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평화를 위해 타오른 불꽃: 안중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1909년 대한제국의 국운이 꺼져가던 시점에 자신의 생명을 바쳐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 온 국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항일운동의 불을 지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요인암살에 투신했을지라도, 신앙과 상충하는 어떠한 문제성은 그의 행적에서 별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의 강렬한 민족애가 보편적인 국가 간의 도의 및 평화 지향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인명을 소중히 여겨 늘 신중하게 행동하였던 까닭이었다.
1. 안중근의 생애
성장과정 -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을 뜨다 안중근은 1879년 7월 16일에 부친 진사 안태훈(安泰勳)과 모친 백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자락산이었다. 본관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참판공파(參判公派)였다. 자는 응칠(應七)이었다. 가슴과 배에 있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란 뜻이다. 가문은 대대로 무반을 지냈다.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부유했다.
여섯 살 때 산천군 청계동으로 이거했다. 안중근은 그곳에서 성장하며 학업을 쌓았다. 개화파 박영효와 연계된 그의 부친이 갑신정변을 피해서였다. 안중근은 공부보다는 산과 들을 누비며 사냥을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16세에 김홍섭의 딸 아려 양과 결혼하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아버지를 따라 동학군을 진압하는 의병전쟁에 참가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천주교 입교는 19세가 되었을 때였다. 동학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과 관련하여 부친이 모함을 받아 천주교 교당에 피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홍석구(J. Wilhelm)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홍 신부를 수행하며 전교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신부에게 프랑스어와 서구지식을 넓혔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한 안중근이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뮈텔 신부가 반대하자 신부의 태도에 실망하여 불어공부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신앙은 계속 유지하여 무장투쟁 중에도 꾸준히 기도하고 전교에 힘썼다.
애국계몽운동과 무력항쟁 - 국권회복운동의 일선에 서다 안중근이 27세 때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일제침략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려 상해로 건너갔다. 거기서 조언을 구하려 민영익을 찾아 갔다. 면담은 거부당했다. 대신 우연히 면식이 있는 르각 신부를 만나 애국계몽운동의 필요성을 깨닫았다. 이듬해 귀국하여 진남포에서 돈의(敦義)학교와 삼흥(三興)학교를 세웠다.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서우(西友)학회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나누고 안창호와 함께 수차례 배일연설도 하였다. 삼합의(三合義)라는 석탄회사를 운영했다가 일제의 방해로 크게 손해 본 적도 있었다.
1907년 고종의 하야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무력항쟁에 뛰어들었다.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갔다가 불라디보스톡에 이르러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대한의용군이 결성되자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선출되어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경흥과 회령 등 두만강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생포한 일본군들을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풀어주었다가 위치가 알려져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그의 부대가 흩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안중근은 고생 끝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순회연설도 하고 한인신문에 글도 실었다. 『해조신문』에 기고하고 『대동공보』의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논지는 상하 국민이 국권회복을 위해 단합할 것을 역설하였다. 1909년 1월에는 크라스카노에서 엄인섭(嚴人燮), 김기룡(金起龍), 강기순(姜基順) 등 동지 11명과 함께 국권의 회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하여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그들은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며 일제와 친일대신들을 처단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는 대동공보사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을 모색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의 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고서 우덕순과 거사를 모의한 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저격하였다.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얼빈 의거 -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고 순국하다 당시에 하얼빈 역은 일본인의 자유 입장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 지역은 청국 영토였으나 철도는 러시아의 소유였고, 그 역 또한 러시아가 관장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러시아인들이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장할 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침착했다. 좋은 장소를 물색하려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총이 제대로 장전되었는지 꺼내어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다가 이토가 하차하자 외곽에 도열해 있는 러시아 군인들 뒤에 서서 이토가 러시아 군대를 사열한 후 외국 영사들과 악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시각에 이전 역인 지야이지스고에서 대기하던 우덕순은 그들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군에 의해 숙소에서 억류되어 있었던 바람에 이미 기회를 놓친 상태였다. 지야이지스고는 원래 두 사람이 함께 거사를 수행하려고 예정한 곳이었다. 이토의 상세한 여행일정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지야이지스고를 유력한 거사 장소로 지목하고 하얼빈을 거쳐 그곳에 도착하여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하얼빈에 남겨둔 조선인 러시아어 통역이 보내온 전문에 미심쩍은 점이 있다고 느낀 안중근이 그를 만나러 하얼빈으로 돌아간 바람에 도리어 감시망에서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온 후 이토가 바로 그곳에서 내린다는 정보를 얻고 다음날 역에 나가 대기하였다. 그는 이토가 인사를 마치고 러시아 군대 쪽을 향해 두 세 걸음 나갔을 때 이토의 오른편 방향에서 탄환 세 발을 발사하여 그를 명중시켰다. 이어 혹시라도 피격된 자가 이토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을 염려하여 그 뒤를 따르는 좌우의 일본인 수행원 3인을 향해서도 총탄을 발사했다. 이내 러시아 군인들이 덤벼들자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이토는 피격 후 30분 만에 기차 안에 옮겨진 가운데 절명했다.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가 성공한 사실을 감옥에서 알았다.
