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 가톨릭 선교의 대부: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利瑪竇)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利瑪竇 1552- 1610)는 근대 중국 가톨릭선교의 개척자였다. 그는 당대의 세계적 석학이었고 자는 서태(西泰)였다. 중국에서 태서의 학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였다.
리치는 1552년 이태리의 마체라타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전공은 법학이었고 로마에서 공부하였다. 후에는 수학자 크라비우스(Christopher Clavius)의 문하생이 되어 과학교육도 받았다. 그중에서도 천문학에 몰두하였다. 또한 당시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에도 동조하여 동아시아에 마음을 두고 연구하게 되었다.
리치는 1571년에는 예수회( The Society of Jesuit) 에 가입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세가 팽창되자 익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주축으로 새로이 조직된 수도회였다. 가톨릭 교세의 회복과 아시아 선교로 가톨릭의 의 확장을 이루자는 취지였다. 리치는 극동으로 선교에 나가기로 결정하고서도 1577년 5월부터는 코임부라대학에서도 연구하여 학문의 식견과 지경을 넓혔다.
마침내 1578년 5월에 폴트칼의 리스본을 떠나 극동 탐구의 장도에 올라 1578년 9월 13일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였다. 1580년에는 신부로 서품받고 1582년 3월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582년 8월 7일에는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나 선교가 용인되지 않았다. 리치보다 먼저 온 루게리 신부가 중국에 3년 전에 도착하였으나 여전히 선교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리치는 중국어와 문화를 익히며 모범적인 삶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리치는 루게리와 함께 공동지역을 답사하다가ㅡ1583년에는 자오칭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유명한 유학자 구태소에게서 중국 고전도 공부하여 최고의 식자층과 대화 하고 토론하고 저술도 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두 신부는 폴트칼- 라틴어 사전을 이때 최초로 편찬하였으나 잘못 보관되어 출간되지 못했다. 1934년에야 재 발굴되었고 2001년에야 출판되었다.
리치는 혼자서 한문으로 된 20여편의 저술도 간행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가 1595년에 간행된 ‘천주실의(天主實義)’ 이다. 중국의 지식인이 묻고 서양의 선비인 서사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이 책은 이수광에 의하여 ‘芝峯類說(지봉유설)’ 이란 백과 사전적인 책에 그 당시에 조선에도 소개되었다. 그 후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성호 이익을 중심한 남인계 학자들에 의해 더욱 심도 있게 탐구되었다. ‘천주실의’는 조선 선교의 장을 여는 데에도 그 원류의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은 교계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는 동서문명교류사 분야에서는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최근까지 여러 차례 번역 출간되었다.
리치는1598년에도 중국어- 폴트칼사전, 폴트칼- 중국어사전도 편찬했다. 천문학, 지리학, 유크리트의 기하학, 수학등의 서양 학문을 서광계, 이지조 같은 당대 최고의 중국 석학들을 비롯하여 관리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쳤다. 호기심을 넘어 서양 학문으로 받아들여져 존경도 받았다. 리치는 서양의 학문을 전하고 교류하는 것을 매체로 삼아 기독교 사상도 전하였다.
마침내는 황제로부터 선교의 자유도 얻었다. 리치는 마카오를 출발한지 3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도보로 남경, 북경등을 전전하다가 천진에서는 6개월간 세관원의 횡포로 감옥생활의 어려움도 겪었다. 북경에 머물다가 퇴각한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의 파병과 연관되었다. 신종황제의 호의로 1601년에는 북경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신종 황제에게 서양의 여러 기기들과 자명종을 선물하여 크게 환심을 샀다. 황제는 문 안에 사찰로 쓰던 건물 한 채를 리치에게 주었고 리치는 교회당으로 개축하고 선교의 기지로 사용하였다.
리치의 중국선교전략은 오늘날에도 시행하기 어려운 ‘적응 주의적 선교방법’이었다. 우선 복장부터 그 지역 주민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 중국 남쪽의 불교적 영향력이 큰 곳에서는 승려복을 입었고 북경에 가서는 유학자들이 즐겨 입는 스타일의 복장을 했다. 다른 일반적인 생활도 중국의 풍습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1584년에는‘만국곤여지도’를 간행하여 중국 지성인들에게 서구의 문물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였다. 중국인의 세계관에 맞게 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도의 사본 하나가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다. 조상에 대한 제사문제도 조상숭배의 한 의례로 보고 허용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보유론(補儒論)이라고 명명했다. 기독교에는 유교에 없는 이러이러한 점이 더 보충하고 있다는 이론이었다.
리치는 28년간 중국에 살면서 중국선교의 토대를 쌓았다. 서민에서부터 최고위 층까지 하나님을 믿는 일과 아는 일을 자신의 터득한 지식을 활용하여 전했다. 중국의 천명사상과 상제사상을 스콜라 철학의 하나님 사상과 연관시켰다. 서양의 과학을 중국 사회에 소개하고 서구문화를 중국 전통문화에 접합되도록 했다. 중국문화와 유교의 여러 문헌을 라틴어로 서양에 소개하는 데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605년에는 서구인으로 최초로 카이펑(開豊)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유럽에 알리기도 했다.
리치는 고향을 떠나 생소한 중국의 삶에 적응하고 주어진 소명을 다하느라 건강을 잃게 되었다. 1610년 5월 11일 이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59세였다. 그의 시신은 판토하 신부의 요청과 황제의 후의로 북경교외의 석문 책난아에 장지를 하사받아 안장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뒤를 따라 예수회의 파송 선교사로 중국에서 헌신한 퍼비스트(Ferdinand Verbiest)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의 묘도 있다.
동서양에 끼친 그의 선교적 문화적인 공로로 세계 도처에 그의 이름을 붙인 대학과 연구소들이 생겨났고 연구 결과물과 전기들이 나왔다. 그에 대한 교황청의 시성식도 2014년에 있었다. 한국의 식자층을 통해 가톨릭교회 형성에 끼친 그의 선교적 공헌도 기억되어야 할 대목이다.
<참고문헌> 조나탄 스펜스. 『기억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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