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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턴

이화여자대학교의 창립자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5/30 [17:30]

메리 스크랜턴

이화여자대학교의 창립자

최재건 | 입력 : 2021/05/30 [17:30]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

 

스크랜턴이 '보다 나은 한국인'을 꿈꾸며 만든 여학교 - 코메디닷컴메리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施蘭敦, 1832-1909)은 이화학당(梨花學堂)을설립의 원조였다. 한국어 이름은 시란돈(施蘭敦)이라고 불렸다.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선교사로 봉직하여 그 구분을 위하여 메리는 스크랜튼 대부인으로 불려졌다. 한국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인 그는 이화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과 수원에 위치한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인천 영화여자 정보산업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를 세웠으며, 또 진명, 숙명, 중앙여학교들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상동, 동대문, 애오개 병원과 교회 설립에고 관여하고 도우기도 했다.

 

미국 북감리회 해외 여성선교 위원회에 의해 파송된 선교사인 메리는 1832129일 메사추세스(Massachusetts)() 벨처타운(Belchertown)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목사인 벤튼(Erastus Benton)목사의 딸이었다. 벤튼목사 가문은 당대의 메리의 오빠(Josiah T. Benton), 조카(Stephen Olin Benton)을 위시하여 3대에 걸쳐 성직자가 많은 집안이었다. 메리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의 훈련을 받고 자랐다. 초등교육은 인근의 공립학교를 다녔다. 중등교육은 코네티컷 주였지만 멀지 않은 노르위치 여학교에 다녔다. 12살 무렵부터 교회의 일에 열심히 참여했다. 전도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855년 제조업자인 스크랜튼(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1년 뒤 아들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1856-1922)을 얻었다. 메리 스크랜튼은 40세가 되던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외아들이 공부하던 뉴헤이븐(New Haven)으로 이주하였다. 메리 스크랜튼의 아들은 1878년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를 졸업하고 뉴욕의과대학(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오늘 날 콜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첫 개업지는 오하이오(Ohio) () 클리블랜드(Cleveland)였다.

 

메리는 아들이 의과대학도 졸업하고 의사로 개업하자 아들을 따라 오하이오에 정착했다. 거기서 지역 감리교회의 해외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지회 서기로 활약하였다. 아들은 18827월 미국 회중교회 목회자 펠프스(Phelps Arms)의 딸(Loulie Wyeth Arms)과 결혼했다. 윌리엄 스크랜튼 부부는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과 함께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이 무렵 조선(朝鮮)이 서양국가와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수교하게 되었다. 1883년 미국 오하이오(Ohio) () 리벤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한 노부인(L. B. Baldwin)이 조선선교를 위해 특별한 헌금이 시작된 이후,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는 조선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놀라운 것이어서 18838월 조선의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던 중 가우처(John F. Goucher, 1845-1922)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조선인을 처음 본 가우처 목사는 조선에 기독교가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가우처목사는 그 만남으로 인해 조선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감리교 해외선교부 와일러(Wiley) 감독에게 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권유하며, 자신이 2,000달러를 헌금하였다.

 

또한 가우처 박사와 감리교 선교부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cClay) 박사에게 조선선교의 가능성 여부를 의뢰하였다. 맥클레이목사는 18846월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을 통해 고종(高宗, 1852-1919)으로부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도 좋다는 제한적 선교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중상을 입은 고관 민영익을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이 성공적으로 치료하여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면서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은 성서를 번역하면서 1884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사회(WFMS)에 조선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료선교사와 함께 여선교사도 조선에 함께 파견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다.

 

1869년 설립된 여성해외선교사회는 메사추세츠, 보스턴의 트레몬트가를 중심으로 해외 파송 여성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 선교사회는 남성 중심의 선교활동에서 벗어나 교파를 초월한 수천 명의 후원자를 가진 단체로 성장하여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여성선교단체가 되었다. 19세기 초 보스톤을 중심으로 확산된 여성선교 운동이 남북전쟁을 계기로 12개의 여성선교단체가 복음 운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방문을 마친 맥클레이의 고무적인 보고에 따라 미감리교 선교부는 조선 선교 헌금 모집에 나섰는데, 5,000달러가 책정되었다. 문제는 조선에 파송할 우수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의료 선교사도 필요했지만 이에 못지않은 여선교사도 함께 찾아봐야 했다. 이를 충족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집안은 스크랜튼 가문이었다.

 

여성해외선교사회의 대다수는 메리 스크랜튼의 가족관계와 나이 때문에 그녀를 한국에 적합한 여성선교 활동의 인물로 보지 않았다. 과부였고, 해외 선교활동에 있어 좀 더 젊은 여성을 대표자로 보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여성해외선교사회 규정에는 충분한 지적 소양을 갖출 것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출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선교사회에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스크랜튼은 그녀가 이전 해왔던 사회 활동들은 한국에서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 아울러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는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을 여선교사로,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을 의료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 맥클레이 박사를 클리블랜드로 보내었다.

