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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의 부흥사 박재봉 목사

뜨거운 기도와 신앙으로 신유의 부응운동가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8/25 [06:01]

신유의 부흥사 박재봉 목사

뜨거운 기도와 신앙으로 신유의 부응운동가

최재건 | 입력 : 2021/08/25 [06:01]

뜨거운 기도와 신유의 부흥사, 박재봉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동산교회심언(心言) 박재봉(朴在奉, 1904-1992) 목사는 해방 전 후 한국 기독교계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대표적인 부흥사로 활동하였다.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수많은 집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파하면서 전도하였고 신유의 기적을 많이 베푼 부흥사로 알려졌다.

 

박재봉은 1904614일 강원도(江原道) 김화군(金化郡) 김성면(金城面) 방축리(防築里) 99번지에서 목수 겸 농부인 박창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창숙은 천도교(天道敎)의 철원(鐵原)지주 접장을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일어난 19106살의 나이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박재봉은 어린 시절 기독교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공연히 교회에 가는 아이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했고 심지어 예배 시간에 놋 세숫대야를 징처럼 쳐서 울려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악동(惡童)인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191333일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는 신사(神社) 옆의 은행나무 위에 올라가서 놀던 박재봉은 이를 제지하는 일본(日本) 순사에게 기왓장을 던지고 달아나다가 어느 기독교인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고 돌아오던 중 박재봉은 교회로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 부흥의 밀알들, 갓피플 19의 저자인 길원필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저녁밥을 얻어먹고 돌아오는데 그날 저녁 교회당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가 교회당 문 앞에 가까이 가서 기웃거리고 있을 때 젊은 전도자의 우렁찬 설교가 흘러나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와 같은 훌륭한 민족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모세를 찾고 있습니다. 누가 오늘의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가 되겠습니까?”

나요, 내가 돼 보겠습니다.”

갑자기 소리치며 들어서는 소년 재봉을 바라보던 교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쳤고 젊은 전도인은 뚜벅 뚜벅 소년의 곁으로 다가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이 때 전도자의 손길이 그렇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재봉은 감리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191641일 금성공립보통학교(金城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고, 1920325일 졸업하였다. 한편 학교에 다니던 191931일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이 발표되고 전국적으로 운동화 되자, 박재봉은 15세의 나이로 적극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박재봉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심을 길렀다. 마침내 192077일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인 갬블(Forster Kirk Gamble, 甘保利, 1880-?)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1921년 일제에 의한 체포령이 내려졌기에 박재봉은 같은 해 415일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다. 1928년 하산할 때까지 7년을 산에서 명상과 기도로 지내게 되었다. 필동교회 50년사의 연표에 따르면 바로 이 시기인 1923년 하반기 박재봉은 중생의 체험을 하고 소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1928년 하산할 당시에 문둥병으로 죽어가던 환자를 기도로 치유하는 기적이 있었다고 길원필 목사는 전하고 있다.

 

정확한 시기를 알기는 어렵지만, 박재봉이 금강산에서 중생을 체험할 시기 혹은 하산한 직후 그는 성령의 큰 체험 기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폐결핵에 걸려 몸이 병약했던 그는 병이 악화되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비록 겉으로는 유도 4단에 검도 3단으로 튼튼한 몸으로 단련되어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부모님들이 선생을 가마에 태워 서울의 조선총독부병원(朝鮮總督府病院, 현 서울대학교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 보내 진찰을 받게 하였다. 결과는 모두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절망하고 있던 박재봉에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길원필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해 기술하였다.

 

박재봉 청년은 삶이 허전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차라리 기도로 마치고 싶어서 남산 숲속으로 들어갔다. 4일 동안 물 한모금 안마시고 엎드려 있었다. 4일째 되는 날 새벽 어디서인지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병을 고쳐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

다시 귀를 기울여도 역시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주여, 이 몸을 살려주시면 몸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 때 갑자기 뜨거운 불이 가슴 속 가득히 담기며 무섭게 전류가 흘렀다. 그 순간 이제 살았다는 확신이 왔다. 그 길로 그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께 뛰어가 하나님 만세!”하며 외쳤다.

