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조수옥의 신사참배반대투쟁과 삶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감옥에서 5년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5/26 [16:39]

조수옥의 신사참배반대투쟁과 삶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감옥에서 5년

최재건 | 입력 : 2022/05/26 [16:39]

조수옥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삶

뉴스일반 - 국민일보 

 

 

I. 서론

II. 해방 전 삶과 신사참배 반대 투쟁

1. 신앙 입문과 교회 봉사

1) 신앙 입문

2) 여전도사 생활

3) 신사참배 문제의 대두

2. 신사참배 반대 투쟁

1) 1차 체포와 심문

2) 2차 체포와 심문

3) 평양의 수감생활

4)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태도

5) 해방과 출옥

III. 해방 후 삶과 신앙

1. 출옥 후의 삶

1) 사회사업

2) 교회 봉사

3) 일본교회 순방

4) 수상

2. 신앙의 특징

IV.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신앙 운동의 관계

V. 결론

 

I. 서론

 

조수옥(趙壽玉, 1914-2002)은 일제 말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의 지조를 지킨 남은 자였다. 한상동, 이인재 등과 더불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해방 후에 석방된 출옥성도였다. 당시 여성 출옥성도로는 그 외에 안의숙, 최덕지, 박인순, 염애나 등이 있었다. 조수옥은 해방 후 감옥생활의 고난을 승화시켜 자선 사업가가 되었다. 1946년부터 고아원을 설립하고 무료 노인 병원을 세워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일치함을 깨닫고, 신앙과 삶을 일치시킨 신앙인으로서 애국자의 삶이었다. 이상규는 그런 그를 믿음의 어머니로 일생을 사신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201838일 세계여성의 날에 열린 조찬기도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조수옥을 문준경과 함께 신앙과 사랑으로 가장 약하고 낮은 곳을 섬겨 이 땅에 기독교 정신을 심고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한 여성으로 손꼽았다.

본고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 가운데 더러는 건국공로포상을 받고 더러는 받지 못한 현상황에서 조수옥의 삶과 신앙, 특별히 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반대 투쟁을 다시금 살펴보려는 데 있다. 일제말 한국교회에 내려진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논의는 80여 년 전부터 제기되어 아직도 논의되는 난제로 남아있다. 해방 후 교회재건이 활발히진행되자 한상동을 위시한 경남노회원의 일부가 일제 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참배결의와 교역자들의 신사참배에 대해 자숙안을 교계에 제시하였다.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위배하고 우상숭배를 했으니 다 같이 회개하자는 내용이었다. 한편 신사참배에 순응한 것은 신학교육의 문제로 보고 정통신학을 기치를 들고 고려신학교를 세워 총회의 인준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남노회와 총회는 고려신학교의 인준을 누차 부결시켰다. 19515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는 신학교와 자숙안을 제시하여 3분된 경남노회의 고려파 총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24월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차 총회에서도 고려파는 무시되었다. 고립이 된 고려파는 마침내 같은 해 9월 진주 성남교회에서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제1회 총노회를 구성하였다. 조수옥은 여생을 그렇게 해서 구성된 고신 교단에서 활동하였다.

지금도 교계 일각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문제가 되풀이하여 거론되고 있다. 신사참배 거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신앙의 행위였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식민정책에 피치 못하게 순응했을 때,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일제의 정신적 동화를 거부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일제말 이광수, 최남선 같은 최고의 지식인들마저 친일로 굴절하던 상황에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나선 사람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의 투쟁은 한국교회가 기억하고 지켜가야 할 신앙의 표본이자 유산이 되었다.

조수옥도 그런 반대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더욱이 몇 명이 되지 않는 여성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투쟁기는 와타나베 노부오(渡辺信夫)가 인터뷰하고 출간한 책에서 대체로 정리되었다. 그 책은 독일의 저항 신학자 빌헤름 니젤의 제자인 와타나베가 신사참배 강요에 관심을 갖고 가해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갖고 썼다는데 특별한 의의가 있다. 그 글은 처음에 일본의 복음과 세계란 잡지에서 연재되었고, 그 후 일본의 신교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국네에서는 그 책을 김산덕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여 2002동인에서 출간되었다. 그 책보다 먼저 심군식이 조수옥의 삶을 정리한 것과 내용상으로 대동소이하다.

