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반공투사였던 순교자, 신석구 목사
신석구 목사는 1875년 음력 5월 3일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개동(介洞)에서 선비인 아버지 평산 신씨 신재기(申在綺, 1844-1889)와 어머니 청해(靑海) 이(李)씨(1845-1881) 사이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신석구는 어렸지만 효를 바탕으로 한 조선조의 유학 전통 따라 이름난 효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가 6세가 되던 1881년 어머니를 여위었다. 9세가 되던 1884년 아버지가 그렇게 효도를 바쳐온 할아버지 신광소(申光紹, 1812-1884)도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6년에는 양아버지였던 큰아버지가 사망한 데 이어 14세가 되던 1889년에는 아버지가 임종하였다. 또 한달 뒤 할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졸지에 그는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 한문을 어른들로부터 익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신석구는 당시의 관혼상제의 의례에 따라 3년 상을 치러내면서 건실한 생활을 해왔으나, 삶의 스승이 될 어른들이 모두 없어지면서 점차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 17세가 되던 1892년에는 고향 주변의 시골에서 하층 계급의 유부녀와 동거도 했다. 훗날 신석구 목사는 스스로 이 시기를 자신이 ‘1차 타락’을 경험한 시기라고 칭하였다.
신석구가 유혹을 떨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고 마음을 바로잡은 덕택이었다. 그리고 가문의 내력으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2세가 되던 1897년에 조치원(鳥致院)에 살던 선비 이치헌(李致獻)의 딸 전주(全州) 이(李)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에게는 이 결혼이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구는 결혼 후 경제적으로 힘든 속에서 어느 군수(郡守)의 아들을 가르치는 훈장의 자리를 제안 받고 이에 응하였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넘쳐나던 당시 한 몫 챙겨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신석구는 ‘2차 타락’을 경험하게 된다. 다만, 이번에도 다행히 그는 청빈한 삶을 강조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분연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빈곤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문의 호주이면서 하나 남은 형마저 사별하는 일을 겪게 된다. 졸지에 형수와 조카들의 생계까지 떠맡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힘든 것은 “왜 착한 이들이 불행한가?”라는 문제에서 기인한 정신적 고통이었다. 정승(政丞)을 바라보며 공부하던 젊은 유생(儒生)에게는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찬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이 시기 그는 ‘3차 타락’을 겪었다.
1901년 신석구는 어릴 적 친구이자 청주 지역 유지의 아들인 김진우(金鎭宇)를 만나 전당포 사업을 도와주면서 서기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업 5년차, 그의 나이 31세인 1906년 사업은 망하였고, 살길을 찾아 부양할 가족이 많은 친구를 대신하여 사기죄로 감옥에 갔다. 3개월 뒤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거짓으로 사망신고까지 내고 가족을 처가로 보낸 뒤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떠나는 날 부인이 해 주는 아침을 먹으며 달아날 준비를 하던 이 치욕의 순간이 “새 생활의 시작”을 이끌었다고 후일 고백하였다. 신석구 목사의 자서전에 나타난 당시의 기록을 현대어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가 나의 신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부엌에서는 새벽밥을 짓느라 불을 후둑 후둑 때고 나는 밝아오는 동편을 향하여 묵좌(黙坐)하여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계획하여 보았다. 십오 세 이후로 이십오 세까지 아무리 표랑생활(漂浪生活) 할지라도 거의(‘감히’라고 못함은 간음죄를 범함) 양심생활을 할 때에는 아무리 더디더디 될 지라도 차츰 차츰 길이 열리어 가더니 십칠 년 양심을 저버린 생활을 한 결과 오늘 여지없는 실패를 당하였다. 타인들은 내가 친구를 위해 대신 고생한다고 동정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은 나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 내가 살려면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동서남북 어디로 갈 방향을 모르고 떠났다. 나는 그 때 몰랐지만 이후에 생각하면 그 시기가 곳 성신(聖神)께서 나를 부르신 시간이었다. 때는 1906년 음력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가족과 헤어져 일자리를 찾던 신석구가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면 일자리도 많으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운 좋게 그는 선비 집안에서 자라난 것을 인정받아 고향친구 김규흥(金奎興)의 도움으로 도사(都事)를 지낸 윤자정(尹滋正)의 자제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신석구 목사의 실력을 인정한 김규흥은 그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서울 인근에 집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선생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고향친구 김진우가 찾아와 느닷없이 ‘약(藥)장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고민 끝에 신석구는 의리를 쫒아 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하여 좋은 직장을 버리고 다시 서울을 떠나 1907년 봄에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장남면(長湍面) 고랑포(高浪浦)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장단면에서 약국을 시작할 때 친구 김진우는 “예수님을 믿자”고 제안하였다. 사실 김진우는 서울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의 약을 받아 지방에 팔면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던 것이고, 약국 앞에는 고랑포 교회가 있어 선교의 거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위해 감옥 까지 가고, 친구 때문에 가짜로 사망신고서까지 내고 도피한 그였지만, 신석구는 이때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친구와 교인들의 집요한 전도로 마침내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유교의 이념들이 기독교 안에서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가 망해가는 조선의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한 날은 1907년 7월 14일이었다. 자신을 극단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친구 김진우에 의해 영원한 삶으로 인도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 하겠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에 있어 대부흥의 해로 기억되는 1907년에 신석구는기독교로 회심이 일어난 것도 주목할 점이다.