 

한편 1928년 가을 박재봉 목사가 다니던 강원도 통천교회(通川敎會)에 시무언(是無言) 이용도(李龍道, 1901-1933) 목사가 부임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19281월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監理敎神學大學校)의 전신인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14) 하고 첫 부임한 곳이 통천교회였다. 그러나 당시 통천교회에는 청년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고 교회의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박재봉은 교인으로서 이용도 목사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래도 교회의 부흥에는 무엇인지 모자람이 있다고 느꼈다.

 

박재봉은 이용도 목사와 함께 금강산 백정봉(白鼎峯)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다. 이 때 두 사람은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였다. 하산한 이후에는 열정적인 사역을 펼쳐 청년들 사이의 갈등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 불과 몇 주일 사이에 50여명에 불과하던 신도수가 160여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용도 목사 본인도 통천교회에서 겪은 놀라운 변화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산상기도로 인해 이용도 목사는 전국적인 부흥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이었다.

 

박재봉도 본격적인 사역을 하기로 작심하고 만주(滿洲)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후 통천군의 장룡포리(長龍浦里)로 돌아와 1930223일 장룡포교회(長龍浦敎會)와 사립학교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73일 한선덕과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이용도 목사가 담당하였는데 이용도 목사 부부는 여름 장마철에 주례를 서기 위해 다녀오다가 홍수로 인해 큰 위기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1930년 박재봉은 기독교대한감리회(基督敎大韓監理會) 원산(元山)지방 고성(高城)구역 온정교회(溫井敎會)와 장전교회(長田敎會)에 파송을 받았고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박재봉은강원도 북부와 원산 일대의 여러교회들에서 목회를 하였다. 특별히 온정교회와 장전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부흥사로 인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19342월부터 본격적인 부흥사역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국적인 명성을 얻던 이용도 목사가 이단시비에 휩싸였다. 감리교 뿐만이 아니라 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몰고 집회를 금지했다. 19333월 휴직처분을 받고 감리교를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용도 목사는 19993월 감리교에 의해 명예 복직되었지만, 당시 그의 상심(傷心)은 매우 컸다. 이용도 목사를 따르던 다수의 목사, 전도사, 그리고 교인들은 193366일 평양에서 창립공의회를 열고 예수교회라는 토착교단을 형성하였다. 이 조직을 통해 이용도는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초기 예수교회에는 평양(平壤)과 원산, 강원도 북부 일대의 40여개 교회가 참여하였다. 중심인물로는 이용도, 우원(友園) 이호빈(李浩彬, 1898-1989), 백남주(白南柱, 1902~1949) 목가 중심이었다. 이용도 목사는 1933102일 원산에서 소천하였다. 백남주 목사는 이후 성주교회(聖主敎會)’라는 별도 교파를 형성하는데 참여하였다. 이호빈 목사는 중앙신학교를 세웠는데 오늘날의 강남대학교로 발전되었다.

예수교회는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이 공산정권의 통치하에 들어간 이후 교세의 약화로 조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남하한 에수교회 성직자들 중 상당수는 감리교와 장로교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예수교회는 현재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박재봉은 이용도 목사와의 관계로 감리교에서 예수교회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교회 평남(平南)지방 안주교회(安州敎會)를 거쳐 19389월 이호빈, 현성원(玄聖元, 1895-?)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박재봉 목사는 1940년부터 1941년까지의 2년 간 국내의 여러 지역과 만주일대를 돌며 초교파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극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는 많은 신유의 은사를 보여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다.