조수옥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출옥 후 삶과 신앙은 그가 소속된 고려파 교회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각종 세미나 및 발표회를 통해 어느 정도 조명되었다. 앞으로도 더 깊은 연구논문과 저술 또는 평전이 나와야 하겠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서 그의 투옥 생활이 신앙의 자유만을 위한 것이었는지 나라의 독립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의 여부도 밝혀져야 할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신사참배 반대 투쟁이 신앙 운동에 그쳤다는 일부 인식 속에서 어떤 이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어떤 이는 인정받지 못하는 애매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들의 투쟁 동기는 일차적으로 신앙에서 연유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신앙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가지 간단한 사건도 복합적인 원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본고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이 하나님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라 사랑과도 연계되어 있는 사실이 그의 고백과 삶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는 점을 밝히고, 그를 독립운동 유공자의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에 목적을 둔다. 본고의 시간 범위는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생활을 하고 출옥한 시기의 전후로 한다. 따라서 투옥과 출옥 후 사회사업의 동기와 과정을 다룰 것이다. 생애 후반기의 사회봉사의 삶은 별고를 요하는 부분이다.

 

II. 해방 전 삶과 신사참배 반대 투쟁

 

1. 신앙 입문과 교회 봉사

 

1) 신앙 입문

 

조수옥은 1914121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1088번지에서 부친 횡성 조씨(橫城 趙氏) 가의 조원희(趙元熙)와 모친 김태진(金太珍)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들 가운데는 하동에서 교회설립에 기여한 이도 있었고, 3.1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된 이도 있었다. 장녀로 태어난 조수옥은 하동읍교회의 유치원을 거쳐 1927년 하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머니의 영향 아래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나, 모친 사후에는 교회를 떠났다. 당시에 처녀가 교회를 다니면 많은 말을 듣게 되는 것이 한 이유였다. 193420세가 되어 결혼했으나, 남편이 혼전부터 이어온 일본 여인과 외도하여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출석하였다. 교회에 아는 사람도 있었고, 결혼생활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서 천국에 가면 만날 것이란 생각도 하였다. 점차 신앙이 깊어져서 새벽기도회를 다녔고, 성경말씀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 하나의 변화는 민족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와타나베 노부오(渡辺信夫)는 조수옥과 하동에서 같은 교회의 유치원에 다녔다. 나중에는 신사참배 반대자인 강월남(姜月南) 장로를 통해 조수옥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대해 들었다. 강월남은 하동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신사참배 문제로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하동에 일본의 신사가 세워진 것은 1935년이었다. 이듬해 1936810일 밤, 숭실전문학교 학생 3명이 하동교회에 와서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하동 경찰서는 이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들을 경찰서호출하여 신사참배를 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일일이 심문하였다. 강월남은 신사참배를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강월남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경찰당국은 회유와 고문으로 그를 압박했으나 신앙의 힘을 꺾지 못하였다. 하동경찰서는 강월남을 하동에서 추방하였다. 그는 그 후 9년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가족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경찰의 감시 하에 노동을 하며 연명하다 해방 후에야 고향 교회로 돌아와 장로로 봉직하면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조수옥은 193522세 때 외삼촌의 권유로 하동을 떠나 통영으로 갔다. 생활의 자립을 위해 명지병원에서 간호사 보조원의 일을 시작하였다. 진종학(陳宗學) 목사가 시무하던 통영교회에서 신앙생활도 이어 갔다. 당시에 그 교회의 명칭은 대화정교회였다. 그 교회에는 시인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도 출석하고 있었다. 최덕지도 통영교회 교인이었다. 조수옥은 진종학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도 하였다.

삶의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간호사가 되는 길은 멀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진로문제로 고뇌하다가 양재사의 꿈을 안고 양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이듬해 마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경남 일대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문창교회에 출석하였다. 당시 그 교회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담임으로 있었다(재임 1931-1936). 주 목사는 그 때 이미 교인들에게 지금 고난의 시기가 옵니다. 우리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라는 설교를 자주 하고 있었다. 조수옥은 선교사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도 참석하였다. 주 목사는 부인 안갑수와 사별하여 정의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학교 교사가 된 오정모와 결혼하였다. 조수옥은 오정모와도 친하게 지냈다. 문창교회에서 신앙생활이 건실해졌고 그 시대를 사는 신앙인의 자세를 터득하였다.

