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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중흥의 교육자 김옥길

세계 최대 여자 대학교 총장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1/04 [01:56]

이화여대 중흥의 교육자 김옥길

세계 최대 여자 대학교 총장

최재건 | 입력 : 2022/01/04 [01:56]

한국 여성교육의 새 장을 연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 이화소개 | 총장실 | 역대총장김옥길(金玉吉, 1921-1990)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첫 여성 문교부(文敎部) 장관이었다. 김활란 박사의 후임으로 이화여대의 발전과 한국 여성교육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었다. 김옥길은 아버지 김병두(金炳斗)와 어머니 방신근(方信根) 사이 23녀 중 장녀로 1921년 음력 310일 평안남도(平安南道) 맹산군(孟山郡) 원남면(元南面) 향평리(香坪里) 110번지에서 태어났다.

 

첫 남동생인 김도길(金道吉, 1923-1945)은 광복 직전인 19456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日本)에 의해 군인으로 끌려간 뒤, 그해 여름 소만(蘇滿) 국경의 흑룡강(黑龍江) 부근에서 사망하였다. 두 번째 남동생이 연세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와 부총장을 지내고 2022년 초 현재 명예교수로 있는 김동길(金東吉, 1928-현재) 박사이다.

 

김옥길의 가정은 집에서 부리는 일꾼이 30명이 넘을 정도로 부유했다. 어릴 적에 그는 벼다른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면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한 분으로 평양(平壤)의 숭현학교(崇賢學校)를 다닌 적도 있을 정도로 개화된 여성이었다. 김옥길은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아 어릴 적부터 교회의 주일학교에 참석했는데, 두꺼운 성경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7세가 되던 1928년 경 남창초등학교(南倉初等學校)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김옥길이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1932년 경 가정에 큰 불행이 닥쳤다. 선비 체질인 아버지가 광산(鑛山)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가세를 회복하기 위해 만주와 중국 등을 떠돌게 되었다. 가세는 기울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어머니는 결국 일자리를 찾아 1933년 평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14번이나 이사를 하며 월세와 전세를 전전했지만 삯바느질을 하는 가운데에도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찬송가를 즐겨 부를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 굳게서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김옥길과 가족들은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를 다니면서 신앙으로 가난을 극복하였다. 진학의 길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일을 돕던 선생에게 진학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평양의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에 딸을 보내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그의 어머니는 힘든 가운데에도 돈을 모았다. 1936년 경 김옥길에게 명문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에 진학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숭의여학교는 19031031일 평양에서 설립되었다. 1930년대 초부터 조선 총독부는 일선 동화 정책을 내세워 한국인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부터 시행토록했다. 북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경영하던 학교들은 폐쇄키로했다. 이에 따라 숭의여학교는 1938331일 자진 폐교하였다.

 

학교생활을 즐겨하던 김옥길은 숭의여학교의 자진 폐교로 인해 부득이하게 인근의 공립학교인 서문고녀(西門高女)3학년으로 진학하였다. 숭의여학교 폐교 당시 김옥길의 절망과 또 이를 통해 성숙하게 된 것에 대해 2000년 발간된 김옥길 평전, 자유와 날개에서 저자인 언론인 이세기(李世基, 1940-현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폐교식을 하던 날, 운동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얼싸안고 울었다. 가슴 가득히 타오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온몸을 전율하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허약할 수 있느냐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운 것은 옥길이었다. 숭의여학교의 한국인 교사들은 일본인들이 금지한 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쳤고 옥길은 우리나라가 독립국가임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또 학교에서는 사람에겐 각자 인격이 있음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자신의 안위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도 배웠다.

 

김옥길은 서문고녀 졸업반 때인 1939년 경 심훈(沈熏, 1901-1936)이 쓴 유명한 소설 상록수(常綠樹)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에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蔡永信)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崔容信, 1909-1935)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하기에는 아직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고려하게 되었다.

 

김옥길은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이화에서 평생의 스승으로 자리 잡은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김활란 박사는 19394월부터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 () 교장의 추천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7대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김옥길 선생의 사후 유고집으로 1994년 발간된 열린 대문과 냉면 한 그릇에 실린 영원한 난()의 향기라는 글(1975. 2 <샘터>)에서 선생은 김활란 박사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이 세상에 대어나 누리는 복이 여러 가지 있을 터이나 그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복은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섬기는 일이라고 믿는다. 스승은 우리 삶의 길잡이시므로, 훌륭한 스승을 따른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손을 붙잡고 인생의 가시밭길을 헤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학생시절을 포함하면 내가 이화 동산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온 세월은 30년이나 된다. 지난 210일로 돌아가신 지 만6년이 되었지만, 가신 뒤에도 선생님은 줄곧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시고 나를 지켜주고 이끌어주신다.

