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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 박사

이한국여성운동의 주역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2/23 [06:16]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 박사

이한국여성운동의 주역

최재건 | 입력 : 2022/02/23 [06:16]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 박사

 

 김활란(金活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총장이었다. 매리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施蘭敦, 1832-1909) 대부인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이화학당을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여성운동가로 교육자요 기독교복음전도자였다. 여자들은 안방에만 살고 이름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근대 신여성의 대표적 인사였다. 세례명이자 영문명은 Hellen Kim, 호는 우월(又月)이었다. 그는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227일 제물포(濟物浦)배다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연(金鎭淵)과 어머니 박또라(朴萄羅, 1963-1953) 사이에서 26녀의 8남매 중 7째였다. 태어난 1899년은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3년으로 기해년(己亥年)이었기에 어릴적 이름은 기해년에 얻었다는 의미로 기득(己得)’이었다.

 

김활란이 7살 되던 1906, 그의 가족은 내한한 최초의 선교사 중 한명인을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배재학당 설립자)가 세운 제물포 내리교회(內里敎會, 최초의 미국이민을 시작한교회)에서 온 헬렌 전도부인에게서 기독교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무속신앙인이던 어머니의 개종 결단에 의해 내리교회에서 가족전체가 세례를 받았다. 김활란의 어머니는 헬렌 전도부인의 이름을 따라 세례명으로 헬렌을 원했고 자신의 막내딸인 김활란에게 또라라는 세례명을 희망했지만 목사님의 실수로 그 반대가 되었다. 즉 김활란 박사가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 활란은 세례명을 한문(漢文)으로 표현한 것이며, 어머니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로 정해진 것이다.

 

세례를 받고 김활란은 곧 인천 최초의 여학교인 영화소학교(永化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하게되자 1907년 봄 서울로 가족이 이사하면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이화학당에 먼저 입학한 언니들이 김활란의 학업을 후원하기 위해 공부를 그만두기도했다. 심지어 매우 좋아하던 애란(신득)언니는 당상관(堂上官)이란 고관 출신으로 세 번째로 결혼하는 나이 많은 감달하(金達河)와 열여덟의 나이로 결혼했다.

 

김활란은 1913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강권을 물리치고 대학예비과정에 들어갔다. 이 시기에 그녀는 중생을 경험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이에 대해 김활란의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드는 순간, 나는 희미한 광선을 의식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예수의 모습에서 원광이 번져 내 가슴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사방은 어두웠고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득히 먼 곳에서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처절한 부르짖음은 아득히 먼 것도 같았고 바로 귀 밑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울부짖고 호소해 오는 처절한 울음소리. 그 소리를 헤치고 문득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가 들리느냐?”

, 들립니다.”

저것은 한국 여성의 아우성이다. 어째서 네가 저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 건져야 한다. 그것만이 너의 일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두 손을 모아 쥔 나는 어느 틈에 흐느껴 울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꿇어 엎드린 채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에게 뚜렷한 목표를 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러한 경험 후에 고집과 교만과 일본에 대한 증오까지도 죄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강렬한 증오가 애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의 죄까지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빛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기쁜 마음으로 믿었다.

 

프라이(Lulu E. Frey, 富羅伊) 선생의 인도하에 1914년 봄 정동제일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생 졸업식이 열렸다. 이에 감명받은 김활란은 1916년에 입학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학교에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마침내 김활란은 18세가 되던 1917년 이화학당의 창립기념일인 531, ‘오월의 여왕(May Queen)'에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인 19183185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활란은 졸업 후 바로 이화학당의 선생으로 임용되었다. 열심히 근무하며 틈틈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 3.1의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함께 이화학당에 재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해 온 박인덕(朴仁德, 1896-1980)과 신줄리아(申俊勵) 등이 투옥되자 김활란은 선교사들의 요청에 따라 피신하였다. 이 시기 홀로 체포를 모면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병고까지 겪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19206월 여름방학을 맞아 김활란은 ‘7인 전도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는 홍에스터(洪愛施德), 김함나(金含羅), 윤성덕(尹聖德), 김폴린(金保羅), 김애은(金愛恩), 김신도(金信徒) 등 여섯 명과 선생이 참여하였다. 농촌을 돌며 계몽운동과 기독교를 전파하고 인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는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전국을 순회하였지만 강연 내용이 반일적이라고 한 달 만에 중단되었다.

