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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 선교사 서간집 서문

최재건이 원래 쓴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5/25 [11:39]

한부선 선교사 서간집 서문

최재건이 원래 쓴

최재건 | 입력 : 2021/05/25 [11:39]

                                         최재건이 쓴

                                                                  한부선 선교사 서간집 서문

 

 

 한부선 선교사, 그는 무엇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까? < 고신 < 소식 < 기사본문 - 코람데오닷컴

본서는 한부선 선교사 (Bruce F. Hunt, 1903-1992) 1946-1948년에 자기 부인 캐터린( Katherine Blair Hunt)에게 쓴 편지를 편찬한 서간집이다. 따라서 본 서간집은 다른 내한 선교사들의 편지와는 달리 사신이고 보관 장소도 지금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보관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공장소가 아닌 한부선선교사의 사저에 있었다.

 

한부선은 190364일 평양의 서양인 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한위렴(William B. Hunt, 1869-1953) 은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장인 장모인 방위량(William N. Blair,1876-?) 선교사는 평양 주재 선교사였다. 1905년 한위렴 부인의 서거로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 1906년 로이드(Anna Lloyd)와 재혼 한 후 다시 내한하여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활동을 재개할 때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어 재령에서 자랐다.

 

교육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까지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미국 미주리 주의 솔단 고등학교에 편입하여 1920년을 졸업했다. 그해 9월 쉬카고 근교의 휘튼대학(Whaton College) 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뉴저지의 럿거스대학교로 편입하여 거기서 1924년에 졸업했다. 1924년 프린스톤 신학교에 진학하여 1924년 졸업했다.

 

그가 신학교재학 중, 미국북장로교회 교단 신학교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적으로 보수, 진보로 나뉘어 대립된 진통기였다. 미국 북장로교단의 분열과 카나다교회의 연합으로 북미교계가 요동 할 때 캐나다의 노바스코티아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생활을 하다가 1928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 받아 내한하여 청주에서 활동했다. 메첸과 반틸, 머레이를 중심으로 몇몇의 보수신학을 견지하던 교수들이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교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그들을 중심한 새 교단은 1936년에 설립되었다. 그 작은 교단도 비브리칼(Biblical), 카버난트 Covennant), 페이스(Faith) 3신학교로 분리되어 교세는 지극이 미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의 입장은 성경의 고등비평을 받아들이지 않은 보수적인 장로교신학이었다. 이 무렵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류중이던 한부선은 북장로교를 떠나 새 교단 설립에 동참했다. 새 교단의 교세는 북장로교회의 3/100교세에서 출발했으나 또 3분된 작은 교단이었지만, 그 작은 교세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파송했다. 파송한 선교단체는 메첸 등에 의해 새로 조직된 외국선교를 위한 독립선교부(Independent Board for Foreign Mission)였다. 한부선은 신생 선교부의 파송 선교사로 내한하여 만주의 할빈 일대에서 활동했다.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자 한부선은 선교사로서는 최 일선에서 반대 투쟁을 했고 유일하게 수감생활도 9개월간 했다. 1938년 제 27차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 일본경찰의 위협 속에서도 총회장 홍택기목사의 만 묻고 는 묻지도 않고 가결을 선포에 때 목사, 장로, 선교사 총대 중에 유일하게 불법이오라고 외쳤다. . 만주의 선교현장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했다. 할빈 중심으로 25개처 교회에 800여명의 신도들을 돌보며, 활동하던 그는 신도들에게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하고 신도들에게도 철저하게 반대 하도록 교육하고 권면했다. 그 결과 500여명의 신도들을 규합하게 되었고 그들을 언약신도(Covenantig People)‘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서 김윤섭, 김신복, 안영애 같은 순교자도 나왔다. 19411022일 그는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체포되었으나 수치심보다는 당당하였다. 외국인이었지만 9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했다. 일본의 미국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태평양 전쟁으로 적대국이 된 미국의 모든 주한 선교사들은 강제 철수 당했다. 소수의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포로교환 형식으로 돌아갔다. 한부선도 이때 출옥 후 추방되었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투쟁과 옥고를 체험 한 것을 바탕으로 증거가 되리라(For a Testimony)는 책을 기록으로 남겼다.

