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을 받은 의료선교사: 슈바이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의료선교사였다. 또한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였고 루터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알사스에서 태어나 1919년까지 독일 시민으로 살았고, 그 후에는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종교적으로도 그지역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했다.
청소년기에는 루터파 교회에서 목회하는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농촌 교회여서 가난한 농민들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장학생으로 학업에도 열중하였다. 그 열매로 소르본대학에서 ‘칸트의 종교철학’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의 튜빙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란 책이 출판된 후 학계에서 많은 관심과 논란을 일으켜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명 학자들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한편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기도 했다. 군스바하 지역의 한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담당하며 목회 경력을 쌓기도 했다. 그때 주목받은 설교는 문명화된 인간과 미개한 인간으로 나누어진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신학교의 교장직을 수행 한적도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사회ㆍ윤리적인 면에서 상당히 진보적 입장이었다.
슈바이처는 바하 (J. S. Bach) 음악의 대가였다. 더 유명한 그는 바하의 작품을 현대판으로 편찬하고 600여 페이지나 되는 바하 음악 전문 서적을 독어와 불어로 출판하였다. 피아노도 전공하였고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얻어 선교비 모금도 했다.
슈바이처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중년기 이후의 의료 선교활동이었다. 어느 날 파리복음선교회(The Society of Evangelist Mission of Paris)가 간행한 잡지에서 아프리카에 의료선교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호소를 자기를 선교사로 부르는 특별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그간에 해온 일들과 이룩한 업적들을 모두 버리고 의료선교사로의 부름에 따르기로 결단하였다.
슈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에서 행하신 일에 주목했다. 가르치는 일(Teaching)과 병자를 치유하는 일(Healing)이 주된 활동임을 간파했다. 그는 예수의 치유 사역에 보다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 보다 행동으로 환자를 고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소명 의식을 가졌다.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의료선교사로 가야겠다고 결단했다. 그가 선교사가 되기로 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주변에 많은 지인들과 가족들은 적극 만류하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제일 어려운 일은 새 약혼녀를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약혼녀도 선교사 부인 되기로 다짐하였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슈바이처의 스승의 딸이었다.
선교사가 되는 첫 관문은 의학교육을 받고 열대지역의 병들을 치료하는 특수 분야 의사면허증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30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3년간 의학공부에 전념하였고, ‘예수의 심리적 연구’란 학위논문을 썼다. 신학, 철학, 음악, 의학의 전문가로서 의료선교사가 되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의료선교사로 지원했지만 파리복음선교회는 거절하였다. 슈바이처의 루터파 신학적인 견해와 선교회의 복음적인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이었다. 슈바이처는 선교회의 거절을 개의치 않고 개인적으로 모금에 성공한 후에 다시 선교회에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마침내 선교회는 의료만 담당하고 교회 여러 문제 등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하고 허락하였다.
슈바이처 부부는 오늘날 아프리카 가봉의 오고웨 강가 랑바레네에 정착하였다. 병원 터를 닦는 데서부터 병원 설계도를 작성하기까지 그 방대한 지역에서 벌이는 모든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마을의 분위기를 살리는 병원의 건물을 짓고 경관을 조성하도록 유의하였다. 후에 유럽에서 방문자들이 와서 보고 그곳의 너무나 원시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슈바이처는 병원의 현대화보다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병원의 존립 이유에 유념하고 환경친화적인 병원이 되도록 힘썼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게 된 데에는 유럽 문명이 저지른 범죄를 참회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다. 그는 유럽의 백인 크리스천 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로 본토인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주고 그곳의 환경을 파괴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그들에게 무한한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므로 당시의 최대 죄악인 식민주의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한낱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죄책감을 갖고 그 나름의 최선의 봉사를 통해 조금이라도 보상하는 것이 자기가 가질 기본자세라고 생각하였다.
슈바이처의 철학의 중심에는 생명 존중 사상이 있었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 기독교윤리의 바탕이라고 인식하였다. 서구 철학과 기독교 문명이 생명의 존엄성을 외면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은 인도의 브라만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아프리카 영성과도 통하는 사상이었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했던 “평화의 문제”라는 연설은 명연설로 평가받았다. 그것은 그 당시 동서냉전의 산물인 핵 개발을 반대하는 연설이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핵무기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합세하여 투쟁하였다. 아인스타인, 버트런드 러셀 등과 동조하여 핵실험과 핵무기를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고 투쟁에도 앞장섰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봉사하는 동안 슈바이처는 그를 상징하는 하얀 가운, 수염, 헬멧 등을 착용하고 보트, 카누를 타고 오는 손님을 맞이하였다.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더 존경받고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가 아프리카에 간 것은 존경받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에 의거 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하였다. 그는 1965년 9월 4일, 90세를 일기로 그가 세운 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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