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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신의 설립자: 강신명목사

새문안 교회 중흥의 주역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3/17 [03:39]

서울장신의 설립자: 강신명목사

새문안 교회 중흥의 주역

최재건 | 입력 : 2022/03/17 [03:39]

 

서울 장신대의 설립자: 강신명 목사

 

사전전체 성경인명 성경지명 성경동물 성경사전 인명사전 지명사전 지식사전 신학영한사전 신학용어사전 스트롱코드사전(히) 스트롱코드사전(헬)  이야기사전 찬송가 단체 이동고리 기타자료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소죽(小竹) 강신명(姜信明, 1909-1985) 목사는 한국교회의 어마니라고 불리는 새문안교회를 24년간 사역했다. 시무중 서울장신대학교(서울長神大學校)의 전신인 서울장로회신학교(서울長老會神學校) 설립을 주도하였다. 은퇴 후에는 모교인 숭전대학교(崇田大學校, 崇實大學校)의 총장으로 봉직하였다.

 

강신명 목사는 1909613일 경북(慶北) 영주군(榮州郡) 평은면(平恩面)에서 부친 백남(白南) 강병주(姜炳周,1882-1955)와 모친 최영주 사이 3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병주 목사는 한글을 사랑한 장로교 목사였고 기독내명학교의 설립자였다. 장남인 강신명을 어려서부터 목사로 양육하겠다고 결심하였다. 5세가 되던 1914년 아버지가 시무하던 영주 내매교회(乃梅敎會) 주일학교 부설 기독내명학교에서 입학시켰다. 강병주 목사가 현 성내교회)의 담임자가 되면서 풍기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진학했다.

 

하지만 열병에 걸려 곧 휴학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나 강신명은 병에서 회복하자 1925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공주(公州)의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거쳐 서울의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로 전학했다. 1926년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기독내명학교의 선생으로 봉사하고 있던 李永信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1928년 다시 아버지가 재단의 이사로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세운 대구 계성중학교(啓聖中學敎) 4학년에 편입하였으며, 21세가 되던 1930년에 마침내 졸업하였다.

 

그의 잦은 학교 이동은 일제(日帝) 시대인 1920년대 가난한 농촌교회를 시무한 아버지 강병주 목사의 시무교회 변화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장로교와 감리교를 두루 거친 경험은 강신명이 목회 할 때 초교파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고, 한국교회에 있어 분열이 아닌 일치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강신명 목사는 1930년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여 영어를 전공하였고, 1934년 졸업(9)하였다. 이 시기 그는 이사장인 배위량(裵緯良, William Martyn Baird, 1862-1931)과 교장인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1878-1941)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교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정신을 함양할 수 있었다. 윤산온 교장은 1911년 일제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서북지역 기독교인 600여명을 체포하여 일부 기소한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한동안 강제로 출국되어 미국에 가 있다가 돌아온 선교사였다.

 

비록 아버지로부터 목사로 양육되었지만, 강신명 본인은 1920년대 초 내매교회에서 열린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의 부흥회에서 목사가 되기로 스스로 마음을 정하였다고 한다. 1934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강신명 목사는 같은 해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하게 되었다. 재학 중 평양 서문밖교회 전도사로 교역의 길에 들어섰다. 1937년 일제에 의해 당시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구속된 이른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에 연루되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강신명은 평소 음악에 재능이 많아 일찍이 1927강신명 동요 99곡집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1936아동가요곡선 300의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일제는 강신명 목사의 노래가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일치단결하여 독립을 목표로 하고 전진하자고 호소하는 것이라고 해석, 이것을 간접적인 독립운동으로 규정지었다. 특별히 이 책에 수록된 유년주일학교 교가의 내용 가운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에 우리 유년주일학교 영원토록 만세를 문제시했다.