 

1941128일에 일본의 펄 하버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패망하였다. 연합국 사령관 및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신도라는 국수주의적 종교 때문에 발생했다고 판단하고 국수주의적인 국교를 철폐키로하였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대신 일본의 민주화와 당시 팽창정책을 펼친 소련연방에 대하여 반공 정책을 펼쳤다. 민주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전파가 급선무라고 인식한 맥아더는 일본, 한국, 필립핀, 중국에 기독교 강화를 종교정책으로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우선 미국 각 교단에 보다 많은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고 입국할때에 미국군인과 같은 특혜를 베풀었다.

 

 

맥아더의 선교사 특혜 정책에 힘입어 한부선은 19451028일 다시내한 했다. 그는 가장 빨리 한국으로 돌아온 선교사 중의 하나였다. 맥아더 사령부의 선교사들에 대한 관대한 입국 조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치안 상황 불안으로 부인 동반을 초기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한부선은 부인을 동반할 수 없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곳이요 자기의 관 선교지역에서 뜻을 같이하여 신사참배 반대를 하다가 순교 한 이들이 있는 한국선교 현지에 다른 선교사 보다 서둘러 돌아왔다. 본 자료집은 이 기간 동안에 한부선이 그의 부인 캐터린(Katherine Blair Hunt) 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출간하게 된 것은 해방공간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한국기독교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부선은 다시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부 파송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 전에 활동하던 청주, 할빈등지를 돌아 부산에 정착했다. 부산 정착은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도 중국이 공산화 되고 38선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상황도 작용했다. 또 다른 경위는 당시 한국장로 교회가 신사참배 처리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 되었다. 그는 경남노회의 주남선,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한 것 회개 하자는 데 동조했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를 잘못 처리하고 우상 앞에 굴욕 한 것은 신학교육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 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한상동 목사가 옥중에서 갖게 된 비전에서 기인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그들과 같았음으로 합세하여 고려신학교에서 교수요원으로 강의도 하게 되었다. 미국 정통장로교(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소속인 한부선이 그 교단의 파송을 받았기에 김양선교수는 그의 한국 기독교해방 10년사에서 한부선을 메첸 파로 분류하였다.

 

고려신학교는 진해에서 신학강좌로 시작하여 건물이 없어 금성중고등학교를 위시하여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 보따리신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속에서도 신사참배 한 것을 2주간에 걸쳐 통회하며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를 향하여서도 회개를 촉구했다. 강시 고려파라고 불린 이들의 주장은 교역자들은 회개하고 2개월간 자숙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이것 마저도 독선이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하느 것이하고 하며 거절하고 고신과의 관계를 끊고 고려파 총대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축출된 것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처음에 부산에 터전을 잡게 된 것도 재정문제를 비롯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타개하는데도 한부선의 도움과 영향이 컸다.

 

 

한부선은 1950625 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미국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1952년에 다시 내한하여 고려신학교에 근무하면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이 연합하여 합동측이란 교단이 형성되자 고신 교수 직은 사임하고 합동측 선교사로 활동했다. 고신측이 다시 환원하자 그는 양 교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선교사로 정년 퇴임도 5년 연장하여 1976517일 은퇴 기념 예배를 부산 남교회에서 드렸다. 헌트는 197993일에 비록 그의 모교는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하도례(Thodore Hardie)와 간하배( Harvie Conn)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단과 관계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명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교회는 그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옥고를 치룬 헌신도 부모와 장인 장모를 위시한 2대에 걸친 봉사도 잊었지만 그나마 재미교포교회가 1984년 한국선교100주년에는 뉴욕전도대회에서 한국 선교공로상을 수여했다. 1992년 년 726일에는 필라델피아 근교의 양로원에서 이 땅위의 삶을 마감했다.