 

스크랜튼 가의 한국선교사 파송계획은 얘기치 못한 반대에 부딪혔다. 며느리 스크랜튼이 이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의사 남편을 오히려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존경받으면서 지역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보다 더 선교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남편과 시어머니, 나아가 며느리 자신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조선에 그렇게 귀여운 어린 딸을 데리고 3대가 맨 몸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선교사 선정이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서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딸이 병으로 눕게 되었으며,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과 그 며느리가 이들을 각각 간호하게 되었다. 바로 이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힘든 시기에 메리 스크랜튼의 필사적인 설득과 권유의 노력으로 윌리엄 스크랜튼과 그 부인은 조선에서 뼈를 묻겠다는 선교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모자는 188410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로부터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그해 124일 뉴욕에서 윌리엄 스크랜튼은 파울러(C. W. Fowler) 감독에게 뉴욕 동부 연회(New York East Annual Conference) 소속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동시에 한국 선교 개척자로 임명받았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나이 52세의 일이었다.

 

188523일 퍼시픽 메일(the Pacific Male)의 아라빅(Arabic) ()를 타고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아들 부부와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을 출발하여 227일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갑신정변으로 조선의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여 조선 입국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530일 윌리엄 스크랜튼이 먼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왔다. 그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와 더불어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조선에 파견한 첫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장로교가 경영하던 제중원에 잠시 근무했지만 감리교회 단독의 의료 선교 사업을 추진했다. 6월에는 부인과 딸,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도 조선에 입국하였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건립이었다. 마을마다 소년들을 위한 서당과 학교만 있을 뿐 소녀들을 가르칠 만한 어떠한 교육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성과는 달리 학문을 배울 기회는 물론이거니와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온갖 일에 매달려 있는 조선의 여성들을 볼 때 마다 메리 스트랜튼 대부인은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기도와 염원 따라 서대문 바깥 쪽 언덕에 6천여 평을 확보하여 19채의 초가집을 헐고 18862월에 공사를 착공했다. 이때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금의 지원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Oak Park)의 블랙스톤(M. E. Blackstone) 부인이 3,000달러를 보내 주었고 WFMS 뉴욕지회의 700달러의 헌금으로 마침내 11월 낙성식을 올릴 수 있었다. 배꽃이 아름다운 언덕 위에 완성된 이 학교의 규모는 건평 200평이 되는 큰 한식 기와집으로 35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갖춘 곳이었다.

 

학교 건립 후 만난 가장 큰 어려움은 학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무료로 어린 딸을 포함하여 여성들을 교육시켜 주겠다고 아무리 홍보 하여도 부모들의 반대는 완강하였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대부분은 남성 중심의 엄격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야 했다. 여자들은 외출이 금지되었고 집안에 머물러야 했다. 집안일을 배우고 도우며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층민의 딸인 경우 매매의 대상이기도 했다. 남녀내외법도 있었다. 남녀7세 부동석(男女7歲 不同席)이었다.

 

