했으나 189079일에는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어 제중원을 다시 떠났다.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활동도 했고,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이때 그는 조선이 독립국인데도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국익을 철저히 대변하는 외교관으로 임했다는 한국학자들의 비판적인 평가도 받게 되었다.

 

알렌은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최대 금광인 것을 확인하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을 받아 미국회사는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획득했다. 이 무렵 금광에서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많이 써 금을 노다지라고 불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관파천을 주선해 언더우드 등 친미세력이 등용된 뒤에는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다. 서울의 전기, 전차, 상수도 등의 사업도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적인 마음으로 19-4년에 있었던 태프트와 가츠라의 밀약에 본국의 훈령을 따르지 않고 망국의 한을 진 조선의 입장을 동정하여 파면을 스스로 자초했다. 루즈벨트의 친일정책에 반대 의사를 조야에 펼쳤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1892년 이래 <Korean Repository>를 간행하고,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여 오늘날 한국학 연구에 중요 문건이 되었다. 한국문화의 해외 소개와 발전에 기여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Korean Tale(1889) , A Chronological Index of the Foreign Relations of Korea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Twentieth Century(1901), Korea Fact and Fancy(1903), KoreanAmerican Relations(1904), Things Korean(1908) 등의 한국에 관한 저서도 남겼다.

 

<참고문헌>

김원모.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2002

김인수. 알렌의사의 선교·외교 편지. 서울 장로회신학교 부설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 한미외교.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1.

 

<약력>

1884 주한 미국공사관 의사

1885 광혜원 설립

1887 참찬관

1890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

1892 한국휘보 창간

1897 주한 미국공사관 공사

1897 주한 미국공사관 서울주재 총영사

1900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설립

1901 주한 미국공사관 전권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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