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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 총리사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최재건 | 기사입력 2021/10/19 [16:59]

양주삼 총리사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최재건 | 입력 : 2021/10/19 [16:59]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양주삼 목사

 

양주삼 총리사의 생애와 순교신앙 : 네이버 블로그양주삼(梁柱三, 1879-1950? 白沙堂)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監理敎會)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는 1879125일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군(龍岡郡) 산남면(山南面) 홍문리(弘文里)에서 남원(南原) 양씨 가문의 아버지 양정섭(梁禎涉)과 어머니 김원실의 2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당시 풍조 따라 소실(小室)을 얻어 가족과 따로 사는 바람에 양주삼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지내게 되었다. 엄격하면서도 손자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양주삼은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6세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웠고 20세까지 학자로 명성이 높던 외숙(外叔)으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워 한문에 대한 조예가 깊어졌다.

 

이 무렵 상처가 된 부모님의 갈등과 종교문제로 고심했다. 유교(儒敎)로는 인생의 근원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5세를 전후하여 한학을 공부하면서도 여러 종교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바른 도()를 찾기 위해 불교(佛敎)와 동학(東學)의 지도자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마음의 안식을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 지도자의 생활은 이상적인종교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양주삼이 마음의 안식을 얻은 것은 기독교(基督敎)를 접하면서부터였다. 그가 여러 종교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당시, 고향인 용강지역에 감리교 선교사 노블(William Arthur Noble, 魯普乙, 1866-1945),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裵偉良, 1862-1931) 등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 차 찾아왔다. 또한 중국(中國)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되어 조선(朝鮮)으로 전래된 기독교 관련 잡지인 만국공보(萬國公報)와 한역 기독교 서적인 덕혜입문(德慧入門)이 유통되고 있었다. 이 책들을 읽고 그는1898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20세가 되던 1899년 교회의 정식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에 입문하자 양주삼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서양의 학문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1899년 겨울 엽전 열량(十兩)을 갖고 걸어서 상경했다. 서울에서 양잠전습소(養蠶傳習所)를 마치고 곧 중국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미국(美國) 감리교 선교사 알렌(Young J. Allen, 林樂知, 1836-1907)이 중국 상해(上海)에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기를 원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당시 조선정부의 신식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였다가 그 학교가 비리로 폐교되자 선교사로 활동하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訖法, 1863-1949)로부터 소개편지를 받게 되었다. 친구에게 빌린 25원을 가지고 190122세 때 인천을 떠나 중국 상해로 갔다.

 

영어나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양주삼을 만난 중서서원의 파커(A. F. Parker, 潘愼文) 원장은 청년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입학을 허락하였다. 그런데도 무일푼인 그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돈을 벌면서 객지에서 겪은 고초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주삼은 기도하고 찬송하며 신앙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입학 3년 만에 양주삼은 전교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침내 190526세의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중서서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한편 양주삼은 190210월 파커 원장에게 세례를 받고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그 보다 앞서 중서서원에 유학하여 188743일 세례를 받은 윤치호(尹致昊, 1865-1945)에 이어 두 번째였다. 중서서원 입학 당시 양주삼이 제출한 한문 유학목적 설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번역본, 중략)

고국을 떠날 때에 공부에 성공을 하지 못하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아니 하려고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다행히 파커 원장님에게 그 소개 편지를 보였더니 나를 불쌍히 여겨 서원에 입학시켜 주시고 거처할 방까지 주시고 육체를 기를 음식을 주시며 교실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그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몇 해가 되든지 반드시 학업을 마친 후에야 고국에 돌아가 전국 동포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전할 것을 바라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학문의 길을 택한 양주삼 목사는 190510월 영국(英國)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물론 가진 돈이 많아서 택한 길은 결코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그러나 영국에서 비록 많은 첨단 문물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를 후원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뉴욕(New York)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한국동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의 인품과 신앙으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점차 명망이 높아져 간 양주삼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초청하였다. 영어를 잘한다고 알려진 그는 목회자로 초빙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에 힘썼고, 마침내 미국 남감리회의 도움을 받아 19061215일 미국 내 최초의 한국인 교회인 샌프란시스코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후 양주삼 목사는 1907318일 태평양(太平洋) 연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 공식적으로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교회 내에 야학(夜學)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190812월부터 190912월까지 우리말 월간잡지 대도(大道, The Korean Evangel)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양주삼은 본격적인 신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사실 중서서원의 파커원장이 이미 신학의 길을 추천하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선생은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양주삼 목사의 전기라 할 수 있는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를 저술한 목원(牧園) 이호운(李浩雲, 1911-1969) 목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상해 중서서원에 있을 때 파커 원장이 자기 집 만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양군은 학업을 마치거든 신학을 하시오.” 했을 때 단 한마디로 거절했었다. 그리고 신학보다 의학을 공부해서 세상에 봉사하려 결심했었고 다음에는 신문학을 공부하여 언론기관을 통하여 이바지 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팔은 그로 하여금 복음 전하는 중요한 일을 맡게 하시려고 신학교로 인도하셨다. 19097월에 장래를 위하여 고민하고 심각히 생각하고 기도하는 중에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라는 주님의 지시를 분명히 받았다. 그는 그 이상 더 방황하고 고민하지 아니했다. 일평생을 복음을 전하고 주를 받들어 섬기는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고 신학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이 경험이야말로 루터가 법을 공부할 생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 요한 웨슬레 선생의 올러스 케잍 경험과 같은 것이었다.

