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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 임영신박사

중앙대하교의 설립자 승당 임영신

최재건 | 기사입력 2021/12/06 [16:52]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 임영신박사

중앙대하교의 설립자 승당 임영신

최재건 | 입력 : 2021/12/06 [16:52]

중앙대학교의 설립자 승당 임영신 박사

 

창학정신과 교훈 | 이념 및 역사 | 대학소개 - 중앙대학교임영신(任永信, Lewis Yim, 1899-1977)18991120일 충청남도 금산군(출생 당시는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서 아버지 풍천 임씨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金敬順)의 열두 남매 중 다섯째, 딸로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구환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호는 승당(承堂)이었다. 임영신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제헌(制憲) 국회의원, 초대 상공부장관(商工部長官)으로 봉직했다. 일제 때 중앙보육학교를 세워 해방후에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로 발전시켜 교육으로 보국, 헌신적하였다.

 

임영신은 유년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동학 농민 운동과 동학 농민군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였다. 아버지 임구환이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신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외부에 집안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느 정도 사회 분위기가 개화될 때까지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임구환은 백인선교사들을 집안으로 데려왔는데, 임영신은 당시 할머니가 '괴상하게 생긴 백인 여성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백인 여성은 유창하게 조선말을 하였고 그녀의 설교를 듣고 이해가 빨랐던 그녀는 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언니 선유와 함께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심광학교(心光學校)의 최득의(崔得義) 선생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이때 그녀는 학교에 다니다가 시집을 보내겠다는 집안의 뜻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비밀리에 담을 넘어 학교에 등교했고, 키가 가장 커서 몰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911년 그가 12세가 될 무렵 그의 언니 임선유를 시집보내려했다. 학교 시절 그는 언니 임선유가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말을 듣고 언니 선유에게 굶으면서 매일 울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조언대로 언니 선유는 매일 울거나 굶어서 수척해졌고 결혼은 파혼되었다. 그 뒤 언니 선유는 최용환과 결혼했다. 그는 목사인 최학삼의 아들이었다. 신랑의 생김새를 궁금해 한 임영신은 신랑의 자매들을 찾아갔다가 그들의 수려한 외모와 달변에 매료되어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후 임영신 역시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매장이들에게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대답하였다.

 

임영신이 14세가 되던 1913년에 미국인 여선교사 골든(Golden)이 금산교회에서 집회를 인도 할 때였다, 임영신은 나라와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하길 원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고 있으니 좀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골든 선교사는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의 입학원서와 초청장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전주로 돌아간 뒤 임영신의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 비록 여자일지라도 이 시대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 더 배우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새로운 변화 있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따님은 당신의 나라를 구해내는 놀라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평범한 여자로 딸을 기르고자 하는 부모는 반대했다. 임영신은 금식 기도를 하며 부모님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였다. 금식 기도 4일 만에 아버지는 딸을 전주에 유학보내기로 결심했다. 임영신의 대담하고 계획성 있고 진취적인 성품으로 인해 부모의 반대를 이기고 진학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성격은 훗날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밑바탕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임영신은 점차 일제에 대한 항거의식과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특별히 191495일 전주(全州)로 유학을 떠나면서 더 구체화되었다. 전주의 기전여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02년에 세운 애국계몽기의 학교로 5명의 교사와 30명의 여학생이 공부했던 단촐한 학교였다. 이 시기 임영신은 교사인 박현숙(朴賢淑) 선생의 지도하에 유현정(柳賢貞), 오자현(吳慈賢), 송귀내(宋貴耐), 유채룡 등 6명과 함께 기도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교목사에게서 동국역사책을 빌려 육필로 필사하여 읽어 항일정신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시 되자 발각을 두려워하여 전주 서문 밖에 묻었다.

