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대학교의 설립자 고황경 박사
바롬 고황경(高凰京, 1909-2000) 박사는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대표적인 여성교육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09년 3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명우(高明宇, 1883-1950?) 박사는 1883년 3월 13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 솔내)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세브란스(Severance) 의학교를 졸업하고 외과 의사이자 교수로 봉직하였다. 어머니 김세라(金世羅, 1885-1971)는 광산(光山) 김씨 가문 출신으로 역시 송천리 태생이었다.
고황경 박사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솔내에서도 유명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따라서 고황경 은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부모님의 고향인 솔내는 1884년에 이미 서상륜(徐相崙, 1848-1926), 서경조(徐景祚, 1852-1938) 형제에 의해 기독교가 최초로 전파된 곳이었다. 평안북도 의주에 살던 그들은 만주의 우장에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어 전도하며 살았다.
이후 미국에서 온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 에비슨ㄱ 같은 장로교 선교사와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년) 감리교 선교사 등이 자주 방문하였고 자연환경도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이었다.
특히 고황경 박사의 조부 고학윤(高學崙) 조사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와 함께 부산(釜山)지역의 기독교 개척에 크게 공헌하였다. 1891년 2월 2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裵偉良, 1862-1931) 부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언더우드선교사와 함께 부산을 방문한 뒤, 그해 9월 초 부산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학윤 조사는 서씨 형제 등과 협력하여 아예 솔내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여, 윌리엄 베어드와 찰스 어어빈(Charles H. Irvin, 魚乙彬) 부부의 한국어 선생, 그리고 부산지역 최초의 순회 전도자 중 한 명으로 큰 활동을 하였다.
윌리암 베어드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Richard Baird)가 쓴 『배위량 박사의 한국선교(Willwam M. Baird of Kprea: A Profile by Richard H. Baird)』에서 고학윤 조사는 1893년 12월 사역을 전개하다가 부산지역의 포졸들에게 크게 맞는 일까지 있었다. 고학윤은 1894년 4월 30일부터 5월 12일까지 베어드, 어빈과 함께 내륙 도시들로 전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편 1893년 6월 16일 토론토대학교의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9-1956) 부부가 선교사로 부산에 도착하여 베어드 부부 집에 체류하게 되었다. 거기서 아를 더글라스를 낳고 8월에 제물포를 거처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제중원(濟衆院)장으로 병원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와 병원으로 발전시켰다. 고학윤 조사의 아들이자, 고황경 박사의 아버지인 고명우는 후일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로 근무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고명우는 부산에서 어어빈 의사에게 배우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23세가 되던 1906년, 서울에서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 교회에 다니던 김세라와 결혼하였다.
고명우 박사의 친가는 일직 개화의 물결을 타서 유명한 의사와 교육자 가문이 되었다. 고황경 박사는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는데, 언니인 고봉경(高鳳京, 1906-1950?)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로 근무하면서 동생인 고황경 박사의 여성운동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의 한국전쟁 중 아버지와 함께 납북되었다. 여동생인 고난경(高鸞京, 1919-?)은 일본(日本)의 동경여자의과전문학교(東京女子醫科專門學校)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봉사하였다. 남동생인 고원영(高元永, 1922-?)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펜실배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고황경의 외가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어머니 김세라의 숙부로 한국인 최초의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金弼淳, 1880-1919)이 있고, 어머니의 고모인 김구례(金具禮)와 남편 서병호(徐丙浩, 1885-1972), 역시 고모인 김순애(金淳愛, 1889-1950?)와 남편인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막내 고모인 김필례(金弼禮, 1891-1983) 등이 모두 쟁쟁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외에도 김함라(金涵羅, 1887-?),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 등이 어머니의 사촌으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고황경 박사는 어려서부터 세브란스 병원 안에 있는 남대문교회(南大門敎會)에 출석하면서 신앙심을 키웠다. 남대문교회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가 사역하고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세운 에비슨 원장이 사역하던 곳인데, 고황경의 아버지인 고명우 박사는 1922년 6월 19일 교회의 장로가 되어 봉사 하였다.