 

참 신앙과 학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타 올랐다. 그가 23세가 되던 19225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합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 망명해 있던 애란언니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연세 많은 형부 김달하는 김활란에게 또 하나의 달이라는 뜻으로 우월(又月)’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는 김활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처제는 왜소하고 연약해 보여도 성격이 곧고 일그러진 데가 없어. 인간됨에 휘인 데가 조금도 없거든. 아암, 빛이 되어야지, 만인의 빛이 되어야지. 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밝혀 줄 빛이 되어야지. 충분히 되고말고. 그 빛은 침착하고 조용한 속에서 빛날 거야. 하늘에도 밝은 달이 있는데 이 당에 또 하나 달이 있으니 그 이가 김활란이요. 그러니 또 하나의 달이라, 우월.”

 

한편 김활란 박사는 귀국 후 당시 북경에 동행하였던 김필례(金弼禮, 1891~1983)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연연합회(YWCA)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김필례는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조직의 필요성을 설득했으며, 김활란은 감리교 지도자들에게 이를 역설하였던 것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마침내 한국 여성 단체의 첫 출발이라고 할 조선 YWCA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어 김활란은 조선YWCA1924년 세계대회에 가입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남존여비의 인습 때문에 언제나 뒷전에 머물러 있었지만, 여성단체인 조선 YWCA가 국내에서는 먼저 창설된 남성단체인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보다 세계대회에 먼저 가입함으로써 그 역량을 과시하였다.

 

또한 19227월 김활란은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의 후원과 학교의 지원에 힘입어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이 시기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미국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웰치(Welch, H.) 감독의 추천으로 오하이오(Ohio) ()의 웨슬리언대학교(Wesleyan University)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김활란은 1923년 가을 세계여자해외선교단의 간부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화학당의 신축부지 매입을 위한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일단 보류되는 아쉬움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놀라웠다. 바로 그 시간, 서울의 신촌(新村)에서는 이화학당을 방문한 미국인 그레이 부인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 교장에게 신촌 대지 구입비 전액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김활란은 19246월 웨슬리안대학의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해 10월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25종교와 철학의 관계성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2년이 소요되는 박사과정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이화학당의 간절한 요청을 받고 그해 7월 귀국길에 올랐다. 물론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안창호(安昌浩, 1878-1938) 같은 애국지사들이 미국에서 함께 동역하자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활란은 한국의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여러 명사(名士)들로부터 이어지는 구혼도 거절하였다.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Hawaii)에서 열린 1차 태평양문제 연구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는 아펜젤러 교장의 지시로 영어와 채플 등 종교부분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는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 여성의 발언을 발표하기 위하여 여성이여 어서 앞으로 나가자!’라는 구호를 내세운 잡지 여론을 처음으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1926426,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1874-1926)이 승하(昇遐)하자 이화학당 학감으로 있으면서 이화의 전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해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望哭)을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미 한국에서 국제통으로 이름 난 된 김활란 박사는 19272월 하와이에서 다시 열린 2차 태평양문제 연구회의에 참석하여 한민족 고유의 정체성에 대해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75월에는 근우회를 유각경, 최은희(최초의 여기자), 황신덕, 주세죽(최초의(?)피아니스트, 박헌영의 첫 부인)등과 창립하고 회자으로서 일했다. 19281월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극동기독교지도자회의에 참여하고 4월에는 예루살렘에서 모인 농촌문제를 주제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신흥우(申興雨, 1889-1959), 홍병선 목사와 함께 참여하였다. 김활란은 이 때 당시의 인습적 제약과 구속을 타파하기 위하여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짧게 잘라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활란에게 이 시기 행복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811월 그렇게 좋아하던 애란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애란언니는 남편이 북경에서 사망한 이후 한국에 돌아와 힘겹게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어서 두 달 뒤 19291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와 애란언니의 두 딸들과 남자 조카 한 명까지 모두 4명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당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강의하던 백낙준 박사의 영향과 이화학당의 아펜젤러 교장의 지원을 받아 김활란 박사는 1930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Columbia Teacher's College)에 입학하게 되며, 193110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 이라는 논문으로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일제의 지배하에 있는 한국인의 참된 자주성 확립과 자각은 경제생활 속에서 정신적으로 각성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귀국 후 김활란에게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사회는 학감을 겸하여 부교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하도록 요청하였다.

 

김활란 박사는 1931<정말인의 경제 부흥론,>이란 책을 저술하여 덴막의 농촌이 경제적으로 부흥한 것을 소개했다. 그는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특히 축산을 통한 부업과 식생활에서의 영양섭취의 장려, 문맹퇴치 등에 중점을 두었다. 농한기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각 지방에서 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심훈(沈熏, 1901-1936)이 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최용신(崔容信, 1909-1935)으로 하여금 수원(水原) 샘골에 농촌아동 교육시설을 갖추게 하였으며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한 노력으로 김활란 박사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을 기점으로 내선일체라는 미명아래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 정책이 펼쳐지고 있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여 교회와 기독교 학교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으며, 선교사들을 억압하여 다수의 인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제출국을 당하였다. 심지어 1937년 이후 일제에 의해 당시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구속된 이른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과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이 일어나기가지 하였다.