 

1915년 기전여고 2학년 시절 친구인 오자현 등과 함께 항일 자살특공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명칭을 자살대 (自殺隊)라고 하였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일본 국가를 부르고 일본 황제의 사진 앞에 절하게 했다. 임영신과 자살대 멤버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교내에서 그는 쓰개치마 안입기 운동도 주도했다. 조선이 멸망하고도 한국의 여성들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고 다녀야 했다. 그는 이를 인습이라 주장했다. 그는 친구 오자현 등과 함께 교장실로 가 교장인 골든에게 쓰개치마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학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연류된학생들이 퇴학당하였다. 아버지가 지역유지라서 그는 퇴학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께 쓰개치마 입기 거부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위해 1915102학기 중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학부형들이 소환되는 등의 사태를 겪은 뒤 교장 미스 골든은 아버지들과 상의하였고 아무도 퇴학당하지 않았다. 쓰개치마도 입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하였다. 임영신은 친구, 교회목사, 교사, 선교사, 교장, 아버지를 위시한 학부모들을 조리있게 부당성을 설파한 결과였다. 사실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시학관이 강요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다. 일본인이나 미국, 서양인 선교사들도 없애지 못한 풍습이었다. 마침내 1916년부터는 소녀나 처녀들이 외출 시에 쓰개치마를 입지 않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임영신은 이순길(李淳吉) 선생의 소개로 충남(忠南) 천안군(天安郡) 입장면(笠場面) 양대리(良垈里)에 있는 양대초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아서 화제가 되었다. 그가 8세 때 활동 사진을 보기 위해 몰래 홀로 하인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회초리로 맞았지만 활동 사진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발각되었다. 뒤늦게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였지만 아버지의 매질은 계속되었고 할머니가 와서 말려서 매질이 멈추었으나 1개월 간 걷지도 못하였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며 매질이 과연 학생들을 진심으로 반성 시킬 수 있는가 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고 이때부터 양대소학교에서는 이유 없이 수시로 매질 하는 악습이 사라졌다.

 

 

1918년 겨울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그는 고무되었다. 그는 전주기전여학교에 다닐 무렵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지하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경성부에 있는 한국인 지하조직 활동가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천안으로 내려와 그의 숙소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인쇄한 삐라들을 그에게 건네 주고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일으키는데 동참할 것을 부탁했다.

 

임영신은 1919227일 서울에서 내려온 비밀연락원 함태영(咸台永, 1873-1962)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받고, 이를 등사하여 32일 전주로 향하였다. 3월초 전주역에 도착하여 이동우, 김건보를 비롯한 전주, 완산, 익산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12일에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신일룡이 운영하던 완산 병원에서 계획을 추진했다. 312일 전주 남문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동료들은 그에게는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임영신은 아버지의 친구이며 전주 서문교회의 장로인 이돈수(李敦洙)의 집에서 비밀집회를 열고 독립만세 시위에 모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고 마침내 신흥학교, 기전여학교의 남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나 전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임영신은 경찰에 의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구타당한 후 전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고문을 당했고, 나체로 검문검속을 당했으며 옥문 밖에서는 이 형문을 두고 시민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임영신에 대한 결심공판은 1919626일 있었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으나, 일제 검사측은 형량이 가볍다고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 고등법원으로 사건이 넘겨졌다. 조선 국민의 여론을 두려워 한 판사들에 의해 원심이 확정되어 풀려나게 되자만 이미 6개월의 옥고를 치룬 뒤였다. 임영신은 전주 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하여 주변을 숙연하게 하였다.

 

당신네 일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소위 보안법(保安法)이나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에 의거하여 나를 심판한다는 것은 마치 강도(强盜) 사회의 율법(律法)에 의해서 선량한 주인(主人)을 강도 자신이 행하는 불법한 심판과 다름없기 때문에 나 임영신은 조선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는 일본 법관에 의한 이 재판을 거부(拒否)하고 부인(否認)하는 것입니다.