 

19101월 양주삼은 테네시(Tennessee) () 내슈빌(Nashville)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힘든 고학생활이었지만 선생은 주변의 한인교회와 학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121013일 남감리교의 직제에 따라 집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3618일 마침내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B. D., 오늘날 M. Div.)한 양주삼 목사는 그 해 9월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신학대학원( Yale Divinity School)에 다시 입학하였다. 1914621일 졸업하면서 신학 석사 (S. T. M.)학위를 취득하였다. 함께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동기동창들 가운데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도 있었다.

 

물론 박사과정 진학에 대한 포부도 있었지만, 양주삼 목사는 미국 남감리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1412월 마침내 귀국길에 올라 191522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889년 고향을 떠난 지 16년 만의 일이었고, 1901년 인천을 떠난 지 14년 만의 귀국이었다. 중국과 미국의 유수한 학교에서 정식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경우는 당시 극히 드물었기에, 양주삼 목사는 큰 환영을 받았다.

 

양주삼 목사는 곧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1915616일 동대문교회(東大門敎會)에서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河鯉泳, 1865-1949) 목사의 주례로 김매륜(金邁倫, 결혼후 양매륜,1888-1980)과 결혼하였다. 특별히 같은 해 103일 양주삼 목사는 김흥순(金興順, 1860-1939), 정춘수(鄭春洙, 1875-1951) 목사 등과 함께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장로 목사안수를 받았고, 104일 부터는 1년간 서울의 자교교회(紫橋敎會) 6대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한편 191999일부터 2년간 종교교회의 6대 담임목사로도 헌신하였다. 자교교회와 종교교회는 남감리교 여선교사인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姜慕仁, 1853-1920)에 의해 1900415일 같이 세워진 이름 있는 교회였다.

 

문서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양주삼 목사는 신학교의 교장이던 하디 목사와 의논하여 월간지신학세계(神學世界)19162월부터 발행하여 가장 권위 있는 출판물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윤치호 선생이 설립한 송도고등보통학교(松島高等普通學校)의 부교장으로 초빙 받아 19169월부터 191810월까지 봉사하였다.

 

한편 양주삼 목사는 미국 감리회 선교 1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한국의 행사들을 총괄적으로 책임을 지고 진행하였다. 이 기념사업은 181845일 미국 뉴욕의 감리교에서 아프리카(Africa)로 처음 선교사를 파송한 지 100년 된 것을 기념하는 사업인데, 양주삼 목사는 191811월 이 사업진행의 총무로 선출되어 1923년까지 5년 동안 봉사하였다. 그 결과 1918년 교회 총수 238, 교인 총수 10,740명에서 19236월에는 교회 총수 487, 교인 총수 16,357명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를 위해서도 각별한 공을 들였다. 양주삼 목사는 192010월부터 시베리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고 192353일부터 193012월까지 미국 남감리회로 부터 만주, 시베리아 선교 관리자로 임명되어 헌신적인 사역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양목사는 192010, 19215, 8, 19234월 등 수차례에 걸쳐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의 불모지(不毛地)였던 이 지역이 1924년에는 교역자 20, 교회 169개소, 교인 총수 4,749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世富蘭偲 醫學專門學校)의 발전을 위해서도 선생은 큰 기여를 하였다. 이를 위해서 우선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권유로 1893년 의료선교사로 조선(朝鮮)에 도착한 뒤 고종(高宗, 1852-1919)의 전의(典醫)이자 제중원(濟衆院)의 책임자로 일하였다. 1900년 뉴욕 선교대회에서 의료선교 방법론도 제시하여 1904년에는 제중원을 혁신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세브란스 연합 의과대학병원간호학교를 세워 병원장 겸 교장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에비슨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에 이어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세브란스와 아울러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에비슨은 세브란스 의전(醫專)과 연희전문학교의 명예교장으로 두 학교의 통합에 힘썼으며, 1935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인 에비슨의 요청을 받은 양주삼 목사는 19212월부터 19425월까지 연희전문학교의 이사로 봉사하였고, 19239월부터 19435월까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이사로도 함께 헌신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양주삼 목사는 조선의 감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조선 교회 전체의 지도적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양주심은 19224, 19246, 19265, 19304, 19384월 등 5차례에 걸쳐 미국 남감리회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또한 그는 19279월부터 1년 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朝鮮基督敎聯合公議會)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1928년 봄에는 예루살렘에서 모인 세계선교대회에 백낙준(白樂濬. George Paik, 1895-1985), 신흥우(申興雨, 1889-1959),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양주삼 목사는 미국 남북감리교 선교회에 의해 남감리교와 북감리교로 나뉘어 있던 감리교회를 통합하여 하나 된 기독교조선 감리회(基督敎朝鮮監理會)의 결성을 이끌어 내었다. 양주삼은 1930924일 남감리회 조선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929일 조선 남북 감리회 합동전권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2일 미국 남북감리회에 의해 개별적으로 설립된 교단을 통합하여 128일 역사적인 기독교조선 감리회 제1대 총리사로 취임하였다. 1934108일 총리사에 재선되었고, 19381013일 임기가 만료되어 퇴직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조선은 미국 감리교에 의해 선교를 받은 입장이었지만, 그의 연합에 대한 노력은 역설적으로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1865)으로 나뉘어져 있던 미국 남북감리교가 하나로 통합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 조선에서 남북 감리교의 통합은 외국의 목사들과 선교사들에게 오히려 큰 감동을 주었고 이들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나뉘어져 있던 감리교의 통합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311월 발간된 The Korea Mission Field 에서 웰치(Herbert Welch, 越就, 1862-1969) 북감리회 감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략, 번역문)