 

김활란 박사는 이러한 시기, 19394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7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비록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은 시기였지만, 1886531일 메리 스크랜튼대부인에 의해 개교한 이후 53년 만의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교장은 김활란 박사에 대해 후임 교장으로 다음과 같이 추천하였다.

 

이화의 살림을 이렇게 적당한 시기에 물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이화를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이화를 이끌고 나가는 데에 믿음직한 김활란 박사를 추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 줍니다. 흔연하게 그리고 안심하면서 이 일을 김박사에게 넘깁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이곳에 남아 이화를 사랑하고 도우면서 여생을 보낼 작정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 19401116일 미국 총영사의 지시로 선교사들은 모두 귀국하게 되었고, 교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김활란 박사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중한 지시가 일제로부터 내려졌다. 전시 상황에서 국내 어느 곳에서도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기에 선교부와의 단절은 학교 존립의 문제를 가져올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탄압은 더 심해졌고 재정적 어려움은 더 악화되었다. 1940년대 세계적 대 경제 공황 이후 대전쟁 시기에 한 여자교장으로서 여자학교를 지킨다는 것은 상상이상의 고통이었다. 심지어 일본군대까지 학교에 상주하는 일까지 일어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김활란 박사와 함께 이화학당을 지킨 김애마(金愛麻, 1903-1996)선생은 불굴의 의지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를 증언하였다.

 

해방을 몇 달 앞두고 당시 총독부 학무국장이 일본인 교장을 새로 임명했다며 학교로 쳐들어왔다. 우리는 그 새 교장에게 보고를 해야만 했다. 헬렌(김활란) 선생님은 서툰 일본말로 보고를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이 부당하게 겪는 수모를 눈물을 삼키며 듣고 있어야 했다. 후세 사람들은 선생님의 창씨개명이나 친일 발언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이 그 때 당하기만 한 우리의 처지를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그런 소리는 차마 못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본관 지붕 밑에 새겨진 십자가를 쪼아 없애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수모와 굴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마저 던져 버리고 끝까지 지킨 이화, 일제의 강압적인 횡포에 결국 폐교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기독교 학교나 사립학교의 쓰라린 역사에 우리는 깊은 동정을 아끼지 않지만 김활란 선생님의 깊은 신앙과 굳은 의지력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5815일 광복이 되자 김활란 박사는 교육정책 수립을 위해 구성된 교육심의회의 위원으로 교육이념분과에 참여하였고, 그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는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의 이념 확립에 공헌하였다. 또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발전적인 재건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였고 YWCA를 재건하고, 한국여학사회(韓國女學士會)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로 1946815일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가 출범되었고 김활란 여사는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해방 이후 남북의 대립 속에서 김활란 박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의 외교통으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1946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國際聯合)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토로하였으며, 국민의 절대다수가 공산주의를 결사반대한다고 호소하였다. 또한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6.25동란(動亂) 속에서도 전시내각의 공보처장을 지냈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코리아타임스 The Korea Times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여 한국홍보외교활동을 하였다. 이 밖에도 국민홍보외교동맹을 조직하여 참전국과의 민간외교 및 외국 참전용사들의 위문 등 전시국가의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

 

김활란 박사는 1956531일 이화학당 창립 70주년 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렀고, 195611, 195710, 195810, 19599, 1965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6211, 196411, 1966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총회 한국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하여 외교역량을 발휘하였다.

 

1961930일 김활란 박사는 김옥길(金玉吉, 1921-1990)을 후임 총장으로 임명하고,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여 명예총장 겸 재단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김박사는 이 때, “내가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소냐!”라는 말을 하여 청중들 사이 화제가 되었다. 1963년에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고,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Magsaysay Award)의 공익부문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으며, 19659월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전국복음롸 운동에 앞장서기도했다.

 

김활란 박사는 여성교육에 매진하기 위해 1970214일 임종할 때까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1949년에는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1951년에는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1954년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1963년 필리핀(Philippines) 센트로에스콜라대학교(Centro Escolar University)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66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김활란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승리의 삶을 마감하기 전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장례식을 베토벤의 심포니9을 연주한 음악회로 대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부모 형제, 동서양의 수많은 스승, 형제, 친지, 동지들에게 특히 우리나라 동포와 또 빠짐없이 여러분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간다. 내가 육체로 여러분과 같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고 또 갚을 수 없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큰 생명이 가능하고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장래를 허락하실 줄 알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최근에는 일제말기의 학교운영을 위한 그의 학도병 지원을 독려한 연설등을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등재하였다. 한 인물의 평가는 한 부분만 가지고상황도 고려함 없이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온당한 방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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