 

2) 여전도사 생활

 

1937년에는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한국선교회가 경영하는 성경학교였다. 교장은 서오성(S. M. Scott) 선교사였다. 성경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동지가 되는 최덕지와 박인순을 만났다. 날마다 밤 기도회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며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에 몰입하였다.

최덕지는 조수옥을 1938년부터 삼천포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하라고 소개했다. 삼천포교회는 1907년 호주선교사 거열휴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 담임 교역자는 김상세(金相世) 목사였다. 조수옥은 전도사가 되려고 성경학교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그 부름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였다.

전도부인이 된 조수옥은 어려운 교인을 찾아가 도와주고 불쌍한 이웃에게 봉사하며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삼천포 인근 남해교회의 최상림(崔相林) 목사로부터 시국과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신앙의 힘도 얻었다. 최상림은 후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조수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사참배 문제에 대응하는 길을 찾도록 하는 나침판 역할을 했다. 남해교회는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 세워졌고, 원래 이름은 복변교회였다. 1920년에 신축하면서 이름을 남해읍교회라고 변경하였다. 호주 선교사 라이알(D. M.Lyall)이 관여하였다.

 

3) 신사참배 문제 대두

 

조수옥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탄된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 없는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계속 체감하며 살았다. 토지와 재산은 몰수당하였고, 한국 고유문화와 전통은 짓밟혔다. 나중에는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고 조선어 사용도 금지당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조수옥은 그런 상황에서도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의 말씀을 따라 식민정책에 순응하며 참고 살았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군국주의 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소위 신사의 비종교화를 내세워 신사참배는 관습이자 국민의례라고 주장하며 전 국민을 유인하였다. 그들의 민속 종교인 신사를 한국인에게 강요하여 정신세계까지 지배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에 대한 탄압을 충청도의 강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1935년 평양에서 학교학생들부터 참배토록하였으나 거부하자 숭실학교와 숭의학교의 교장들을 내쫓았다. 그 후 교회에도 참배를 강요했으나 거부자들이 생겨나자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조수옥은 신사참배 강요를 일제가 하나님마저 뺏으려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개인의 신앙에 대해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인내하고 복종할 수 없었다. 신사참배 강요를 하나님께 대항하는 무모한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고 믿었다. 한국의 기독교 교단들이 다 참배하기로 굴복하였고, 마지막으로 1938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강압 아래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가결하였다. 그 일은 형사들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 결정을 따랐다.

193810월 삼천포 경찰서는 삼천포에 있는 모든 장로교, 안식교, 성결교 교인들을 경찰서 유도장에 모이게 하였다. 경찰서장은 그들에게 다 같이 신사참배를 하러 가자고 명령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였다. 모두 신사를 향해 갔지만, 조수옥은 교회로 돌아왔다.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미리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특별한 신앙체험이 없어서 자기가 과연 신사참배를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였다. 일본 경찰에 의해 죽더라도 승리자로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강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집이나 교회를 떠나 특별히 기도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몇 사람과 함께 인근의 와룡산(臥龍山)으로 기도하러 갔다. 800미터나 되는 꽤 높은 산 정상에서 무서움을 없애 주시고 담대한 마음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나 밤이 되니 한기와 공포심에 눌려 울기만 하였다. 그때 갑자기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조수옥은 하나님, 나의 이름을 불러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상,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셔서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옵소서라고 절실히 기도하였다. 그 후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고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절망 가운데에서 새로운 삶의 소망을 얻었다. 옳은 길에서 죽도록 해달라고 간구한 후에 담대한 마음도 생겼고 신앙의 의지도 더 굳세어졌다.

다음날 조수옥은 다시 경찰서에 호출되었다. 경찰서장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었다. 조수옥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하였다. 서장은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 하도록 가결했는데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참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추궁하였다. 설득에 실패하자 서장은 조수옥에게 자기 관할 구역인 삼천포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그때는 아직 참배 반대자에 대한 검거 방침이 없었다.