 

 

 

편자가 한부선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려서 부터였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하여 주의 종이되라는 부친 최경환 장로의 말에 기꺼이 순종하고 지내던 터라 앞서 언급한 그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신학 공부를 하게 되고 기독교회의 역사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서양 중심의 세계교회사에서 시작하여 한ㆍ중ㆍ일 동아시아 삼국의 교회사로 범위가 좁혀졌고 마침내 삶의 현장인 한국교회사로 집중되었다. 전공을 정한 것도 그의 영향이 컸다. 한국선교를 미국교회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까닭에 미국교회사도 한국교회의 연장선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내한 선교사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자료를 찾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지금까지 지내왔다.

 

내한 선교사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어린 시절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 19534월쯤에 한부선 선교사가 내가 다니던 시골교회를 방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를 직접 보게 되었다는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미국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한국말을 너무 잘하고 한국 음식도 잘 먹는 것에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물이 먹고 싶은데 물을 주지 않아 아침에 비누로 세수한 물로 갈증을 달랬다고 한 것이었다. 그때 그가 왜 그런 고생을 자초하고 천국과도 같은 미국에서 살지 않고 전쟁하는 나라에 와서 고생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자는 그 후로도 그의 동향에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길거리의 노방전도 하는 모습도 보았고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강의 하면서도 주일에는 지역 교회에 나가 설교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았다. 1960년 미국 정통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총회를 구성하였을 때 함께 참여하였으나 그는 고려파가 합동측 총회에서 환원 할 때 고려파와 함께 환원하지 않고 그 관계는 유지 하면서 고신과 합동측 양쪽에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그런 경험이 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민경배, 한태동 배낙준 박사의 영향도 컸지만 세부적 전공을 정하는 데에는 한부선 선교사 의 영향으로 내한 선교사들에 관심을 갖게 했고 처음석사 논문의 주제를 신사참배 문제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에 내한 선교사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꿈을 안고 비행기 값을 빌려 유학을 떠났다. 토론토대학교의 임마누엘신학대학원에서 지내는 동안 캐나다 연합교회와 장로교회의 한국교회 관련 자료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힘들여 마이크로필름 29릴을 만들었지만,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절감하였다. 그러는 동안 선교의 자료가 세계최대로 수집된 예일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한국의 신군부 정권은 1980년부터 해외 유학의 자율화하여 갑자기 해외 유학생이 급증했다. 예일대학 신학부에 적을 두고 있던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한국근현대사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이 다대한데도 거의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일반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조언한 이들의 의견을 따랐다.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새롭게 일반역사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양 기독교의 동아시아 전파사(History of Christianity in East Asia)를 연구주제로 삼아 이 연구에 필요한 어학 과목들과 다른 관련 과목들을 이수하느라 5년여의 석사과정을 보냈다. 하바드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근현대사 공부한다고 유학 기간은 늘어만 가고 자료수집도 주춤했다.

 

 

 

