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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정신과 유산

기독교와 3.1운동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2/28 [02:28]

3.1운동의 정신과 유산

기독교와 3.1운동

최재건 | 입력 : 2021/02/28 [02:28]

                                       3.1운동의 정신과 유산

 

 

1. 들어가는 말  천사 스코필드가 전한 한국 정신의 상징 '3.1운동'

 

3.1 운동은 일제에 신음하던 조선인의  문명사적 대전환을 요구하는 혁명적 독립운동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도층과 일반 백성이 하나 되어 일으킨 최대 규모의 저항이었다. 자유, 민주, 독립, 공화주의를 부르짖으며 수천 년간 왕정국가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서구적 근대국가를 지향한 운동이었다. 혁명적 문명사적 대전환의 독립운동이었다. 이 혁명적 문명사적 대 전환을 부르짖은 3.1 독립 운동은 3.1정신으로 승화되었고 대한민국 건국으로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였다.

 

2. 3.1독립운동과 기독교

 

한국기독교회는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3.1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교세가 강했던 천도교의 역할도 컸다. 불교도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이 가장 컸다.

 

함석헌은 3.1운동의 주역이 누구냐고 논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라고 단정하고 기독교신앙 없이는 3.1운동이 없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민경배도 기독교회가 핵심역할을 했고 교회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3.1운동은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기독교회는 그때 역사가 3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민족대표 서명자 33인 중 16인이었고 비서명자 48인중에도 과반수인 24인이나 되었다. 교회에서 터득한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함이었다.

 

천도교의 당시 교세가 근 300만이나 되었던 것에 비하면 기독교는 수적으로 매우 약세였다. 3.1운동 무렵의 전국 인구는 2,000만 정도였고, 기독교 진영은 개신교인 219,220, 가톨릭과 정교회 교인 99,488명을 합하여 총 318,708명으로 인구 대비 1~1.5% 정도였다.

 

교회당은 신구교를 합하여 3,252개였다. 그런데도 전국적으로 교회와 연계된 학교가 832개나 되었다. 이들이 3.1운동 때 활동자원이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도 한몫했다. 행함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한국의 지방행정구역을 완전히 개편하여 종래의 한국인의 조직을 없애버렸다. 한국민의 전통과 향토의식을 단절시켰다. 이 무렵 기독교회는 전국적인 조직망도 갖추게 되었다. 노회 총회 연회와 같은 조직들이 있었고 외국선교회가 세운 병원들, 각급 학교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가장 잘 연결된 조직과 기구를 형성하고 있어서 최고의 연락망을 갖게 되었. 전국적으로 매일 새벽과 수요일 저녁 주일에 정례적인 모임도 활성화 되고 있던 터였다. 3.1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천도교에서 비밀리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이 교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다.

 

한국교회는 일제에 대한 가장 강한 저항세력이었다. 지식인이 가장 많은 그룹이기도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을사조약반대의 전통을 이어 구국기도운동, 청년회활동, 계몽운동, 나아가서 무장투쟁 까지도 교인들은 벌렸다.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단체에는 안창호, 윤치호, 이회영, 전덕기를 비롯한 8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일제에 맞섰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믿음을 가졌다.

 

 

 

황해도에서는 1908년경 김구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일면일교의 학교설립운동도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회가 통치의 저항 세력임을 간파하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서북을 중심하여 600여명의 기독교인을 체포했다. 소위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세력을 뿌리 뽑으려 했다.

 

그 후 실제로 교인들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 운동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황애덕이 주도하는 송죽회라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를 비롯하여 배민수를 중심으로 무력 항일운동을 꾀한 조선국민회, 박용만의 대 조선국민군단, 한영서원 같은 비밀결사 같은 항일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했다.