 

강신명 목사는 평양 장신의 33회 졸업생으로 김양선(金良善, 1907-1970), 손양원(孫良源, 1902-1950) 과 함께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곧 기독교 도시로 알려진 평북의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의 동사목사가 되었다. 한편 193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결의에 따라 신사참배 거부키로 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했다. 이 시기 그는 담임목사인 김석창(金錫昌, 1876-1950)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김목사는 독립운동가이자 장로교 총회장(1926)을 역임하였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어수선한 가운 데 19404월 강신명 목사는 어 동경신학교(東京神學校)에서 12월까지 수학하였으며, 1942년 선천북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 내부의 분규를 잠재우고 일제의 감시와 억압, 그리고 내부의 분란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는데 앞장섰다.

 

한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1938년 휴가를 얻기독교면려청년회(基督敎勉勵靑年會)가 해산되고, YMCA도 일본 기구에 종속되었으며 기독교연합공의회(基督敎聯合公議會)도 해산하였다. 선교회가 세운 중고등학교들도 평양의 삼숭(三崇)’인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를 비롯하여 거진 자진 폐교했다. 선교사들은 강제 추방되었다. 마침내 19457월 모든 한국의 공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일본교회에 예속되었다. 성경은 구약폐지, 신약도 사복음만 남기고 다 폐지토록했다.

 

이 시기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주기철(朱基徹, 1897-1944), 이기선(李基宣, 1878-1950), 한상동(韓尙東, 1901-1976),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등 강력하게 반대 투쟁하다가 투옥되었다. 심지어 순교한 인물들도 50여명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는 일제의 억압 앞에 머리를 숙였다. 해방 후 일부 인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강변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강신명 목사는 자신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강하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 여타 목사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때 나는 교회 교직자들과 청년회원들을 소집하여 예배당의 낡은 자리를 걷고 새 자리를 까는 등 깨끗하게 대청소를 했다. 모두가 해방의 기쁨에 취해 즐겁게 일했다. 일을 끝내고 세수를 한 다음 하오 4시에 기도실에서 임시제직회를 열고, 나는 사의를 표명했다. 그것은 첫째 나는 신사참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극적이긴 했다 하더라도 노회를 거쳐 농촌을 다니면서 시국 강연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물러간 이 마당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 된다는 나의 결심에서 취한 태도였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최소한 1년 동안은 자숙하려고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자숙의 모습을 보여준 강신명 목사는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창궐하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자 19463월 월남하였고 영락교회(永樂敎會)에 출석하였는데, 1945년 신의주(新義州)에서 월남한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의 요청으로 영락교회의 동사목사가 되었다. 처음 강신명 목사가 맡은 일은 청년지도였지만 부지런한 그의 성격과 선천에서 검증된 영성으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목사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강 목사는 영락교회의 동사목사로 86개월간 시무하였다. 초창기의 영락교회와 고락을 같이 한 목사이다. 영락교회 건설에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특히 교회교육과 교회평화에 이바지한바 지대하였음을 부언한다. 그의 기억력은 문자 그대로 발군초중의 것이었다. 각 가정 식구들의 이름, 나이, 생일까지 기억하고 문안하는 목사이다. 재임기간 하신 일을 소상히 열거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영락교회 건설에 있어서의 그의 업적은 한마디로 말해서 놀라운 것이었다.

 

또한 강신명 목사는 1955년 영락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교육과 청년활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19483월부터 19516월까지 그는 서울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교장을 역임하였고, 195143세의 나이로 미국(美國) 뉴저지(New Jersey)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장인 존 매카이(Jhon Alexander Mackay, 1889-1983)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매카이는 명예박사 학위를 무려 25개나 받은 에큐메닉스(Ecumenics)의 아버지로 불리던 세계적 신학자이면서 선교학자였는데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가 결성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강신명 목사는 1953년 프린스턴 신학교d에서 교회사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강신명 목사는 195312월 세계대학봉사회(世界大學奉仕會)를 창설하고 1985년까지 이사, 이사장, 그리고 총재를 역임하였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그가 적극 참여한 기독교면려청년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면서 강신명 목사는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숭실대학교의 재단이사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1955년은 강신명 목사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시기였다. 우선 그해 530일 부친 강병주 목사가 소천하였고, 총회에서 동사목사 제도를 폐지하였기에 영락교회를 떠나야 했다. 마침 새문안 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새문안 교회는 1887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가 한국 최초의 교회로 세웠다. 1116일 강신명 목사는 영락교회를 사직하고 같은 해 1122일 경기노회의 승인을 거쳐 12에 부임하여 197912월까지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였다. 1980년 새문안 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 되었다.