삼천포에서 추방된 조수옥은 부산으로 갔다. 마침 부산 초량교회에서 그를 여전도사로 초청하였다. 초량교회는 1892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의 전도활동으로 설립되었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였다. 1930년대에 500여 신도가 모였고, 50여 명의 권찰과 10여 명의 집사가 있었다. 그곳은 경남의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초량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다가 마산의 문창교회로 옮겨가서 1931년 이약신 목사가 부임해 있었다. 그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812월 경상남도 경찰국에 구인되었고 결국 1939년 사임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양성봉 장로를 중심으로 결속하였고, 후에는 한상동 목사가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조수옥은 19384월에 부임하여 193912월에 사임하였다. 이약신 목사가 사임하자 교역자가 없는 초량교회에서 조수옥이 형사들의 감시 아래 여전도회 청년회, 권찰회, 주일학교, 장년반, 유년반 등 모든 집회를 인도하였다. 밤에는 여자 교인들과 더불어 자주 초량교회 비밀 기도처인 영주동의 산리(山里)기도원 에서 기도하며 신앙의 힘을 얻었다. 그러나 조수옥도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계속 시무할 수는 없었다.

 

2. 신사참배 반대 투쟁

 

1) 1차 체포와 심문

 

조수옥은 어느 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채 호주장로회 한국선교회를 위해 순회 전도사 일을 하게 되었다. 주로 이혜수(Dorty F. Leggatt) 선교사의 일을 도왔다. 19397월 호주 선교회가 설립하여 경영하던 진주 경남성경학교의 폐쇄 소식을 듣고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그전에 조금 다녔던 성경학교에 다닐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학생들은 계속 밤마다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조수옥은 뜻 밖에도 진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연고지인 부산으로 압송되어 북부산경찰서에 감금되었다. 경찰이 백지에 이름을 쓰게 했지만, 그는 백지의 내용이 날조될까 염려하여 쓰기를 거부하였다. 종일 감금되어 있다가 밤이 되어 유도장으로 불려갔다. 유도장은 경찰들의 무도 훈련장으로 체포된 자들에 대한 폭력과 고문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일본도와 죽도가 나란하게 놓인 테이블과 7-8명의 경찰 간부급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자들이 있었다. 당시에 경찰은 순사라고 불렸는데, 한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수옥의 첫 느낌은 오늘 밤 안에 죽게 되는구나였다. 자리에 앉자 순사가 취조를 시작하였다. 낮에처럼 백지에 서명하고 지문을 찍으라고 명령하였다. 순사는 일본의 정책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내용에 서명 날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조수옥은 나는 신사참배에 찬성합니다라는 서명을 하게 될 것 같아 백지에 서명하지 않기로 굳게 다시 다짐하였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13:1)는 말씀을 인용하며 일본의 정책에 반대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순사는 신사참배 거부가 바로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수옥은 신사참배 거부는 일본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순사는 신사참배반대가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수옥은 담대하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답하였다. 경찰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인데 그보다 더 높다는 것인가라고 질문하였다. 조수옥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다음에는 순사가 기독교의 신이 일본의 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일본인이 만든 신에 불과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만들어지지 않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살아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답하였다.

순사는 이어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신성을 계승한 천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조수옥은 천황은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고 답하였다. 이에 순사는 천황이 너와 같은 인간이냐고 물었다. 조수옥은 천황은 일본의 왕이며, 나는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지위는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임에는 틀림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의 지식인도 신앙인도 천황의 신격 주장에 대해 함구하던 때에 조수옥은 분명한 기독교 신관에 따라 소신대로 피력하였다.

순사는 전쟁에 대해서도 물었다. 만주사변 후에 일본은 더욱 군국주의화하여 전선을 넓혀갔고, 193712월에는 중국 남경에서 대학살 사건을, 19387월에는 장고봉 사건을 일으켰다. 19394월에는 중국에서 남으로는 광동, 해남도까지 서쪽으로는 양자강에 이르는 무한까지 진출하였다. 경찰은 조수옥에게 황군이 승리할지 패전할지에 관해서 물었다. 사상을 테스트하여 불경죄로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조수옥은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모른다고 하였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본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는가라는 물음에는 일본이든 어느 나라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대답하였다. 반란 죄를 적용시키기 위한 질문들이었다.