선생님에 대한 생각 만은 하루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를 낳아주시고 내 육신을 키워주신 것은 아버님, 어머님의 사랑이지만, 나에게 옳은 정신을 넣어주시고 나를 사람 되게 하신 것은 김활란 선생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훌륭한 스승을 모시는 일이 가장 복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옥길이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한 1940년대의 일제 통치기는 선생을 비롯해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김활란 박사 등 교수진 모두에게 고통의 세월이었다. 일제(日帝)는 국제적으로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킨데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도발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민족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체의 한국어, 한국사 교육을 금지시키고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다. 이어 선교사 강제 추방령으로 194011월 아펜젤러 교장을 비롯해 선교사 11명이 강제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는데, 더 큰 문제는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이 미국의 적국이 되어 지원을 끊어 학교의 존립자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비온 뒤 더욱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제국주의 일본의 군대에 의한 강압과 폭거로 점철된 광란의 시대에 김옥길 선생은 기도를 통해 더욱 신앙심을 길렀고 스승 김활란 박사와 더욱 돈독한 사제지간을 형성할 수 있었다. 김활란 박사의 고생을 보다 못한 졸업생들이 학교 운영을 그만두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이세기 선생은 앞에 언급한 자신의 책에서 전하고 있다.

 

너희들 구약성경을 읽었지? 이적은 구약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세가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오기까지는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장구한 세월을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풀려날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못했던 것을 40년이 지난 후에 풀어주시고 자유를 주시었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너희들은 가서 성경을 읽고 이화를 위해 기도해 다오.”

 

한편 김옥길이 이화여자전문학교 2학년이 되어 공부하던 1941년 겨울, 일본경찰에 의해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獄苦)를 겪었다. 조국과 독립을 뜻하는 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옥길은 어려운 경제형편 속에서 여러 가지 부업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1942년 제4차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으로 예정보다 6개월 빠른 1943925일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김옥길이 대학시절에서 자아발견 후 얻은 것은 섬기고 봉사해야 할 이웃과 사랑하고 지켜야할 나라와 민족이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졸업 후 김옥길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려고 하였다. 농촌의 궁핍과 무지를 타개코저 함이었다. 김활란 박사는 이때 김옥길에게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도록하였다.

 

사감이 된 김옥길은 4백여 명이나 되는 사생들의 이름과 소속을 정확하게 암기하고 호명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일람첩기(一覽輒記)’명견만리(明見萬里)’였던 것이다. 학생 한명 한명에 대한 김옥길의 이런 자상한 배려는 은사였던 이정애(李貞愛, 1901-1954) 선생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1945815일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만 김옥길의 가족이 살던 평양에는 소련의 군정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다행히 김옥길의 가족은 월남하였다. 김옥길은 이화여전 에서 사감이자 기독교문학을 강의하는 모교의 교수로 봉직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이화여전은 대학령에 의해 1946815일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로 출범하게 되었다. 김옥길 선생은 28세가 되던 1949년 김활란 박사의 추천과 장학금으로 오하이오(Ohio) ()의 웨슬리언대학교(Wesleyan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김활란 박사가 1923년 웰치(Welch, H.) 선교사의 추천으로 웨슬리언대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는데, 아끼던 제자 김옥길 선생에게 자신이 걸었던 길을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6.25 동란(動亂)으로 김옥길 선생은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1952년 피난지 부산(釜山) 캠퍼스로 돌아왔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못가 안달하던 시절 안락한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옥길 선생은 전란으로 고통 받는 조국과 학교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1953727일 전쟁은 끝났고 김옥길 선생은 서울의 신촌(新村)으로 돌아와 대학본부 학무과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학생 때 부터 농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 김옥길 선생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제자를 지극히 아끼는 김활란 박사의 생각은 달라서 김옥길 선생이 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오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6세가 되던 19579월부터 미국의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 대학원에서 수학(修學)하게 되었고 교육행정을 공부한 뒤 19586월 귀국하였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기독교학과 과장, 학무과장, 학무처 차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한 선생은 1961년 김활란 박사의 요구로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김옥길 선생은 농촌봉사를 염두에 두었기에 스승의 요구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얼마 뒤 자신의 인생을 스승이 요구하는 삶을 따르기로 결단하였다.

 

하지만 세상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일까. 1961년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장군에 의해 5.16 정변이 일어나게 되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모든 부분이 바뀌게 되었다. 특별히 그해 가을 혁명정부에 의해 교수정년을 60세로 제한하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발표되었고, 이에 당시 62세이던 김활란 총장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김활란 총장은 자신의 후임총장 임명에 깊이 고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후임총장으로 제자 김옥길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나이 불과 40세 되던 때의 일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김활란 박사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장이 된 시기도 자신이 40세가 되던 해인 1939년이었던 것이다.