그런데 이 시기 신석구는 남감리회 순행전도사인 정춘수(鄭春洙, 1875-1951)를 만나게 되는데, 정춘수는 신석구와는 동향(同鄕)으로 1903년 원산(元山) 대부흥운동에서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河鯉泳, 1865-1949)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미국선교사 왕영덕으로 부터 1904년 2월 세례를 받았다. 곧 이 둘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김진우의 지원에 힘입어 신석구는 정춘수와 함께 1907년 8월 말에 개성(開城)으로 떠났다. 당시 기독교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던 개성에서 신석구는 1907년 4월 초기 감리교 선교사인 부친 리드(C. F. Reid, 李德)에 이어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온 리드(W. T. Reid, 李尉萬)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성실한 신석구에게 감동한 리드 선교사는 신석구에게 의사의 길을 제안하였고, 신석구 목사 역시 많은 빚 때문에 이를 고민했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전도하는 이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신석구는 1908년 33세의 나이로 개성남부교회에서 왓슨(W. A. Wasson, 王永德, 1880-1964)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같은 해 4월 감리교신학대학교(監理敎神學大學校)의 전신인 감리교협성신학교(監理敎協成神學校)에 입학하였다. 다만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졸업은 1922년(8회 졸업생)에 하게 되었다. 한편 신석구는 주변의 추천으로 1909년부터 개성북부교회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는데, 7월 29일 화장산(華藏山)에서 기도 중 중생(重生)을 체험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일어난 1910년 신석구는 처음으로 전도사 면접을 보게 되었지만, 60원에 달하는 부채문제로 탈락하게 되었다. 상심한 그는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겸손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이번에 내가 전도사직을 받지 못한 것은 큰 행복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받기를 간구하였다. 만일 그 때에 내가 전도사 직분을 받았던들 나는 꼭 교만한 마음이 나서 하나님 앞에 떨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 그리 나를 사랑하시는지 참 감사하다.
이후 신석구는 같은 해 홍천읍교회(洪川邑敎會)에서 봉사하였고, 1911년 인제교회(麟蹄敎會) 부흥회를 인도였으며 1912년 「그리스도회보」에 “신자의 거듭남”을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같은 해 9월 12일 남감리회에서 전도사 직분을 받게 되었다. 이후 42세가 되던 1917년 9월 24일 집사 목사로 안수된데 이어, 1918년 11월 4일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 단독 연회(年會, Annual Conference)에서 서울에 있는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유명한 교회 담임목사로 처음 맞게 되는 안정된 생활도 잠시 뿐이었다. 신석구 목사는 결코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민족이 당하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에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 대표 중 한 명으로 3.1 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고, 목사의 정치 참여 문제와 천도교, 불교와 연합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누천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이제 찾을 기회가 와서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닌가?”라는 주님의 응답을 받고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감리교의 오화영, 이필주, 박희도, 김창준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독립선언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된 신석구 목사는 일본인 검사와 판사의 회유 앞에 오히려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각오를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이에 그는 1920년 10월 12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이승훈(李昇薰, 1864-1930) 등과 함께 관련자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선고받았고, 결심공판에서는 미결수로 복역한 1년을 인정받아 2년형이 선고되었다. 1920년 9월 22일 신석구 목사에 대한 심리의 내용을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문 : 일한합병에 대한 감상은? 답 : 그것은 물론 반대지요. 사람치고는 다 한 가지가 아니오.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이 되어서 지금 재판장이 나의 처지에 있더라도 물론 그러하겠지요. 재판장이 묻는 것이 오히려 실수가 아니오. 물을 것도 없는 것이 아니오. 독립사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법정에 선 이때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내 가슴 속에 사무치었소. 일본 사람이 조선을 통치함에는 말하지 못할 압박과 핍박 강제를 당하여 참고 견디지 못하게 하였지만 나는 지금까지 생명을 끊지 못하고 있소. 허나 그것은 한 가지 바라는 희망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언제든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되겠다는 것이오.