조수옥은 심문을 당하는 동안 신사참배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명령을 내리는 나라는 멸망하리라고 믿었다. 위협과 협박의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정말로 죽는구나!’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간밤에 꾼 꿈으로 인해 염려하지 않고 더욱 강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 꿈에서 순사들이 한 여인에게 칼을 휘두르고 마구 때렸지만, 여인은 쓰러지지 않았고,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손잡이가 붙어 있어서 칼이 등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의 손이 하나님에게 잡혀 있는 이상은 자기를 죽이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무슨 답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않은 것도 마태복음 1019-20절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경찰은 특별 조치가 있을 때까지 귀가해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사참배강요는 더 심해저 갔고 반대 투쟁자도 늘어갔다. 19398월 부산 수영 해수욕장에서 신사참배 거부자들의 모임이 비밀리에 있었다. 그들은 한상동 목사와 그 부인 김차숙, 한정교 목사와 그 부인 이정, 윤술용 목사, 이인재 전도사. 백영옥 집사, 김현숙 전도사. 배학수, 그리고 조수옥이었다. 경찰당국은 이 모임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임은 대체로 낮에는 해수욕을 하고 밤에는 반대투쟁 방법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모임의 취지는 지금까지는 신사참배 반대를 음성적으로 해왔지만,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자는 것이었다.

한상동은 이 자리에서 한국교회가 망하는 단계에 있다고 진단하고 망하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고 용감하게 일어나 신앙으로 무장하고 신령한 영적 전쟁에 임해 죽기까지 싸워 순교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아울러 교인들의 영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고 호소하고, 죽더라도 신사참배는 죄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참석자들은 이에 공감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와 다짐을 하였다.

첫째, 성도들에게 신사에 참배하면 멸망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을지라도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다고 다짐하였다. 둘째,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교회의 예배에 출석하지 말도록 권면한다. 그런 교회는 가미다나(신주)를 마련하여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다이마(大麻)에게 예()를 갖추도록 하고 있고, 일본 국기인 히노마루를 걸어놓은 가운데 기미가요(歌謠, 일본국가로서 천황을 찬양)를 부르고 동방요배(東方遙拜) 혹은 궁성요배(宮城遙拜)하고 나서 예배하고 있었다. 최덕지는 보이지도 않는 천황에게 머리 숙여 경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와도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총독부는 한국의 모든 기독교회들에 대해 결국 구약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사복음서만 사용하게 하였다.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정책에 순응하는 교회를 계시록 29절에 나오는 사탄이 교회로 간주하였다. 셋째, 신사참배를 한 목사가 집전하는 성찬 예식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도 예식에 참여한 자가 집례하는 성찬 예식을 사명을 망각한 자의 의식으로 보고, 그 성찬예식을 인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넷째, 신사참배 한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제가 교회의 애국심을 알아 보기위해 국방헌금을 강요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전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의를 하였다. 또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 구입비로 사용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 외에 주한 선교회들을 통해 외교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세계 국제기구들이 일본정부에 건의 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일본정부에게 알리는 길과 세계교회에 호소하여 일본의 정책이 바뀌는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은 1939323일 일본 중의원(귀족원)에 들어가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19391230일에는 조수옥의 집에 한상동, 이인재가 찾아와 수영 해수욕장 모임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조수옥은 새해가 되자 초량교회를 사면하고, 호주선교회의 순회 전도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밀양과 동해지방을 순회하면서 동지 규합에 힘썼다. 일제는 1940년 창씨개명을 본격화하고 민족말살책을 강화하였다. 한상동, 이인재는 19402월에도 조수옥의 집을 방문하여 이북의 상황을 공유하고 진로를 모색하였다. 조수옥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위한 자금을(24) 전달하기도 하였다.

 

2) 2차 체포와 심문

 

신사참배 반대자에 대한 검거가 19382월 초순부터 시작되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가 구속되었다. 19395월에는 예수천당을 외친 최권능 목사가 구속되었다. 1940년은 일본 기원 2600주년 되는 해로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그해 1월에는 거창의 주남선 목사가 구속되었다. 통영의 최덕지는 6월에, 한상동 목사는 7월에 구속되었다. 조수옥은 이미 언급한대로 920일 새벽 4시에 진주의 경남성경학원 문제로 진주에 있을 때 체포되었다. 이인재에게 24원을 전달한 일도 문제가 되었다. 여수애양원의 손양원은 925일에 체포되었다.

조수옥은 진주에서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의 유치장에 갇혔다. 그곳은 위생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인간으로서 살아갈 용기도, 자존심도, 의욕도, 인격도, 신념이나 정신도 잃어버리도록 불결하게 내버려 두는 곳이었다. 배설물이 방치되어 구더기가 기어오르는 속에서 살아야 하였다. 처음 3일간은 그곳에서 주는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조수옥은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서 기도해야 한다고 자각하였다. 금식기도를 한 지 3일이 지나서는 꽁보리밥을 한 덩어리 먹을 수 있었다.