징영(懲役)을 주던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하던 그것은 당신들의 자유이로되 마음속으로부터 본 재판이 불법이요 재판할 권리를 부인(否認)하는 나로서는 이 판결에 복종할 수 없으며, 설혹 육신(肉身)은 당신네들 법이 묶여 곤욕(困辱)을 당할지 모르나 조선 사람이 제 나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불굴(不屈)한 정신은 결코 꺾지 못한다는 나의 신념과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는 바입니다.

 

재판에서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어머니는 다시는 전주에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그를 석방시키려 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부탁도 거절하고 투옥, 그해 6월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석방 직후 전주로 내려갔으나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에 다시 소환되어 집행유예 3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191911, 일본의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 입학, 1921년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선교사 친구인 메리 쉐라(Mary Shearer)를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공주 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그 해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사로도 출강하였다. 이 시기 임영신은 평소 제한되고 차별과 억압된 식민지 노예교육 상태에서 벗어나, 해외유학에서의 배움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고 당시 식민지 한국이 처해 있는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여 미국(美國)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임영신은 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강의를 하면서 선교사들을 통해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시기인 192391일 일본 관동(關東)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의 피해로 민심이 폭발하게 되자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독약을 타고 방화 및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흑색선전을 퍼트렸다. 일본 인들은 대대적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이른바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이 일어나 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6,661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임영신은 당시 유태영(柳泰永)이라는 인물로부터 학살된 수천 명의 한국 사람의 사진첩과 사건자료를 미국에 있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19231224일 부산(釜山)의 검문검색을 기적적으로 통과하여 19241월 미국에 도착한 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팔래스 호텔에서 이승만을 만나 관련 자료를 전달했는데, 이승만은 바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Washington)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잔학상을 폭로하였으며 제네바(Geneva)의 국제연맹에 직접 보고하여 진실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임영신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청과물 장사로 1만 달러를 저축한 후, 19269월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녀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면서도 청과물 장사, 주유소 경영, 불도저 운전 등을 통해 돈을 모았으며, 1930년 마침내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문학사(B. A.)학위를 받았다. 이후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9한국 불교도들의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神學)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시기 임영신은 한인교회(韓人敎會)를 세워 동포 선교에 앞장서기도 하는 한편,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나아가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대공황(1929)으로 미국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접시 딱기 하며 돈을 벌어 당시로는 거금인 3만 달러를 저축할 수 있었다. 이 자금은 고국에서 육영사업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또한 23세 연상인 이승만 박사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임영신은 고심 끝에 이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승만의 이름 중에서 ’()을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사별할 때 까지 남다른 정으로 지냈으며, 임영신은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임영신이 미국에서 귀국 길에 오른 것은 193212월이었다. 입국 후 진정한 민족 교육을 위해 배움의 터전을 만들려는 열의로 그녀는 서울 흑석동(黑石洞)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를 인수하였다. 이 토지는 이후 중앙대학교의 발전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미국에서 장사, 가정부, 막노동 등 갖은 고생을 하여 번 돈 3만 달러로 임영신은 선뜻 이 외진 산골짜기 토지 20만평을 매입했다. 당시 친지들은 그녀를 극구 말렸지만 임영신은 이 땅이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익하고 중요한 지식의 큰 요람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중앙보육학교의 교훈이자 현재 중앙대학교의 교훈이 된 다음의 말 속에 임영신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Die in Honor, Live for Truth).

 

한편 임영신은 이 시기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YWCA의 총무로 취임했다. YWCA의 총무로 취임할 당시의 모습을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의 최은희(崔恩喜, 1904-1984)는 다음과 같이 임영신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다.