 

강신명 목사의 부임 후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설교와 심방, 그리고 화합을 지향하면서도 투명한 교회 치리의 추구로 새문안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어 부임 1년 만에 주일 출석교인이 800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또한 역사 신학을 전공한 담임목사로서 그는 1957927‘7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한태동(韓泰東, 1924-현재) 교수에게 의뢰하여 195811새문안교회 70년사를 발간하였다. 나아가 그는 차세대 기독교 지도자 육성을 위해 언더우드 학술강좌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학술강좌는 평소 통합을 추진하던 강신명 목사의 의중이 담겨져 있어 초청된 강사들은 진보와 보수 그리고 여러 교파를 포괄하는 성격이 강했던 것이 그 특징이었다. 이는 또한 창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1950년대의 한국 장로교는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를 안게 된다. 우선 19515월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소개된 제36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가담한 성직자들의 반성을 촉구하던 한상동 목사 중심의 교회 정화운동을 전개하던 경남법통노회(慶南法統老會)1952429일 제37회 총회에서 총대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이 진주의 성남교회에서 경남법통노회를 총노회(總老會)로 구성했다. 195696일 정식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동일 명칭하에 고신총회(高神總會)를 창립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19534월 대구에서 회집되어 상대적으로 진보적 신학을 견지하던 김재준목사를 면직했다. 그를 중심하여 캐나다 연합교회 한국선교회의 동조로 1954년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 총회를 구성하였다. 그때 한 선교사는 예장과 기장으로 분립된 상황을 한국교회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는 보고서를 보내적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분열은 WCC에 대한 한국 장로교의 참여 문제를 놓고 일어난 것으로 1959928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44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WCC참여를 지지하는 전필순(全弼淳, 1897-1977), 한경직, 강신명 목사 중심의 연동(蓮洞)’측과 이를 반대하는 박형룡(朴亨龍, 1897-1978) 목사 중심의 승동(勝洞)’측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이후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동 측은 통합(統合)’이라는 이름의 교단으로 출범하게 되고,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승동 측은 고신측과 합하여 합동(合同)’이라는 이름의 별도 교단을 구성하였다. 합동 조건이었던 신학교의 일원화를 신학교의 단일화로 합동원칙을 수정하여 고신을 폐교하자 다수의 고신측은 1964년 고려신학교를 복교하고 고려파 교단을 환원하였다. 합동측은 그 이후에도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갈등을 빚다가 1979년 핵분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놀라운 것이어서 그런 분열 속에서도 각 교단은 외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때도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는 분열속에 성장한다는 여운이 남는 발언을 했다.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던 강신명 목사는 통합을 추구하면서 새문안교회가 분열하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회에서 합동 측을 지지하지 않기로 하자 일부 교인과 목회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그해 1229일 강신명 목사는 처음으로 시무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하였다. 이는 곧 당회의 강력한 만류로 반려되었지만 19604.19의거가 일어나면서 새문안 교회내의 갈등이 또다시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신명 목사는 두 번째로 시무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했는데, 강신명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다수였지만 반대하는 교인들은 결국 새문안 교회를 떠나 동산교회를 세웠고 박윤선(朴允善, 1905-1988) 목사를 초대 목사로 청빙하였다.