그는 견디기 힘든 수치심도 극복하였다. 더한층 낮아지는 가운데에서 새 힘을 얻은 것은 북부산 경찰서에서 경남도 경찰국까지 갈 때였다. 분뇨가 묻은 옷에 포승줄에 묵인 채 일반인들이 타는 전차를 타고 가다가 동승했던 승객들이 그를 피하자 멸시와 천대와 수치심에 싸였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 속에서 항상 주님은 인간의 더럽고 부끄럽고 수치스런 사정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온 그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도상의 예수를 기억하면서 주님 나를 살펴보옵소서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때 내 너를 위하여 골고다로...”라는 음성이 머리에 떠올랐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용기를 얻어 수치심과 자존심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 당하심을 확신한 데서 오는 힘이었다.

조수옥은 19401020일 경상남도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옮겨간 도 경찰서의 유치장은 북부산 경찰서 유치장보다 조금은 나았다. 그러나 작은 공간에 변기가 같이 있어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서 한상동 목사도 만났다. 한상동은 결핵으로 인한 안질로 보석 석방이 될 수도 있었다. 경찰은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만 하면 석방해주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한상동은 목사가 죄악을 보면서 죄악이 아니라고 말하면 목사가 아니고, 생명을 위협해도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며 죽이면 죽어야 한다고 대답하여 계속 수감되는 길을 택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전국에서 체포되어 수감된 이들이 몇 명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각 지역 경찰서별로 나누어져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1941711일에는 수감자들이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들 가운데 주기철, 최상림, 최봉석, 주남고(), 한상동, 이광록, 이인재, 이현속, 방계성, 조수옥 등이 있었다. 그곳에서 같은 죄목으로 1호실에 안이숙이 있었고, 3호실에 조수옥이 있었다. 1년 뒤에는 최덕지도 평양으로 이감되었다. 그들은 평양감옥의 신사참배 반대 여성 3인방으로 불리었다. 안이숙은 평안도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조수옥을 형무소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최덕지는 통영 출신으로 조수옥의 연장자였고 신앙적으로도 성경을 기록된 문자대로 실천해야 된다고 믿으면서 해방 후에 재건파에서 활동하였다. 재건파는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만을 주장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한 교회당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는 그런 교회는 마귀당이라고도 하였다. 조수옥은 성경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 옳다고 믿으며, 고려파와 동조하였다.

예심 종결 결정으로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은 21명이었고, 그 가운데 경남 출신은 7명이었다. 평양형무소로 이감된 조수옥은 그곳에서 감옥살이를 계속하였다. 그곳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사상범으로 취급하여 독방에 두었으나, 수감자가 많아지면서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편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일제가 문제 삼은 신학사상은 천년왕국(千年王國)설이었다. 오늘날은 무천년설이 다수에게 호응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가르치고 믿는 신도들이 많았다. 조수옥과 같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사람들의 천년왕국관이 어떠했는지는 이기선 목사의 평양 지방법원 예심종결서에 나타나 있다. 조수옥도 천년왕국에 관한 심문을 받으면서 요한계시록 204절의 저들은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리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천년왕국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천년왕국과 일본제국을 대비시켜서 그들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죄를 적용시켰다. 그런 믿음은 신도들에게 일제 치하의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지만, 일제는 반대자들에게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을 천황제와 대비시켜 치안유지법을 위반죄와 불경죄를 덮어씌우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재림사상을 장로교인들에게 적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조수옥은 어려움을 견디게 해준 것은 천년왕국에서의 왕 노릇 보다 언제나 매순간마다 함께 해주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안이었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만일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이 재림신앙뿐이었다면 박해가 끝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말았을 것이 아니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조수옥은 미래에 천년왕국이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옥중에서도 천국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인해 수감생활을 이길 수 있었다.

 

3) 평양의 수감생활

 

조수옥이 조서 작성을 끝내고 평양으로 이송된 것은 19417월이었다. 경상도에도 법원이 있었는데 평양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죽으러 간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진리를 위해 죽을 것을 이미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마음속에서 평안함을 느꼈다. 평양에 도착한 후 얼마간 경찰서 유치장을 전전하다가 8월이 되자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감방의 하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화장실과 같은 곳에서 대화도 금지된 채 종일 앉아 있다가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이와 벼룩과 빈대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겨울에는 추위를 견디는 것이 큰 고통이었다. 덮고 잔 담요에 아침이면 얼음이 얼어 있었다. 음식은 기름을 짜고 난 콩깻묵이었다.