 

박재봉 목사는 주로 예수교회 중앙본부 전도국 등에서 봉사하였고 예수지의 편집장으로도 근무하였다. 그는 철저히 기도 중심의 삶을 살았다. 1942년 박재봉 목사는 첫 단행본인 영훈록을 출판하였다. 한국 기독교 문인으로 화수분같은 소설을 쓴 전영택 목사(田榮澤, 1894-1968)영훈록의 추천사에서 박재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는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중략) 그가 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가 산에서 많이 살았고 산다는 것이다. 그의 본가는 차라리 산속이다. 그가 산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이십일이고 십일이고 세월이고 먹지 아니하고 마시지 아니하고 마치 어떤 동물의 동면상태를 계속한다. 그러는 동안에 신비스러운 경험을 한다. 그는 프랜시쓰와 같이 내 것 없고, 돈 없는 생활을 몇 해든지 계속한다.

 

1930년대 후반부터 군국주의 체제를 굳힌 일제(日帝)는 종교탄압이 가혹해졌다. 미소기바라이, 동방요배도 강요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소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라는 미명하에 천황(天皇)현인신(現人神)’으로 모시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국민의례로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미소기바라이라는 신도 세례식, 동방요배도 강요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에 굴복하였지만 박재봉 목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 때 평양의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의 교수를 지낸 약전(藥田) 김성식(金成植, 1908-1986) 선생이 박재봉, 이기선(李基宣, 1878-1950?) 목사 등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1942년 가을 박재봉 목사는 포천(抱川) 관인면(官仁面)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7일 만에 탈출하였다. 이에 박재봉 목사는 고송(孤松) 박경룡(朴慶龍, 1910-1988), 유재헌(劉載獻 1905-1950?), 이성해 목사 등과 함께 금강산에 다시 들어가 기도와 묵상, 성서강독 등으로 4년간의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1945815일 광복을 맞게 되었다.

 

