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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기독교

기독교 선교와 한글

최재건 | 기사입력 2021/10/01 [10:34]

한글과 기독교

기독교 선교와 한글

최재건 | 입력 : 2021/10/01 [10:34]

한글과 기독교

 

 Y$FUND :: 한글날 공휴일 지정(한글날 유래, 한글의 기원)

109일은 한글날이다. 기독교는 언더우드 선교사 주도로 한글을 선교 공용어로 삼았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세종에 의해 한글은 창제되었지만, 국가가 공용화한 것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였다.

 

한글날은 해방 직후부터 최현배와 같은 걸출한 한글학자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국가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 가운데 글자를 만든 날을 기념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최현배는 한평생 겨레말, 한글 연구에 헌신하여 우리말본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글 전용운동도 펼쳤다. 한글 가로쓰기도 실현하게 하려 애썼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세계의 많은 문자 가운데 한글이 배우기 쉽고 언어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은 이미 헐버트 선교사에 의해 널리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도 선교 초기에는 한글사용 실태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였고, 1930년대에도 전 국민의 문맹률은 10%대였다. 한글과 공생의 관계라고 불릴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두고 최현배는 기독교 때문에 한글이 살고 한글 때문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될 수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한 양자의 관계는 조선에 가톨릭교회가 처음 세워지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조선 후기에 양반층에 의해 서책을 통해 연구되다가 신앙으로 승화 수용되었다. 식자층 신도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도들을 위해 교리서나 발췌 성경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필사본으로 유통되게 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계층을 넘어 확산되었다.

 

 

조선왕조 때 한글이 공문에서 처음 사용된 해는 1801년이었다. 곧 신유박해 때였다. 학문적인 호기심에서 서학(西學) 연구에 몰두하던 서학도들이 1784년 천주교회 창립 이후 조정은 그것의 급격한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정책을 펼쳤다. 정조 때 권력을 쥐었던 남인 세력을 타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배후에 있었지만, 제사를 철폐하고 임금과 아비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회적 측면의 박해이유를 제시하였다. 조정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이 첨부된 척사윤음(斥邪輪音)을 전국에 공표하며 천주교 박해의 정당성을 홍보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는 전국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외면받던 한글이 본격적으로 전국에 두루 확산 될 수 있게 된 것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내한한 후의 일이었다. 성직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내한한 언더우드 (H. G. Underwood)는 선교 공용어로 한글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먼저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간행하였다. 이 사전은 병인박해 무렵 프랑스 신부들이 만든 한불자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일은 후에 게일 선교사가 완수했다. 언더우드는 연이어 선어 문법(1899)과 한글 회화책을 간행하였다. 1894년에는 곡조에 가사를 붙인 한글 전용의 찬송가도 간행하였다. 그 외 신문, 전도 책자 등을 모두 한글로 간행하게 하였다.

 

성경도 이미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의 예수셩교젼서나 이수정이 일본에서 간행한 신약전서마가전언해등을 그대로 사용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롭게 한글 번역에 착수하였다. 1900년 무렵 신약의 번역이 이뤄지고 1910년에는 구약까지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놀랍게도 바로 그날부터 성경 번역위원회는 해체되었지만, 성경 개역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 말 신구약 성경이 개역 될 때 조선 성서 공회는 조선어학회의 구개음화에 따른 표기를 요청받았지만 반영하지 않았다. 19526·25 동란의 와중에 뒤늦게 이를 시행하였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 문맹 탈피를 위한 동아일보의 브나르드운동보다 훨씬 빨리 선교 초창기부터 교회당에서 밤마다 야학을 열어 한글 강습을 병행하였다. YMCA의 농촌 계몽운동과  장로교총회 농촌부의 계몽우동때도 필수 과목이었다. 초창기 교회가 설립 될 때부터 대개 세례 문답의 제1조는 성경 지식이나 신앙과 교리에 관한 것 보다 글을 읽을 줄 아십니까?’였다. 필자는 1940년대 후반에도 글을 배우자는 제하의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초기의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선구적 노력을 이어받아 한글 연구와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글 연구의 전문가가 배출되었다. 곧 거기에서 주시경, 최현배. 김윤경 등등의 한글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우리말 큰사전이 준비되었다. 일제 말에 이 사전의 출판을 시도한 것이 알려지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연루된 기독교인 중에 한증과 이윤재 등은 함흥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들은 우리말을 사랑하다가 목숨까지 바친 호국과 순국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한 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의 기능을 갖지만, 문화형성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것은 무지한 백성들을 어여삐 본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글 창제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반대와 천시 속에서 한글은 왕조시대에는 명맥만 유지되었다. 어진 임금의 뜻을 헤아린 적은 무리의 백성들에 의해서였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노력 외에도 한국교회는 수많은 종류의 잡지를 간행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을 대중화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앞장섰다. 한글을 사랑하고 연구한 아름다운 전통은 한국교회에서 이어져 왔다. 그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한글학회나 한글 연구의 주류세력은 이제 기독교계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한글학자가 다 기독교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나라 말, 한글을 발전시키는 전통은 한국교회가 이어가야 할 훌륭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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