수감의 어려움을 견디게 한 것은 주님만 믿고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면서 새롭게 받아들이고,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참되고 거룩하다고 믿으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기도한 것이었다. 고난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리라는 임마누엘의 말씀을 의지하였고, 그런 확신으로 인해 영육이 새 힘을 얻고 견딜 수 있었다.

형무소는 신앙의 연단과 교육과 결단의 장소가 되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장소가 되었다. 조수옥은 형무소가 교육기관으로 변하였다고 토로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네 가지를 배웠다. 첫째,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둘째,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체험하였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승화시킨 것이었다. 셋째, 고아를 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합일된 신앙에서 온 것이었다. 감옥에 들어온 고아들을 많이 만나보고 나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도 없는 어린 고아들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껴 출옥하면 그들을 돌보겠다고 결심하였다. 한상동 목사의 경우에는 옥중에서 대다수 교인이 신사참배에 순응하는 것은 신학교육의 잘못이라고 보고 출옥하면 신학교육에 힘쓰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넷째, 돈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판단하였다. 이는 돈이 없어도 죄를 짓고 돈이 많아도 잘못되는 경우를 다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조수옥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큰 계명 두 가지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인식하였다. 감옥에서 부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려는 결심과 노력을 하였다. 평양 감옥에서도 이웃사랑을 실현하였다. 결혼에 실패하고 불우해져서 정신이 이상해진 여인을 돌보았고, 사형 언도를 받은 여인을 자기 방에 오게 하여 사랑을 베풀었다. 먹을 것도 자기 것을 더 주었다. 영적으로도 절망에 빠진 그 여자를 인내심을 갖고 돌봐 주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조수옥은 감옥에서 마음먹었던 것을 출옥 후에 실천하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고아원을 설립하여 평생토록 봉사하였다. 이처럼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사참배 반대와 이웃사랑을 일치시켰다.

 

4)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인식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대한 여러 교단 선교사들의 인식과 태도는 분명하였다. 미국의 남ㆍ북장로교 한국선교회와 호주장로교 한국선교회는 그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신사에 단체로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로서 선교회가 설립한 교육기관을 유지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런 의견을 내는 선교사들은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총독부는 일관되게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미국의 남ㆍ북장로회, 호주장로회와 같은 주한 장로교 선교회들도 총독부의 시책에 강경하게 맞서 자진해서 학교경영을 포기하고 폐교조치를 하였다.

조수옥의 신앙생활의 터전은 경상남도였고, 호주(오스트랠리아)장로교 선교사들의 담당 지역이었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본국 선교부의 재정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선교사들은 진주에 배돈병원을 세웠고, 부산에 일신여학교와 마산에 의신여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남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기독교 개종률이 가장 적는 이유를 보수적인 성향에서 찾는 경우가 있지만, 호주선교부가 다른 선교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지원이 약했던 것에도 한 원인이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주 선교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목적이 민족적, 종교적 지배에 있음을 간파하고 두 번에 걸쳐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였다. 193628일에는 자신들은 천황에 대해서는 존경과 충의를 표하지만, 창조자이자 우주의 통치자이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경배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의 신사참배 행위도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 문서는 내용이 변조된 가운데 상부에 보고되었고, 다른 선교회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여 발표하지 못하게 하는 압력도 받았다. 본국의 선교부는 보고를 받고 현지 선교회에게 타협점을 찾도록 종용하였다. 선교사들은 신사에 가서 참배(Chambae)를 하지 않고 묵도(Meukdo)를 하도록 조정하였다. 학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후에 총독부 당국은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용인한 것처럼 공표하였다. 이에 대해 호주 선교회는 타협을 철회하고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선교회는 20:4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1939110일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행위이므로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고 하는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경남 지역 반대자들에게 영향력이 미쳤다. 최덕지(1901-1956)와 조수옥(1914-2002)의 신사참배 거부도 그 결실이었다. 그러나 호주 선교사들이 개 교회나 신도들에게 반대운동을 펼치게 하려고 앞장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은 대부분 참배하였다. 선교회 경영의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선교사들은 활동에 많은 규제를 받다가 마침내 모두 강제 출국당하였다.