안중근은 일본 영사관에 인계되어 여순 감옥에 구금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을사보호조약 제1조의 일본이 한국의 외교문제를 대신 담당하고 한국 신민의 이익을 보호하기로 했다는 조목을 들어 안중근을 일본법정에서 재판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심문 과정과 여순 법원에서 있은 6차의 공판(1910년 2월 7일-12일) 과정에서 심문결과 발표내용의 허위성과 자신의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는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자서전과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다. 그런데 『동양평화론』은 그가 형 집행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미완의 저술로 남게 되었다. 그밖에 재판기록과 편지와 유언 및 어록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홍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성사를 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3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2. 안중근의 인품과 사상
안중근 의사는 안목이 넓고 성품이 대범하며 지조가 곧은 인물이었다. 첫째로 안목이 넓다는 것은 그의 시야가 자국의 주권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한중일 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고 만국공법의 도의를 즐겨 따랐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보편적인 의를 추구하였기에 자국만의 편협한 이익을 위해 이웃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본을 응징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주재 천주교 신부들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한 것을 신앙인으로서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신부들은 서구문화 우월의식에서 조선의 문제를 바라보며 일제 당국과의 마찰을 피해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구국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뮈텔 주교는 1910년에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이 비밀리에 일제 총독암살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자금을 모금하고 있는 사실을 일제에 고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신부들의 우월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구별해서 이해할 줄 알았다. 신부들의 소행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었으나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의 양심은 기독교 신앙과 무장항쟁을 갈등 없이 양립시킬 수 있었다.
안중근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결로 파악했다.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우려하여 한중일 3국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구상한 아시아 삼국의 인종적 단합은 각국의 독립과 대등한 관계 보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1904-5년의 러일전쟁 때 선전포고문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천명한 일본의 승전을 기쁘게 여겼다. 그는 일본이 그 포고문의 대의를 이행하기만 한다면 과거에 조선에게 끼친 죄과를 덮어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승전 후 “같은 인종의 이웃 나라를 치고 우의를 끊어” 조·청 양국인의 소망을 깨뜨린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의로운 전쟁을 개전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그는 검찰관 앞에서 이토의 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1. 조선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조선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과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제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조선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조선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조선이 태 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이는 죄요,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님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다.
둘째로 성품이 대범하다는 것은 그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선뜻 일어섰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한 가지 노선만을 고집하지 않고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교육사업,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언론활동, 순회유세활동 등의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는가 하면 의병항쟁과 요인암살 등 무장투쟁에도 앞장섰다. 그의 비상한 기개는 특히 일본 검찰의 심문 중에 그리고 일본인 일색의 법정에서 담대하게 이토의 죄과를 나열하며 그를 역적이라 부르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취조 과정에서 자신이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닌 까닭에 도주할 필요는 없었다”고 하여 자신이 이토를 암살하는 순간에도 양심적으로 떳떳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법정에서는 자신이 죄인 취급을 받을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국제공법을 적용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내가 오늘날 이토를 살해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법정에 끌려나온 것은 전쟁에 출전했다가 포로가 된 것에 불과하며, 결코 일개 자객으로서 심문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이와 같은 주장을 여러 번 하여 자신이 전쟁포로인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사형만은 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죄를 경감시켜주려는 일본인 변호사의 변론을 반박하여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일본인 변호사들 중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준 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인 변호사가 선임된 사실 자체를 부당하게 여겨 이의를 제기하고 그를 의지하지 않았다.
셋째로 그의 올곧은 지조는 감옥에서 그가 일본인 경찰관에게 써주었다고 하는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르러도 기운이 구름 같다)라는 글에서 단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志士仁人殺身成仁”(지사와 어진 이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라는 글도 의를 중시하고 인을 성취하기를 원하는 그의 고결한 지사정신을 나타낸다. 그는 두 아우(정근과 공근)에게 남긴 최후의 유언에서 조국을 염려하는 한결같은 일념을 나타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넓고 대범하며 올곧은 지사정신과 강렬한 민족의식과 가톨릭 교인으로서의 신앙양심을 가지고 국제평화와 국권회복을 위해 불의에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의 의거는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민족적 기개를 세계에 과시하여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항일투쟁의욕을 고취시켰다. 무장 항쟁에 나선 애국지사들에게는 그야말로 본받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목하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일본 검찰관마저도 그를 “동양의 의사”라고 불렀으며, 법원과 감옥소의 관리들도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넣어주며 그의 친필 글씨를 받아 간직하고자 하였다. 그 자신의 집안에도 영향을 끼쳐 그의 사후 안씨 일족(친동생들, 사촌형제들, 조카들)이 러시아와 상해에서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펼쳐 독립운동가 가문의 영예를 이었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의 애국 혼은 만세의 귀감이 되었다.
숲과 나무 2004년 8월호 <저작권자 ⓒ 최재건의 역사탐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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