 

분열의 아픔 속에서도 강신명 목사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분리된 교단의 재결합을 위해 헌신하였다. 1963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강신명 목사는 합동, 고신, 기장 측을 두루 다니며 교회의 재결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총회장으로서 그는 196412월 성탄절을 맞아 다음과 같이 교회의 일치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누구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은 대한예수교 장로교회가 네 갈래 다섯 갈래로 갈라졌으나 그 어느 파도 신앙신조를 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교회 행정에 있어서 정치의 약간 수정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고로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주신 지상과제를 수행키 위하여서는 통합이니 합동이니 하는 것보다는 환원 귀일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혁명을 거듭하고 제2공화국, 3공화국의 탄생까지 보게 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가 많이 논의되는 마당에 있어서 사회와 민족은 교회를 도외시하고 또 백안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정의를 말하고 복지사회 건설을 목표하는 개안된 사람들조차 우리 교회 자체의 통일과 연합을 먼저 하라고 반박까지 하고 있다. 이때에 우리 교회는 먼저 신앙으로 단결하고 나아가서는 평화의 복되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여야 하겠다.

그러므로 내년은 우리 교회가 주어진 사명과 세워진 원칙을 따라 환원과 귀일하는 영광스러운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강신명 목사의 발자취는 교육 부분에서도 큰 빛을 발하였다. 195911대 대한기독교 교육협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599월부터 19638월까지 계명대학교(啓明大學校) 재단이사로, 1961년부터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는데, 특별히 1964년부터 1966년까지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1962년에는 14대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으로 다시 선출되었는데, 197123대 회장으로 3번째 선출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그의 업적은 널리 인정되어 1964년에는 미국 스털링 대학(Sterling College)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교육부분에 있어 강신명 목사의 업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서울장신대학교에서의 사역이다.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가결되어 설립된 서울장로회신학교(, 서울장신대학교)는 처음에 야간학교로 시작되었으나 강신명 목사가 1962년 초대 총장이었던 김규당(金圭唐) 목사에 이어 2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 교훈을 한알의 밀알로 정했는데, 이는 요한복음 1224절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에서 취한 것이다. 이는 강신명 목사의 목회를 밀알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취임 후 그는 총회 야간 신학교의 이름을 서울장로회신학교로 변경하였고 1969년 당회의 허락을 얻어 새문안교회로 신학교를 옮겼으며, 마침내 19813월 종로구(鍾路區) 숭인동(崇仁洞)에 캠퍼스를 짓고 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는 캠퍼스를 경기도 광주로 이전하였다

 

강신명 목사는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주한미군철수 반대 한국기독교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75월부터 1985년까지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 회장직을 수행했으며, 1978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강신명 목사는 19801월 새문안 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후에도 하나님의 일을 활발히 전개하여 1980년에는 입법의회 의원이 되었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그의 모교인 숭전대학교의 이사장과 총장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서울의 동흥중학교교장, 마산의 창신학ㄱ원 이사도 엮암한바 있다.198455일에는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주최 평북중앙도민회(平北中央道民會) 제정 종교부문 문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역으로 몸의 기력이 쇠해져 강신명 목사는 1985년 위출혈과 토혈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경과가 호전되는 듯 보였으나, 결국 622일 토요일 오전 10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소천이었기에 임종 시 특별한 유언은 없었다. 숭전대학교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새문안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린 후, 그의 유해는 새문안동산에 안장되었다. 서울장신 학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우리가 애절함은 암탉이 알을 품듯 부드럽게 감싸주시던 손길, “맡은 일에 충성하자며 늠름한 모습으로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던 것과 매주일 본교 부설 동인교회에 사모님과 늘 자리하시어 화음을 넣어 찬송을 부르시던 소리, 이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러러 보는 하늘 위, 구름 위에 당신의 그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 땅에 남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폐부 깊숙이 찌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이제 한 길을 가는 우리들 가슴 가슴마다에 당신의 남긴 뜻을 기리어 성실함과 이로써 한 알의 밀이 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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