 

김옥길 선생은 극구 사양했지만 이사회에서는 전원일치로 김옥길 학무처 차장을 신임총장으로 가결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 결과 1961930일 김옥길 선생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제8대 총장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날 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총장 취임사에서 김옥길 선생은 이화여자대학교의 특별한 사명을 기독교적 인생관이 투철한, 정직하고 용기 있는 여성 지도자를 길러낸다라고 제시했고, “나는 이화를 위하여, 이화는 한국을 위하여, 한국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똑바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선생은 19799158세의 나이로 퇴임할 때까지 총장으로 봉사하였는데, 이 기간 이화여자대학교는 세계굴지의 여자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학교의 발전을 위해 김옥길 선생은 우선적으로 교수진 개편을 서둘렀다. 교수진이 이화 출신의 여교수 일색이라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김옥길 선생은 총장으로서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을 교수로 초빙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퇴임 시에는 328명의 교수 중 127명이 남자였고 절반 이상이 타 대학 출신으로 구성될 수 있었으며, 재임기간 중 30명 이상의 외국인 교수들을 초청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1952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첫 여성변호사인 이태영(李兌榮, 1914-1998) 교수(법정대학), 김은우(金恩雨) 교수(사범대), 대표적인 민중신학자인 현영학(玄永學, 1921-2004) 교수(기독교 사회윤리), 서광선(徐洸善, 1931-현재) 교수(기독교학과), 1990년 초대 문화부(文化部) 장관을 지낸 이어령(李御寧, 1934-현재) 교수(문과대), 분석철학자로서 한국 철학계를 주도해 온 소홍렬(1937-현재) 교수(철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에서 국악연구를 해 온 황병기(黃秉冀, 1936-현재) 교수(국악과)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선생이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격동(激動)의 시대였다. 사회 각 부분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 역시 커서 많은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였고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옥길 선생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안전한 시위를 이끌기 위해 헌신하였다. 특별히 197210월 유신(維新)의 선포로 학생들이 교문을 나가 시위하려고 할 때에는 총장으로서 정문을 막고 나가려거든 먼저 나를 밝고 나가라고 소리쳐서 장안에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세 번의 총장을 연임하고 1979년 물러날 때에도 김옥길 선생은 주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여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당시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여러 정치인들에 비해 사심이 없는 선생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김옥길 선생은 전임총장인 김활란 박사가 자신을 키워왔듯이 후임총장을 양육해 왔는데, 그가 바로 정의숙 박사(鄭義淑, 1930-현재)였다.

 

총장에서 은퇴한 후 김옥길 선생은 충청복도(忠淸北道) 연풍면(延豊面) 원풍리(院豊里)에서 거주하며 농촌생활을 하게 되었다. 4,650평에 달하는 토지와 건물은 동생 김동길 박사가 자신이 발간한 책의 인세로 매입하고 건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를 향한 선생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1981년 회갑잔치 때 부지와 건물을 학교에 기증하였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주변 땅 9만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학생수련관을 지어 학생과 지역주민들에 의해 현재에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 김옥길 선생은 왕성한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기독교학교 연합회 이사장(1964), 한국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1965-1979),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이사(1966-1979), 다락방전도협회 회장 및 재단법인 기독교방송 이사(1970-1980) 등을 지냈다. 기독교복음화운동본부 부회장(1970), 사회복지법인 한국 어린이 재단 이사(1972-1983), 재단법인 산학협동재단 이사(1974-1982),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1976-1979), 민족문화추진회 이사(1978-1979)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김옥길 선생은 1979년 최초로 여성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어 학원자율화와 교복자율화를 추진하였고, 국제연합한국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또한 이화여대 명예총장 및 이사장(1979-1990), 재단법인 김활란장학회 이사장(1987-1990),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1988-1990) 등을 역임했다.

 

김옥길 선생의 활동에 대해 각계에서 많은 포상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1970)과 인촌문화상(仁村文化賞, 1982)을 받았고, 필리핀(Philippines)에서 마리아 클라라상(Maria Clara Award, 1976)과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공로상(1983)을 받았다. 역서로 예수의 생애와 교훈등이 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19892월 김옥길 선생은 직장암 수술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달 뒤 목동 이대병원의 기금 모금을 위해 뉴욕(New York)에 가기까지 하였다. 1990825일 새벽 3, 1947년부터 동생 김동길 박사와 살았고 1979년에 떠났던 서울시 서대문구(西大門區) 대신동(大新洞)의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 형제는 독신으로 살았다.

 

연세대학교 동문 밖에 있는 이 집은 현재 김동길 박사에 의해 김옥길기념관(金玉吉記念館)’으로 단장되어 공개되고 있는데,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한데 건축가 김인철(金仁喆, 1947-현재) 중앙대학교 교수가 지은 것으로 1999년 건축의 해를 맞아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한 건물이다.

 

김옥길 선생은 이화의 주요 인사들이 갈 수 있는 금란동산에 묻히지 않고 부모가 안장된 경기도(京畿道) 시흥(始興)의 가족묘지에 묻히기를 원했다. 저마다 금란동산에 가기에는 그 곳이 넘친다고 생각했으니, 이화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마지막까지 지극하였다.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 적십자인도상 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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