고명우 박사는 1912년 세브란스병원의 요청으로 황해도(黃海道)의 수안금광병원(遂安金鑛病院) 원장이 되어 현지로 부임하게 되었다. 문제는 병원 주위에 자신의 딸들이 다닐 학교가 없었다. 고명우 박사는 사비를 들여 초등학교 성격인 은진여숙(隱眞女塾)을 세웠고 딸들을 비롯한 이웃의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1918년 세브란스병원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서울로 복귀함에 따라 고황경 박사는 같은 해 서울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선생은 최우둥에 해당하는 성적을 기록하였고, 영어 과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경성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황경은 192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지사여자전문학교(同志社女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독실한 일본 기독교인인 니지마조(新島襄, 1843-1890)가 1877년, 경도(京都)에 세운 전통 있는 기독교 학교였다.
1928년 고황경은 동지사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지사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선생은 전문학교 시절에는 영어를 전공했지만,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였다. 이는 식민지의 약자로 무시당하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법률로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라고 믿는 아버지 고명우 박사는 항상 딸들에게도 “공부 잘 하고 지도력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이 극일(克日)이라고 강조하였다. 고황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업에 더욱 매진하였다.
이 시절 고황경은 기독교 여자청년회(YWCA)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와 자주 교류하였다. 또한 가난한 재일동포들을 돌보기 위해 한인교회에서 봉사하였다. 1931년 동지사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황경이 교류한 동문들 중 주요한 인물로 소설가 김말봉(金末峰, 1901-1962), 전 총리 박충훈(朴忠勳, 1919-2001),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 감리교 목사 홍병선(洪秉璇, 1888-1967), 신학자 서남동(徐南同, 1918-1984) 등을 들 수 있다.
동지사대학교를 졸업한 고황경은 1931년 32세의 나이로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The University of Michigan)로 유학을 떠났다. 수학 중에 고황경은 바버 장학금(Barbour Scholarship)을 받았다. 이 장학금은 변호사 루이스 바버(Levi Lewis Barbour)가 동양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출연한 자금으로 지원되는 것이었다. 고황경은 전공으로 경제학을 선택했는데, 노동문제와 같이 사회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분에 관심을 두었다.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황경은 미시간 대학교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사회학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장티푸스에 걸려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고황경 박사가 생존해 있던 1987년 『바롬 고황경, 그의 생애와 교육』을 저술한 임영철(林永喆, 1936-현재) 박사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거의 사투 끝에 3개월 만에 병이 나아서 퇴원하였지만 약해진 몸이라 계속하여 다른 병이 침입하여 상당한 기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길지 아니한 기간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투병생활을 통하여 건강에 대한 재인식과 경각심이 생겨서 뒤에 그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서서 이를 극복해 본 사람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같은 것이 사라졌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서 고박사 자신을 들어 쓰시고자 하여 연단하시고 살리신 것이라 생각하니 감사와 기쁨이 넘쳐 나왔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던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병마와 싸우는 악전고투(惡戰苦鬪) 속에서 고황경은 1935년 학위논문의 작성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고, 마침내 1937년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소녀 범죄의 계절적 분포」(Seasonal Distribution of Girl Delinguents in Detroit)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고황경이 한국 여성으로 박사학위(Ph. D.)를 취득한 것은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Ed. D.)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그러나 1년 만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한 김활란 선생의 경우와는 달리 2년 반이 넘는 박사과정의 혹독함을 고려하면 고황경 선생의 학위 취득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 대학 박사학위 취득이 전반적으로 1900년대 초와 후반기에 요건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과 미국은 또 대학교별로도 차이가 크고, 같은 대학도 과별로도 과정 요구 조건이 다르다는 사실, 학위에 따라 입학 요건이 다르다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고황경 박사는 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의 교수가 되었다. 선생이 가장 먼저 관심을 쏟은 부분은 농촌계몽 운동이었다. 다행히 언니 고봉경 역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였기에 두 사람의 급여로 운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당시로는 서울 외곽의 가난한 마을인 동교동(東橋洞) 일대를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였고, 1937년 7월 21일 이를 담당할 공식기구인 경성자매원(京城姉妹院)을 설립하였다. 