최초의 학생은 한 관리의 소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첩을 명성왕후의 영어 통역관으로 만들어 한 몫 챙기려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석 달 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으며, 두 번째 학생은 꽃님이라는 이름의 십 세 안팎의 소녀였다. 가난한 어머니가 사실상 딸을 맡기러 온 것이었다. 그나마 딸을 서양인에게 팔았다는 마을 사람들의 비난으로 인해 곧 다시 찾으러 오는 것을 만류하는 소동 끝에 이 학교의 최초 영구학생(永久學生)이 될 수 있었다. 다음 학생은 1886년 여름 스크랜튼 대부인이 서대문 근처에서 발견한 고아로 별단이라는 네 살쯤 된 아이였다. 네 번째로 온 학생이 김()점동으로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朴愛施德, 1876-1911)이다. 이 이름은 남편 박유산의 성과 세례명 에스터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튼 선생님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집어넣어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였다. 그 당시 학당에는 나 말고 3명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밥 먹는 일 외에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몰랐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학교는 점차 성장하였다. 1887년 이에 감동을 받은 당시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도움으로 고종에 의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기수(旗手)를 하사받게 되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다음과 같이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학교 이름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왕실에서 그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여성들을 칭할 때(특히 우아하고 감미로운 여인을 칭할 때) ‘배꽃’[梨花]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이화학당’(Pear Flower School)이 되었습니다. 전해들은 바로는 처음에 정부 관리들이 생각했던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전신학당’(傳信學堂, Entire Trust School)이었답니다. 제 마음에 꼭 드는 이름이었는데 한국 관리들 맘에 별로 들지 않았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우리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이름을 지어 내려 보냈고 그것은 지금 우리 학교 대문 위에 달려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액서원(賜額書院)에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받은 이화학당은 이후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를 겪어 조선 여성 스스로가 이화학당을 찾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제시한 이화학당의 교육이념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데 만족한다. 또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교훈을 통하여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한국을 만드는데 희망을 두고 있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제시한 이화학당의 교육 이념은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을 기독교 진리를 통하여 해방시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보다 나은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의 여성들은 자아를 발견하고, 섬기고 봉사해야 할 이웃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지켜야 할 나라와 민족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화를 통해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기독교 학교로 자리매김을 한 이화학당이 활기를 띠면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일도 많아져 선교본부에 추가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게 되어 188710월 학교에 봉사할 로드와일러(Louis C. Rothweiler, 1853-1921)와 병원에 봉사할 하워드(Meta Howard) 등의 독신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왔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화학당 아래쪽에 별도의 한옥 건물을 마련하고 보구여관(保求女館)’이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을 설립하고 하워드로 하여금 사역하게 하였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 역시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여자들을 구하고 보호하는 기구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박에스터가 의사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보구여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보구여관에서 언청이 수술을 하는 것을 본 박에스터는 의사에 대한 반감을 벗을 수 있었고 하나님 사랑은 마음만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감격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의사의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민족에 봉사하는 길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마침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이 보구여관은 오늘날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로드와일러가 오면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학교 안에서 성경과 교리, 찬송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점차 용기를 얻은 그녀는 아펜젤러가 세운 베델예배당’(Bethel chapel, 오늘날 정동제일교회)에서 18881월부터 이화학당 학생 12, 여성교인 3, 여선교사 4명 등 총 19명으로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시작하였고, 이는 한 달 만에 남성교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여성 집회로 발전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남성 교역자의 얼굴을 보면서 설교를 듣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초기 선교과정이 순탄하고 원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직접 선교는 금지 되어 있었는데다가 18955월 일어난 명동성당사건(명동성당이 덕수궁보다 높은 남산 명례방에 건립된 일)과 영아소동(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유괴하여 죽이거나 미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면서 일어난 난동)으로 9월까지 종교집회가 중단되었으며, 18992월에도 비슷한 종교집회 금지령이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타오른 전도의 불길이 꺼지지는 않았다. 188912월의 통계를 보면 집회에 참석한 부인들의 수는 연간 1,064명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으려는 여성 교인의 수가 증가하자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여성 교회의 설립을 제안했다.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당시의 엄격한 남녀유별 풍습을 고려하여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 교회를 제창했던 것이다. 1889년에 설립된 이 여성 교회는 한국에 파송된 오링거(Rev. Franklin Ohlinger, 茂林吉, 1845-1919)목사의 인도 아래 3주에 1번씩 주일 저녁예배를 드렸고, 주일 저녁 외에도 한 주간에 2번 예배를 드렸다. 후에 이 여성 교회는 정동의 벧엘교회와 통합하여 정동제일교회가 되었다.

 

1894년부터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남대문 주변에 위치한 달성교회(후일 상동교회)에서 부녀전도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튼 의사가 남대문 근처에서 전도활동을 개시하면서 하층민이 있는 남대문 지역으로 병원을 이전하였기에 그를 돕기 위한 활동이었다. 이후 상동교회는 폭발적인 교인의 증가로 새 성전을 지어야 하는 행복한 고통도 겪게 되며 수많은 초기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아들과 함께 상동교회를 개척한 후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경기도 지방 여선교 사업을 주관하였고, 1894년 여성으로 최초로 지방 전도 여행을 감행했으며, 18972차 지방 전도 여행을 단행하였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이러한 적극적이고 신실한 전도활동으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1899년 주한감리교여선교회(Korea Woman's Conference)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01년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병을 얻어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다시 돌아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도 사업에 주력하였다. 1906년부터 1년간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지도하에 전도부인들은 4,000여 가정을 심방하여 12,000여명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908년에는 이화학당으로부터 중등과(1904), 보통과 및 고등과(1908)를 설치하게 된 기념으로 그 교육의 원년인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학생 한 명을 마주하고 시작한 수업일인 531일을 이화의 창립 기념일이 되었다. 그 특별한 한 행사로 메이퀸 대관식을 갖기로 했고 그 자신이 초대 메이퀸으로 선출되었다. 이 퀸 대관식이 최근 까지 년례 행사가 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는 어머니’(mother), 한국 교인과 일반인들로부터는 대부인’(the great lady) 칭호를 들으며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받았던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은 1909108일 서울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 창립,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 설립, 한국 최초로 주일학교 시작, 최초의 여성교회 창립, 한국 감리교 여선교부 초대 회장 등.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노력으로 시작된 여성에 대한 교육은 선구적인 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때 시작된 작은 불씨가 이 땅 곳곳에 퍼져 1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를 향한 인류의 희망으로 환한 빛을 비추고 있다.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조선 여성들의 마음속에 비춰 준 한줄기 빛은 조선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에서 충분히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 그의 숭고한 생애와 활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양화진(楊花津) 선교사 묘지에 있는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후일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 묻힌 양화진에 함께 자리하게 될 여선교사 메리 힐만(Mary R. Hillman, 1870-1928)은 당시 다음과 같이 그녀를 추모하였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모든 계층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장례식 날, 유해가 집을 떠나기 직전 궁에서 나온 관리가 찾아와 부인의 관 앞에서 세 번 절하며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한국인들은 만약 부인이 자기 나라에 있었더라면 왕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부인은 왕비처럼 행동했다. 그들 가슴 속에 부인이 왕비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천 명이 모여 부인이 마지막 쉬기 위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는 동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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