 

교회는 3.1운동의 도화선이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자 샤록스 선교사가 이 소식을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에게 전하였다. 이들을 파리의 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 건의서를 보냈다. 중국에서도 김규식, 선우혁, 여운형, 서병호 등이 이에 공감하고 활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도 기독교인들이 주역이었다. 재일 조선 YMCA 총무 백관수를 비롯하여 송계백, 서춘, 김도연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의 유학생들이 윤창석목사 주재 아래 도쿄YMCA에서 조선청년독립단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독립의 선언과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이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준비를 기독교인들이 은밀히 하고 있었다.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1919년 초 비슷한 시기였다. 이승훈은 기독교 인사들과 3차에 걸쳐 회의를 하고 천도교 측과 연합하여 거사하기로 했다. 그는 평북 정주에서 서울 평양을 오가며 하나 되 성사토록 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 인산일인 33일과 주일인 2일도 피하여 31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그날 오후 2시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 후에 자진해서 경찰 당국에 신고하였고 곧 모두 연행되었다. 처음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이 있었고 이어 가두 시위행진을 했다.

 

기독교인과 교계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는 다른 단체들보다 높았다. 교회는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쉽게 모일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교회가 있는 곳은 주로 경의선, 경원선 부근이었고 교인들이 거주하는 곳들 중심이었다. 교회는 3.1운동 때 전국적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시위를 확산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모임의 중요성 힘을 알고 있었고 주안에서 한 지체라는 의식과 믿음의 소산이었다.

 

처음 피습되고 희생자를 먼저 낸 것도 교인들이었다. 기독교가 가장 성행하던 평북 선천에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31일 오후 2시 강신혁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12명이 부상하고 60여 명이 피검되었으며, 4일에도 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교세가 가장 강했던 평양에서는 31일 평양의 6개 교회가 연합하여 숭덕학교에서 연합집회를 가진 후, 시가행진을 하다가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앞장섰던 강규찬, 김선두 목사 등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투옥되어 그 해 총회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3.1운동 피해도 인구에 비례해 교회가 가장 많이 당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로도,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0여명, 체포 46,948, 공소 19,054명이었고, 7,81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독교회가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가장 컸다. 정주의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는 전소되었다. 기독교인 전체로는 체포 약 4, 투옥 2,190, 사살 6천여 명이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다른 통계에서는 9,458명 중 기독교인이 2,087이었다. 어떤 통계에서는 1919년 말까지 주동자로 투옥된 19,054명 중에서 교인이 3,373명으로 17.7%였고, 여자 피검자 471명 중에서 교인이 308명으로 65.4%였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한국기독교회의 3.1운동 참여 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인 나라도 사랑한다는 둘을 일치시킨 신앙심의 발로였다. 둘째는 기독교의 정신인 자유, 독립, 민주 공화정신이었다. 3.1 운동은 독립운동이었으나 신앙운동으로 승화시켰다. 셋째는 세계의 교회는 하나라는 연합정신, 에큐메니칼 정신이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와 유기체임을 자각하고 선교사들과 연대하여 세계교회에 한국의 자유,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3. 3.1운동의 정신

 

3.1운동의 정신은 3.1 독립선언서와 그날부터 1년여간 전국적으로 지속된 시위에 잘 나타나 있다. 선언서는 그 종류만 대략 33종이나 된다. 기독교인 주도한 선언서도 12종이다. 3.1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국에 계속 일어날 수 있도록 독립선언서 자체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 선언서에는 서구 근대 국가의 사상과 일치하는 기독교정신의 기본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었다. 선언서의 작성자 최남선은 기독교 정신이 자기 사상의 토대라고 말했다.

 

3.1 운동의 정신은

첫째로 자유정신이다.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의 자주 독립, 자유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온 백성이 중심이 된 민주정신이다. 수천 년이어 온 왕정체제에서 벗어난 주권재민의 공화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제시했다.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민주정신과 민중정신의 발로였다.

셋째로 연합의 정신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종교, 계층, 성별, 지역 간의 모든 장벽을 넘어 참가하였다.

넷째로 평등정신이다. 민중이나 식자층이 주체적으로 평등하게 참여하였다.

다섯째로 저항정신이다. 3.1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에 대한 폭정, 차별 정책에 반대한 저항정신이었다. 3.1운동 후에 무력적으로도 저항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여섯째로 비폭력 정신이다.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무저항 정신이었다. 비폭력정신은 군국주의 세력과 맞선 정의, 도의와 진리, 우애, 협력을 나타내는 평화의 정신이다. 시위 중 일어난 일부의 폭력은 일제의 무력 진압에 대응한 것이었다.