두 자매 교수들의 봉사활동은 큰 화제가 되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1937년 10월 29일 「경성자매원의 사업」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쓰기까지 하였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그런데 이미 재작일 본보에 보도된 바와 같이 고황경, 고봉경 두 자매가 동심협력하여 경성자매원이라는 것을 설립하고 금년 7월 21일부터 그 사업을 개시하였다는데 이것은 전연 세궁민(細窮民)의 부녀자를 위한 것으로서 그 부문을 영아, 소녀, 자매학원, 경노, 시료, 인사상담, 방문간호, 임신상의의 7부로 나누어 가지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구분하여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그 각부의 명칭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무산부녀자(無産婦女子)의 교양에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맟니 차등(此等)의 사회사업에 착안하여, 헌신적 노력을 하고 있는 고씨 두 자매의 열성에 대하여는 장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과 여러 의사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경성자매원의 사역은 날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고황경 박사가 귀국한 1937년 일제(日帝)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고, 군국주의에 입각한 식민지 통치는 갈수록 더 심해졌다. 특별히 조선의 민족말살정치를 시행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고 1941년에는 일체의 조선어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하였다. 이는 고황경 박사의 사역에 큰 상처를 주었다.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일본어로만 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경성자매원의 사역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봉사 활동을 위한 고황경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일제의 방해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 봉사활동을 물색하던 고황경 박사는 1943년 봄에 경성자매원 가정료(家庭療)를 설립하였다. 은행의 융자를 얻어 서울 공덕동(孔德洞)의 집 2채를 빌려 개설했다. 고황경은 소녀심판소가 개정될 때마다 참석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여자아이 중 보호자가 없는 19세 미만의 소녀들을 인수받아 수용했다. 이들 중 다수는 절도범이었고 대부분 성병에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고황경 박사의 전공을 바탕으로 사회에 헌신한 것이었다.
고황경 박사는 일본식 성명 강요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여 끝까지 고유의 성과 이름을 유지하였다. 다만 선생은 광기(狂氣)의 시대에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유지와 봉사활동의 지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김활란 박사 등과 함께 일제가 요구하는 강연회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두고 단순히 ‘친일(親日)’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남한 지역의 교육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고황경 박사는 같은 해 9월 모교라 할 수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이어받은 경기여자중학교(京畿女子中學校)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선생과 같은 큰 인재가 아무리 모교라 해도 한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는 것을 주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고황경 박사는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 위원(중등교육 분과위원회)으로 위촉되었다. 심의회에서는 백락준과 더불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을 도출했고, 6-3-3-4제의 교육연한을 정하였다.
교육심의위원회에서는 1945년 하순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9월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의 재정이었다. 이에 1946년 3월 미국 교육사절단의 일원으로 고황경 박사는 참여하였고, 4억 2천 5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지원을 이끌어 내는 데 일조하였다. 한편 이 시기 고황경 박사는 신탁통치(信託統治) 결사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황경의 귀국 후 1946년 9월 14일 미군정청 법률 제107호에 의해 보건후생부(保健厚生部)에 부녀국이 설치되었다. 고황경 박사는 초대 국장으로 지명되었다. 고황경은 부녀 보호와 여권신장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광복 후의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상당수의 여성들이 매춘 등에 종사하고 있어 큰 사회문제가 되었는데, 그 단초는 1916년 3월 일제에 의해 시행된 유곽업창기취제규정(遊廓業娼妓取緹規定)에 입각한 공창(公娼)제도였다. 고황경 박사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1947년 10월 28일 공창 폐지령이 제정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인정되어 1947년 3월 23일 인도(印度)의 뉴델리(New Delhi)에서 열린 범 아세아 대 회의(凡亞細亞大會)에 당시 연희대학교 총장인 백낙준 박사(白樂濬. George Paik, 1895-1985), 서울신
1950년 6월 25일 북한(北韓)에 의해 6·25 동란이 발생하였다. 이해 6월 초 이미 고황경 박사는 유럽여행 중이었는데, 아버지와 언니 등이 납북되는 아픔 속에서도 나라의 위기 타개를 위해 봉사하였다. 즉 영국의 UN 협회에서 영국군대의 한국 파병을 위한 강사로 초청되었던 것이다. 고황경 박사는 1950년 9월 1일부터 1956년 봄까지 영국 전역을 돌며 한국에 대해 800회 이상의 강연을 계속하였다.