그런 우여 곡절 속에서도 지난 40여 년 동안 첫 20여년은 현지에서 공부하며 형편이 되는 대로 자료 수집에 힘썼고 후반 20여년은 학기 중에는 강의하고 방학 때는 형편에 따라 필라델피아의 미국 장로교 문헌 보관소, 드류대학교 구내의 감리교 문헌 보관소, 워싱턴디시의 미국 국립문헌보관소, 버지니아 노폭의 맥아더 기념도서관 및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신학도서관과 문헌 보관소를 돌며 한국교회사와 한국현대사 관계 자료들을 섭렵해 왔다. 토론토의 캐나다 연합 교회 문헌 보관소, 캐나다 노바스코시아 주의 달하우지대학교 문헌 보관소는 가끔 들린 곳이었다. 내한 선교사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시적인 결과를 별로 내지 못하였고, 필자보다 후에 시작한 이들도 저마다 자료집을 간행하고 논저를 출판하는 것을 보며 스스로 자책하고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침내 편자는 1987년 봄에 한부선이 거처하던 필라델피아 근교의 그의 거처에서 두 주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의 선교활동담도 들었다. 그의 부친 한위렴 선교사와 장인 방위량 선교사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선교관계 자료들을 읽고 더러는 복사하였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을 끈 것은 손으로 쓴 일련의 편지였다. 미군정기인 1946년에서부터 1948년에 이르는 동안 그의 쓴 편지가 1,500장 가량 되었다. 그가 선교본부에 보낸 서간도 아니고 그의 부인에게 쓴 사신이었다. 내용이 부인에게 쓴 편지이지만 당시의 한국사회와 교계 상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해방 후의 한국교회와 한국의 불안한 치안 사정을 비롯하여 살펴본 한국 태생의 선교사가 본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기록이란 점에 좋은 자료라고 여겨졌다. 해방 후 미군정 기간 동안에는 좌익의 테러와 여러 여건으로 치안이 불안하여 선교사들도 입국이 어려웠으나 주일 맥아더 사령부의 선교사에 대한 특별 배려로 남자들만 제한적으로 내한 할 때였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한 그는 다른 선교사 보다 빨리 내한 하였고 근 3년 동안 혼자 한국에 머물면서 그의 부인 에게 매일 쓴 것이었다. 요지음 처럼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서 복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쾌히 승락하고 자기가 소장 할 것도 요청했다. 그의 양해를 받아 밖에 가지고 나와 복사하는 곳에서 한 장 한 장 모두 복사하여 1부는 그에게 전달하고 1부는 편자가 가졌다. 그후 복사 한 것을 다시 복사하여 한국의 국회 도서관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에도 보냈고 몇 몇 개인들에게도 전했다.

 

귀국 후 몇몇 지인들에게 번역과 출판에 관해 문의 했으나 선교사 편지는 자료집이어서 다들 별로 관심들이 없었다. 대체로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에는 상당하게 관심이 많아 호응도 하지만 내한 선교사들의 행적과 기록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작고하신 홍치모 교수께 문의를 드렸더니 어느 날 출판에 관심을 가진 분을 소개 한 분이 정주채 목사였다. 그는 편자와 같은 고향 경남하동의 고전교회 출신이어서 잘 알던 사이었다. 그는 손으로 쓴 편지를 영문 타이핑 비용의 대부분을 담당 하였다. 이 영문 타이핑 본을 고 홍치모 교수께서는 필라 영생교회 (당시 이영걸 목사 시무)의 지창욱, 윤두한 두 장로께 감사 하라고 말씀하였다. 각기 $1,000을 희사하신 것으로 한부선 선교사의 따님에게 영문타이핑 한 것의 교정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본서의 출판에 기초 작업이 되었다. 영문 타이핑본을 토대로 번역에 들어갔다. 그 ㄸ때 초역을 맡은 분들이 중도에 그만 둔 경우가 몇 번 생겨 출판을 더한층 세월을 끌게 된 한 원인이었다. 초역은 한부분만(4)을 최영근 박사가 그 외는 모두 문백란 박사가 담당하였다.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주채, 박은조 목사님도 그 일부를 부담 하셨다. 편자도 더러 비용을 지불하였다. 출판은 여전히 진척 되지 않았다. 수년이 지나 번역이 너무 존대 체이고 수정을 해야 되겠다라는 말에 따라 번역을 새로 검토하던 중이었다. 다시 정주채 목사의 주선으로 한국 고등신학 연구원장 김재현 박사를 만나 출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가끔씩 진행의 상황만 전해 들었을 뿐 김재현 박사가 모두 진행했다. 울산의 정근두 목사의 재정적 지원과 정주채 목사의 처음 지원과 알선으로 출판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모두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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