해방이후 박재봉 목사는 서울로 내려와서 감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부흥사역에 집중하였다. 이때 소경, 앉은뱅이, 간질환자 등 많은 이들이 병을 극복하는 놀라운 신유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일례로 194943일부터 5일간 계속된 서울의 흑석동교회(黑石洞敎會)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는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병자 45명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새문안 교회에서 열린 집회 때에는 9명의 앉은뱅이가 모두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무렵 필자의 고향인 경남 하동읍교회가 장로교회였는데도 그의 부흥 집회가 열렸다. 어유년 주일 학교학생인데도 그의 이름을 기억 할정도로 그 지역에도 그의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박재봉 목사는 자신의 인도로 병을 나은 이들 중 다수가 교회를 여전히 떠나 있는 것을 알고는 주님께 신유의 은사를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부흥회는 항상 뜨거운 회심과 함께 놀라운 신유의 은사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신유의 은사를 지닌 부흥사였지만 실상 박재봉 목사가 부흥회에서 강조한 것은 기도의 중요함이었다. 1949년 발간된 영의 만나라는 책의 기도하자라는 글에서 박재봉 목사는 참 믿음의 사람은 예수의 기도하심을 기억하며 새벽기도, 성전기도, 산기도 등에 열심을 가지고 매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 선생은 다른 것이 이적(異蹟)이 아니라 이런 삶을 꾸준히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적이요, 기적이라고 언급하였다. 선생의 부흥사역에 있어 넘쳐나고 화제가 되었던 이적들은 정작 박재봉 목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부차적인 선물이지 결코 주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재봉 목사는 6.25 동란(動亂) 중인 195112월부터 부산(釜山)의 보수동교회(寶水洞敎會)에서 목회하였다. 그의 부임 후 교회의 면모는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었다. 교회가 크게 부흥되자 또다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총회본부 전임 부흥사로 총리원 파송을 받아 조경우(曺景祐, ?-1988) 목사와 함께 195341일부터 19543월까지 웨슬레 탄생 250주년 기념 부흥전도를 주제로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19546월에 발간된 감리회보7권에서는 그 성과로 교회 수는 80교회, 915회의 집회, 총 청중 313,879, 5,175명의 새 신자가 결단하는 큰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한편 부산에 피난을 갔다가 박재봉 목사를 만난 이들을 중심으로 1953117일 은성교회의 첫 예배가 선생을 담임목사로 모시고 시작되었다. 은성교회는 이후 필동교회(筆洞敎會)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시 중구(中區) 필동에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박재봉 목사는 195861일 교회를 이임 할 때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봉사했고, 이 기간 동안 교회의 성전이 완공되고 성도 수도 크게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즈음 박재봉 목사에게는 큰 오점이 될 사건이 일어났다. 선생에게는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이끌기 위해 선임된 여자 조수 2명이 있었는데, 지방의 한 집회에서 이씨성을 가진 과부인 여신도가 이들 조수들이 박재봉 목사와 특별한 관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러한 언급 자체를 매우 불쾌하고 민망하게 여긴 박재봉 목사는 3년간 교회를 떠나 명상의 시간을 보내었다. 20여년이 지나 이 여신도는 그 사건이 자신의 위증(僞證)이라고 실토했다고 하지만 박재봉 목사에게는 매우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평온한 시간을 보낸 후 박재봉 목사는 다시 사역의 길로 돌아왔다. 196313일 부산의 해운대교회(海雲臺敎會)에 부임하였는데, 자신의 사재를 털고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받은 사례비를 전적으로 헌금하여 교회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선생의 부흥회에 감화를 받은 이들이 해운대교회로 오려고 하면 박재봉 목사는 당신을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 주는 교회 담임목사가 계시는데 당신이 이렇게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도저히 형편이 되지 않으면 담임목사의 확인을 받아 가지고 오라고 언제나 말했다고 한다. 호서대학교(湖西大學校)에서 박재봉의 생애와 사상 연구20091월 박사학위를 받은 손동욱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현재 해운대교회 한석문 목사는 해운대교회가 오늘과 같이 성장하고 부흥하는 기반을 다지는데 박재봉 목사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이제 58년이 되어서 교회 60년사를 발간할 예정을 가지고 있는데 박목사의 해운대교회에서의 목회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5312일 은퇴할 때까지 박재봉 목사는 감리교 남부연회 국내외 선교위원회 상임위원장(1969), 연회운영위원장(1969), 부산지방 감리사(1971) 등의 주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선생의 경이로운 노력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74614일 미국(美國) 텍사스 주() 달라스에 위치한 대학인 내쇼날 크리스찬 유니버시티(National Christian University)로부터 명예 신학박사(D. D.) 학위를 받았다. 일제시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정식 신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박재봉 목사에게는 큰 영예라 할 수 있다.

박재봉 목사는 은퇴 이후에도 초교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교회문제 연구원 원장(1976), 감리교 총회 국내외 선교기획 위원회 고문(1976), 대한예수교장로회 남산신학교(南山神學校) 강사(1977),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總會神學校) 명예교장(1977), 국제아세아복음선교회(國際亞細亞福音宣敎會) 고문(1977),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남산신학교 이사장(1977)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자녀들이 거주하던 미국의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로 이주하였고, 198912월에는 나성한인감리교회(羅城韓人監理敎會)에서 원로목사로 선정되었다. 1992419일 이 교회에서 부활절 설교를 마지막으로 하였고 같은 해 7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8075일 글렌데일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선생의 금혼기념예식 순서지에 따르면 박재봉 목사는 27세부터 74세까지 1,142회에 달하는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22,121회의 설교를 진행했는데, 결신자 수는 300,033명에 달했고 신유치병자수 9,381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길원필 목사의 기록에 따르면, 박재봉 목사의 41녀에 달하는 자녀들의 가정에서 무려 목사 13명이 배출되어 한국, 미국, 캐나다(Canada), 러시아(Russian Federation)에서 목회하고 있으며 박재봉 목사 형제들의 외가까지 합하면 39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기독교 음악가로 수많은 동요와 수편의 찬송가, 오페라 작곡을 한 박재훈 박사도 그의 동생이다. 박재훈 박사는 영락교회성가대 지휘 한양대교수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스 안젤레스 영락교회와 토론토 연합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다가 목사되어 활동하다가 20218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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