1957년 가을 고황경 박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던 고국에 돌아와서 다시 여성운동을 전개하기로 작심하였다. 1958년 3월 17일 경기여자고등학교(京畿女子高等學校) 강당에서 각계의 여성 1,500여명이 모여 “강력한 국가는 깨달은 어머니로부터”라는 슬로건을 걸고 “대한어머니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회장 격인 수석 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고황경 박사는 세계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교양강좌, 모자보건사업, 자녀지도 사업, 모권운동, 가정경제 활성화, 향토방위 협조, 가정료의 운영, 국제친선 등을 위해 헌신하였다.
고황경 박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서울여자대학교의 창립과 발전이었다. 이미 1923년 9월 8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에서 여자대학설립에 대한 청원이 있었으며, 1926년 제15회 총회에서 전필순(全弼淳, 1897-1977),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 등에 의해 설립계획까지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이후 장로교 여자대학교의 설립이 계속 추진되었지만, 일제 치하에는 총독부의 허가가 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 건국, 한국전쟁 등으로 지연되었었다.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계의 노력으로 1956년 2월 6일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1958년 4월 전필순 목사가 재단법인 정의학원(貞義學園)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창립 이사회에서는 새로 설립된 ‘서울여자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고황경 박사를 선임하였다. 고황경 박사는 미국 등에서 새 여자대학후원금을 모금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널리 인정받은 지도력을 바탕으로 1960년 12월 12일 ‘문교 제255호’로 설립 인가를 받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고황경 박사는 1961년 4월 15일 초대 학장으로 정식 부임하였다. 그가 주도해 작성하여 문교부에 제출한 교육이념은 다음과 같다.
민주국가 건설 초기에 강력한 도의 정신과 기술을 구비한 지도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에 비추어, 재래의 대량 생산적이며 지적편중인 대학교육을 지양하고, 지적교육과 아울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도의 실천교육과 기술교육을 선발 받은 극소수에게 균형 있게 실시함으로써 출세주의, 성공주의, 간판주의를 떠나 동족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수준 이하의 사회와 퇴폐 된 농촌의 개척자 선봉자로서 봉사할 수 있는 지, 덕, 술이 겸비된 여성 지도자를 양성함에 있음.
이후 고황경 박사는 한국을 대표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즉, 1960년 홍콩(香港)에서 열린 제15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1963년 뉴욕(New York)에서 열린 제18차 유엔총회에 한국의 민간 대표로 파견되었다. 또한 총장으로서도 적극적인 교류에 나서서 1966년 세계 기독교대학 총, 학장 회의에 참석하였고, 1978년 4월(일본)과 또 7월(미국) 그리고 1981년 6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아세아 기독교여자대학 총, 학장 협의회에 참석하였다.
고황경 박사는 소녀교육, 한국의 국제적 홍보,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대한소녀단(大韓少女團, Girl Scouts)의 회장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 봉사하였고, 국제연합 한국협회의 이사와 부회장으로 1963년부터 봉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1965년에서 1969년까지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조직위원으로 일하였고, 1983년 이후에는 “순국열사 김마리아선생 기념 사업회”의 회장으로 근무하였다.
1984년 12월 3일 고황경 박사는 75세의 나이로 학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학장이 되었다. 은퇴 이후에도 선생은 학교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88년 10월 10일 학교는 종합대학교인 서울여자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서울여자대학교를 향한 끝없는 그의 헌신에 대해 학교는 1998년 5월 20일 바 롬 교육센터를 지어 기념하였다. 말년에는 서울여자대학교 명예총장으로도 활동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한국의 여성운동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바롬 고황경 박사는 2000년 11월 2일 9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3년 2월 26일 서울여자대학교에서는 바롬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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