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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선교의 개척자 구례선 선교사부부

함경도 제동병원, 영생학교장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4/11 [09:31]

함경도 선교의 개척자 구례선 선교사부부

함경도 제동병원, 영생학교장

최재건 | 입력 : 2022/04/11 [09:31]

                                            그리어슨 의료 선교사와 그 부인 매리

 

 

 내한선교사] Grierson, Robert G. < 주요 선교사들 <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 내한 선교사 <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한국에 온 선교사에 관심을 갖고 1976년에 캐나다 토론토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해외 유학생이 한해 500여명 출구갈 때였다. 유학생 시험은 패스했으나 비행기 값도 없었다. 이민가는 분의 호의로 여비를 빌려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받았으나 가서 생활비도 없이 믿음만 가지고 갔다. 은총의 3년간 토론토 생활이었다.

 

캐나다를 택한 이유중 복지국가라는 점과 내한한 캐다 선교사 중에 훌륭한 사역을 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춘향전, 구운몽 외 여러 한국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고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Pilgrim Progress)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갓 쓴 예수를 삽화로 곁들여 한국어로 소개했던 게일, 세브란스 병원의 신축과 연희 세브란스양교 교장을 18년간 역임 및 한국 의학의 초석을 놓고 세계 의료 선교에 크게 기여한 에비슨, 원산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제중원 원장도 지냈던 하디, 3.1 독립운동, 제암리 사건을 서구에 알리는 데 앞장섰던 스코필드,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계에 성경의 고등비평을 소개하였던 스캇(서고도)등등, 그리고 그리어슨 같은 선교사들의 행적에 관심이 컷기 때문이었다.4

 

 

토론토 인근에 일제 때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스캇, 박커를 비롯하여 몇 분이 생존해 있었다. 그중 처음 만난 분이 그리어슨 선교사 부인이었다. 90세가 넘았는데도 정정하셨다.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부군인 그리어슨 (Robert G. Grierson, 具禮善 1868-1965) 은 의사요 목사요 음악가요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캐나다 노바스코시아 주의 핼리팍스에서 태어났다. 1890년 달하우지대학교를 졸업했다. 1893년에는 파인 힐 신학교도 졸업했다. 1897년에는 감리교 신학교도 졸업했다. 뉴욕에서 의과대학도 졸업했다. 선교사가 되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9997일이었다. 1901년에 성진이 자유항으로 개항되자 그곳에 캐나다 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선교지회를 설치하였다.

 

성진에서 제동병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활동했다. 함경도에서는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그의 의료 활동을 도운이는 맥밀란(Kate McMillan)이었다. 서양의술을 읽힌 의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그는 만능 의사가 되었다. 1899년에 이미 그 지역에서 백내장 수술을 하여 눈을 뜨게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젊은 부인에게 언청이 수술을 해 주어 동네 사람들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프로이드 이전에 이미 정신과 의사 역할도 했다. 12년간 환자로 병상에서 산 김준섭을 그리어슨이 진찰했으나 특별한 병이 없었다. 그리어슨은 김준섭의 맹장의 일부를 잘랐다, 벌레처럼 보이는 그 맹장의 일부를 보여주며 이 벌레가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으나 이 후에는 건강해지리라고 하여 정신적으로 치료하였다. 그는 육신의 병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게 되어 훗날 전도에 앞장을 섰다.

 

그리어슨은 서양 음악의 보급에도 큰 공을 세웠다. 트럼펫도 국내에 소개했다. 여러명이 함께 노래하는 제성 찬양대를 조직했다. 1920년에는 마침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였다. 한편 교육선교에도 힘을 기울여 성진에 보신학교와 영생학교와 영생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어슨 부부는 남녀 각 학교의 교장으로 학교를 발전시켜 함경도의 명문이 되게 하였다. 그리어슨 선교사는 1901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에서 구원론과 종말론도 가르치기도 했다.

 

성진을 비롯한 함북 지방과 만주지역에 미치는 선교 활동 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지원하였다. 3.1운동이 서울에서 발발한 후 한달여만에 성진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신민회 사건에 연류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지 얼마 안 된 배민수가 앞장서자 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레슨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 신간회와 서북학회에서 활동한 이동휘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러시아의 레닌을 찾아가 일차적으로 40만 루불을 받아와 조선인 최초의 고려공산당을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으나 좌 편향이 되어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른 길로 갔다.

 

 

필자가 토론토에 캐나다 선교사 자료 수집 차 유학을 갔을 때 그리어슨 박사는 1965년에 작고하였고 그 부인 매리 그리어슨이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어슨은 1920년 출산하다가 숨진 레나와의 사별 후 간호사로 내한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던 매리와 두 번째 결혼했었다. 그들은 1934년 선교사로 은퇴하여 토론토에 정착하였다. 둘 사이에 한국에서 태어난 케네스는 에드몬튼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딸 도리스(복순이)는 캐나다 최대의 토론토의 낙스 장로교회의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1976년 필자가 매리여사를 방문했을 때 90이 넘었는데도 한국 이민자들을 돕고 주일학교봉사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거의 주말 마다 그를 방문하여 영어회화도 배우는 한편 그들의 선교활동과 남긴 기록, 사진첩을 보며 그의 생애와 그가 남긴 선교 일화집 Episode on a Long Long Trail 에 관해 그리고 다른 한국선교에 관한 얘기도 들었다.

 

그해 말 크리스마스 때였다. 토론토의 겨울은 길고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생애에 처음 겪는 매서운 추위와 연이은 폭설도 보았다. 토론토에 간 비행기 값, 갚아야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은 더한층 간절하였다. 크리스마스 전 주말 다시 그의 집에 갔을 때였다. 그리어슨은 한국의 성진에서 보냈던 추억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재활용한얘기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고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었던 얘기들이었다.

 

그 집을 나올 무렵 매리선교사는 나에게 그리어슨 선교사가 쓰던 초기 한국교회가 사용한 성경, 찬송가를 주었다. 그 속에는 크리스마스 카드와 현금이 든 봉투가 있었다. 나는 그 분이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봉투를 돌려 드렸다. 그런 나에게 매리 선교사는 필자가 한국 초기의 선교사들을 연구한다는 말 듣고 그때부터 각별한 관심을 갖고 사랑했었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만 하고 그 표시가 없다면 정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봉투를 되돌려 주었다. 그때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동사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후에도 그는 나에게 1934년 은퇴 할 때 기념품으로 받은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주었다. 김기창 화백이 당시의 조선전에 등장한 젊은 날의 작품인 동자상이었다.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가져 오려고 했더니 다음날 친이 포장해서 택시로 가져다 주었다. 그 그림은 가난했던 유학 시절을 이겨나가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리어슨이 준 찬송가와 성경을 펼칠 때 마다 그리고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유독 그곳에서 자료수집만 하고 그 후로 아무런 저작도 하지 못한 필자의 나태와 베풀어 준 사랑에 보답도 못한 점을 되새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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