1921년 11월 4일 47세의 나이로 만기 출소한 신석구 목사는 원산 남촌동(南村洞) 상리교회(上里敎會)로 파송되었고 강연회, 부흥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신학지에 기고를 계속하였다. 49세가 되던 1924년 그는 감리교의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교파 간 연합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6년 7월 28일에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열린 장감연합목사수양회(長監聯合牧師修養會)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전국적 명성을 얻은 그는 같은 해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장로교회인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의 부흥회를 인도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27년에는 서울의 중앙전도관(中央傳道館)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헌신적인 사역 속에서 신석구 목사는 참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다녔지만,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또다시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國民儀禮)’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참배 명분론에 굴복한 장로교 총회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이는 천주교를 비롯한 다수의 교단도 마찬가지였으며, 감리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1938년 10월 5일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감리교 지도자들인 양주삼(梁柱三, 1879-1950) 총리사와 총대 일동이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돌아와 회의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감리교 목회자들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신사의 비종교화 이론에 넘어 갔지만 신석구 목사는 단호하게 신사참배를 거절하였다. 당국은 1938년 3월 10일 63세인 그를 천안경찰서에 2개월간 구금되었으나 등창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신사가 없던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서 목회했다. 1939년 9월 김종우(金鍾宇, 1883-1939) 감독이 임종하고 후임 감독으로 신석구 목사의 친구인 정춘수 목사가 선출되면서 상황은 오히려 엉뚱하게 바뀌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정춘수 목사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오히려 그 앞잡이의 모습을 확연히 띄게 된 것이다. 한결같이 일제의 탄압에 저항해온 신석구 목사에 대해 1941년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은 목사의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면서 강제로 은퇴시켰다.
압제에 대해 신앙인으로 저항하였던 신석구 목사는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면서 예비 검속되었다. 심지어 1944년 4월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에서는 그의 목사직을 면직시키는 처분까지 내렸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설교를 하며 일제와 친일파들에 대해 저항하였다. 끝내 신석구 목사는 70세가 되던 1945년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 및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하다가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다.
바래 마지않던 일제로 부터의 해방이 되었지만 신석구 목사가 시무하던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앞세운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주의에 의한 기독교 탄압은 일제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더 가혹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1946년 3월 1일 평양중앙방송의 ‘3.1절 기념방송’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지 않은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는 공산정권의 홍보문구를 그대로 읽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다가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다.
이어서 그는 1947년 2월 15일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인사들이 포함된 반공(反共) 정당인 기독교자유당(基督敎自由黨) 창당에 참여하였지만 결국 공산정권의 방해로 정당 창당마저도 좌절당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같은 달 북조선인민위원회(北朝鮮人民委員會)에 공산당 정책을 비판하는 “감상문”을 제출하는 등 굳건하게 공산주의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서 저항하였다. 신석구목사는 74세가 되던 1949년에는 남조선 정부가 미군과 함께 5월 1일 북침하여 온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던 ‘비밀정보원’을 후원한 기독교인들을 북한 정부가 체포한 이른바 ‘진남포(鎭南浦) 4.19 사건’에 연루되어 강제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공산 정권이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석구 목사는 이로 인해 평남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최고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선생은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1950년 6.25 동란(動亂) 속에서 순교하였다. 그 해 9월 26일 평양이 수복되기 전 가족들이 인민교화소에서 물품의 차입통보 엽서를 받아 그때까지 그가 생존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나, 10월 19일 평양이 국군과 UN군에 의해 수복된 후 가족들이 인민교화소에 찾아 갔을 때에는 안타깝게 그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총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10월 10일 경 퇴각하는 공산주의자 일당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목사는 제자들과 동역자들이 수차 남으로 내려가라고 권고를 하였지만, “많은 교인들을 공산정권에 남겨두고 목사인 자신만 남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하며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던 것이다. 1950년 12월 4일 부인만 남고 가족은 월남하였다. 신석구 목사의 부인은 남편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만 남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고 하여 월남을 거부하였다.
1963년 3월 1일 신석구 목사에게 대한민국 정부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 의관장(衣冠葬)이 의결되어 같은 해 9월 18일 동작동(銅雀洞) 국립묘기 애국선열 묘역에서 의관장이 거행되었다. 1989년 3월 1일 일본(日本)에서 『巨星 殷哉 申錫九 牧師 一代記(거성 은재 신석구 목사 일대기)』가 발간되었고, 1996년 3월 1일 국가보훈처, 문화공보부, 광복회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어 독립기념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1999년 6월 25일에는 순교자 기념사업부에서 특별히 『순교자 신석구 목사』라는 이름의 책을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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