일곱째로 세계평화정신이다. 세계역사의 역방향으로 나아가는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향해 자주 독립된 국가와 민족사이의 우애와 협력 평화와 공존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세계평화 추구의 정신이었다.

 

 

4. 3.1정신의 유산

 

자유 독립을 비롯한 혁명적, 문명사적 대전환의 3.1 독립운동의 정신은 한국민의 유산이 되었다. 이미 1907년 신민회를 통해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김규식, 이승만 등의 기독교인들은 새나라는 기독교정신에 따라 건국하기로 하였다. 3.1정신의 첫 유산은 19194월에 상해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헌장 7조에 대한민국의 건국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건국의 초기 과정이었다. 19199월 여러 지역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였지만 이념의 대결로 임시정부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 결실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었다. 근대국가를 이룩하는 요소인 영토, 국민, 정부, 주권의 4요소를 갖춘 수세기 지속된 불교와 유교 문명의 체제에서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둔 자유 민주주의 독립국가, 공화정부로 태어났다. 또한 대륙중심의 세계관에서 해양 세력 중심의 세계관으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했다. 다만 이념에 따른 국토의 분단으로 과제를 남겼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한국교회는 적극적 참여와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의 교세는 2,793개의 교회, 5,923명의 성직자, 459, 721명의 신도가 있었다. 비록 기독교인이 전인구의 2~3%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해방정국의 다양한 정치세력이나 사회단체 중에 가장 강력한 엘리트 그룹과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기독교의 정신이 새 국가 건설의 이념에 일반적으로 적합하다고 인식된 점들이 있었다. 첫째 서구 여러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국가와 기독교가 성공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점, 둘째는 새 나라는 도덕성이 국가 건강의 척도가 됨으로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건전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기독교가 가장 선호되었다는 점, 셋째는 기독교 자체가 민주이념을 잘 포용하고 있음으로 참 자유, 민주, 정의, 인도와 평화, 평등정신을 구현하는데 상통한다는 점이었다. 서구적 근대 국가의 이념인 자유 민주주의, 국민 주권주의, 평화의 정체를 갖춘 기독교의 정신이 3.1정신의 요소가 되었고 사실상 대한민국 건국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건국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활동할 수 있었던 또 한 이유는 일제 때 많은 인재를 양성한 것이었다. 정치계의 김구,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김도연을 비롯하여 교계나 학계의 한경직, 백락준, 한치진 등의 인물군이 있었다. 다른 어느 종파나 집단보다도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인물들을 많이 양성하였고, 중국과 미국 같은 곳에서 주로 주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해외 유학생들을 보내어 인재를 길러낸 결과였다.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 작곡자도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이 정치 일선에 나선 것도 이론적 정신적 뒷받침을 한 것도 3.1정신의 유산이었다. 8.15 해방도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믿고 독립국가 건국에도 적극 참여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고 세계정세에 밝았다. 종래의 대륙적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해양 세력들인 근대 국가인구미의 열강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 나오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자유 독립을 원하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투쟁한 혁명이었다. 신생 기독교가 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제시한 7가지의 3.1정신은 요약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유인으로서 성숙한 한 개인이 나아가 이웃과 독립된 민주와 공화국의 주체가 되고, 더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3.1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제하에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미군정과는 협력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좌우합작정부설립정책에는 반대하면서 한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건국에 앞장섰다. 마침내 일제로부터와 미군정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한 건국이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을 선도한 한국교회는 외적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잘못을 거울삼아 앞으로 기독교의 본질에 더욱 충일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나아가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를 번영토록하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정의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를 이루며, 이념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통일은 앞으로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이 이룩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과 세계 평화와 문화 발전에 이바지 하도록 새로운 문화를 창조 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한국교회가 3.1정신을 이어가고 그 유산을 지키는 바른 길이다.

 

<jaikeunc@gmail.com>

 

월드뷰201193월호에 실렸던 글을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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