회의 분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조선감리회를 자랑하게 해 주었고 새 교회의 굳은 통합과 장래의 번영을 예언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미국서 온 전권 위원들은 장래에 대한 감사와 큰 희망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경험을 주었으며 이 나라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데 하나님의 영이 역사했다는 것을 의심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교단의 통합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 그의 노력은 국제적으로도 큰 인정을 받았다. 193169일 미국의 버지니아(Virginia) () 애쉬랜드(Ashland)에 위치한 랜돌프 메이컨대학(Randolph-Macon College)에서 그는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6월에는 일리노이(Illinois) () 에반스톤(Evanston)에 위치한 개렛(Garret)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19326월 서울 이화고등여학교(梨花高等女學校)를 설립하여 기독교 여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총리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양주삼 목사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양주삼 목사는 재단법인 조선기독교서회(朝鮮基督敎書會) 이사(1938-1942)와 총무(1941-1942), 기독교조선 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1938-1940),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YMCA) 유지재단 이사(1940-1947), 재단법인 서울 배화고등여학교(培花高等女學校) 이사(1941-1943), 재단법인 북감리회 조선선교부 유지재단 이사(1941-1948) 등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일제(日帝)의 억압적인 종교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의 추진으로 양주삼 목사는 큰 오명(汚名)을 받게 되었다. 우선 신사참배(神社參拜) 문제로 큰 고초를 겪게 되었는데,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國民儀禮)’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강요에 순응하였다. 장로교 총회도 19389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이는 천주교를 비롯한 다수의 교단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회는 1938105일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감리교 지도자들인 양주삼 총리사를 비로ㅅ하여 총대 일동이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돌아와 회의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1940년대 일제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여 친일행사에 강제적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아픔이 있었다

.

하지만 선생의 그러한 행동들이 군국주의 일본의 광란 속에서 전국의 감리교 교회와 학교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는 면도 있었다. 또한 일제 말기 친일적 행동을 노골화한 정춘수 통리사에 의해 1941년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은 목사의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면서 강제로 기존 원로들의 은퇴목사직까지 박탈하였다. 이에 양주삼은 교회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마침내 1945815일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양주삼 목사는 194810월 결성된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의해 구금되었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주미대사(駐美大使) 장면(張勉, 1899-1966)으로부터 반민특위가 양주삼 목사를 친일행위로 구속한데 대해 미국 감리교 측의 웰치 감독으로부터 강력한 항의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 '국제적 망신' 이라면서 대통령으로서 직접 양주삼 목사에 대한 석방운동을 전개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일제 말 그의 삶은 비록 일부 비난받을 일들도 있었지만, 이를 뛰어 넘을 만큼 한국 감리교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교계의 연합사역에 있어 큰 업적을 남겼다.

 

 

해방이후 격동의 시간 속에서 양주삼 목사는 재건파(再建派)와 복흥파(復興派)로 분리된 감리교의 일치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국제연합(國際聯合) 조선협회 대표이사(1948)로 활동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총재(1949-1950)로 봉사하였다.

 

한국 감리교의 산 증인이자 교계연합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양주삼 목사는 교단 통합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71세가 되던 19506.25 동란(動亂) 속에서 납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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