 

루이스 임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가진 임영신 총무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몸으로 YWCA의 재건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독교정신으로 이 나라 여성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말했으며 앞으로 YWCA의 할 일이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19458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었다.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 되었기 때문에 불행이도 미국과 쏘련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임영신은 조선여자국민당(朝鮮女子國民黨)을 창당하였다. 여성의 권한신장과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있을 수도 없으며 여성이 국가발전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또 이러한 그의 신념은 정부수립과 동시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왕성하게 하는데 공헌했다. 당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Hodge, John Rheed, 1893-1963) 장군은 남한에서 45명의 입법의원을 선출했는데, 윤치영(尹致暎, 1898-1996), 조소앙(趙素昻, 1887-1958) 등과 입후보한 임영신 박사는 민선의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임영신 박사는 교육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194510월에는 중앙여자전문학교(中央女子專門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9월에는 중앙여자대학(中央女子大學)을 설립, 학장에 취임했다. 마침내 이들 학교를 모태로 해서 19489,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대학발전과 한국의 고등교육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468월 중순 그 바쁜 와중에 임영신 박사는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유엔(UN)총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열성적인 활동에 힘입어 19471114일 레이크석세스(Lake Success)의 유엔총회에서 한국정부 수립에 관한 미국 측 결의안이 4330으로 통과됨으로써 큰 외교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81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특명 전권대사로서 유엔에 참석, 한국 독립결의안을 통과시킨 임영신 박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치하하였다.

 

우리의 대표로 레이크석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있는 임영신 여사에게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정후원도 못한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치 추집(追執)시킨 것을 우리는 다 영구히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탄생과 동시에 임영신 박사는 초대 상공부장관에 기용되었다. 이는 당시 선진국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며, 한국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여성 장관이었다. 임영신 박사는 그에게 주어진 중책은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정신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초임상공 시정목표(初任商工施政目標)를 설명하는 1948106일의 국회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상공행정을 펴기 위하여 첫째 국민경제의 윤리화를 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둘째로 민간 자문기관의 설치 문제, 셋째 생산의 회복과 급속한 증강정책, 넷째 기초산업의 국영화와 민간 기업체의 육성, 다섯째 생산, 배급, 소비의 종합계획화, 여섯째 기구와 수속을 간소화하여 청백행정(淸白行政)을 하며, 일곱째 공업기술 향상을 위한 연구소 및 기술자 양성소의 설치 등에 관하여 중점적 시정을 펴겼다는 피력이었다. 그 후 이를 실현해 나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특히 무역정책에 있어 임영신 박사는 미군정의 행정에서 부조리의 복마전이라 불린 무역업자의 민원서류를 당일 처리해 주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했다. 당시 큰 이권사업이었던 귀속재산(歸屬財産) 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공평무사한 정책을 폈다. 그녀가 장관직을 물러난 뒤에 개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국민들 가운데 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임영신 박사는 정계는 물론 교육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여성운동에서도 다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 1953~61년 사이에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총재고문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1~74년 사이에는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 회장을 지내며 여성의 권익 향상에 온 힘을 쏟았으며, 1963~71년 사이에는 다시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1965~72년 사이에는 대한교육연합회(大韓敎育聯合會) 회장이 되어 교육계를 선도했다. 특별히 19638월에는 교육부분의 유공자로 선정되어 국가로부터 대한국민장(大韓國民章)의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9645월에는 성서공회(聖書公會)의 위원장으로도 봉직했다.

 

어디 이뿐인가. 1966년에는 세계교직자연합회장(世界敎職者聯合會長)을 그리고 1969년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再建國民運動中央會) 부회장을 지냈다.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임영신 박사는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이 되었고 대한교원공제회(大韓敎員控除會) 초대 이사장으로 초청되었으며, 1972년에는 중앙문화학원(中央文化學園) 이사장, 국민의회(國民議會) 대의원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이러한 직책들의 수행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만큼 큰 족적을 남긴 여성은 드물 것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임영신 박사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한국을 넘어 해외로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임영신 박사는 1957년에 그녀의 모교인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또한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1971년 니혼 대학(日本大學) 등으로부터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12월에는 미국 아이젠하워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7217일 아침 임영신 박사는 향년 7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을 위한 나의 투쟁 40My Forty Years Fight for Korea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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