 

4) 해방과 출옥

 

평양 감옥에 수감된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51명으로 알려져 있다. 예심이 종결되었을 때는 21명이었다. 1945817일 밤 11시에 반대자들 가운데 생존한 17명이 동시에 평양감옥에서 출옥하였다. 그들은 누구의 선창인지도 모르게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함께 불렀다. 안이숙의 모친이 마련한 셋집에 모여서 감사 예배도 드렸다. 다음 날은 쉬고 19일에는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를 찾아가 위로하였다. 출옥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 주님의 은혜로 일제 치하에서 승리하게 됨을 간증, 증언하는 일정을 소화하는 일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이미 89일부터 진주하여 미군보다 한 달 앞서서 공산정권의 수립을 획책하고 있었다. 조수옥은 남하를 결심하고 해주에서 선편으로 인천, 서울을 경유하여 10월 말경 부산에 도착하였다.

 

III. 해방 후 신앙과 삶

 

1. 출옥 후의 삶

 

1) 사회사업

 

조수옥은 출옥하여 마산의 문창교회로 돌아왔다. 이약신 목사도 문창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생각한 것이 있었던 데다가 이 목사의 권유를 받아 고아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 목사가 자기 집을 활용하여 즉시 시작하라고 격려도 했다. 조수옥은 이 목사의 부인 이옥경과 함께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름을 희망원이라고 지었다. 희망원은 대한민국 건국 전에 세워진, 소수의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자선사업 기관이었다. 고난을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일을 자유의 몸이 되어 실행한 것이었다.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고아들은 많지만 부모 잃은 어린이들의 복지기관 매우 적었다. 늘어나는 고아들로 인해 이 목사의 사모와 이견이 생겨 조수옥은 19469월 마산의 장군동에 인애원(仁愛院)을 세웠다. 여기에서 출발한 인애원의 활동은 그 역사를 별도로 기술해야 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약자를 위한 그의 봉사는 윤락녀들, 노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더 나아가 1973년에는 경남사회복지교육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봉직하면서 발전시켜 나갔다.

 

2) 교회 봉사

 

조수옥은 문창교회를 떠나 신마산교회, 중부교회, 마산 동부교회의 설립에도 적극 참여하고 평신도로 봉사하였다. 교단의 연합회에서도 계속 봉사하였다. 경남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부회장직을 1962년부터 1982년까지 20여 년간 역임하였고, 1982-1984년 회장직을 맡아 봉사하였다. 대한 예수교장로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199210월 제22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그들의 총회 때 은퇴교역자의 생활관과 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그에게 추진위원장직을 맡겼다. 그는 1996년 완공될 때까지 기금 모금을 비롯한 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3) 일본교회 순방

 

와타나베와의 인연으로 조수옥은 일본교회를 순방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그의 신앙 간증과 신사참배 반대 투쟁 체험에 대한일본교회의 초청 강연은 1988년부터 시작되어 2001년까지 이어졌다. 19888월에는 일본기독교지도자협회의 초청으로 도쿄 지역 5개처에서 도합 600여 명의 청중에게 강연하였다. 199084일에서 16일까지는 아시아, 태평양지역 전쟁희생자들을 기리며 마음에 새기는 모임의 초빙으로 교토와 히로시마 등지에서 총 3000여 청중에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10월에는 종군위안부를 위한 모임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에서 강연하였다. 1992-938월에는 야스쿠니신사 대책 협의회의 초청으로 도쿄와 요코하마, 신주쿠에서 약 550명이 모인 청중에게 강연하였다. 1996년에는 도쿄 일원의 일본기독교개혁파교회 전국모임에서 30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하였다. 1997년에는 큐슈지방 중회, 야스쿠니신사 문제담당 시마다 목사의 초빙으로 500여 청중에게 강연하였다. 1999년에는 일본 JCA’의 요청으로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500여 청중에게 강의하였다. 20014월에는 일본 기독교 총연합회 총회의 요청으로 800여 명의 대표들 앞에서 강연하였다.

조수옥은 일본교회에서 강연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교회와는 다른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자들과도 달랐다. 그는 야스쿠니반대투쟁을 하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반대 투쟁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과거의 신앙체험을 위주로 강연을 하다가 일본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4) 수상

 

조수옥은 일제하에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해방 후 사회사업가로서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 큰일을 감당하였다. 그런 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다. 19865월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19979월에는 일가 김용기 장로기념재단이 수여하는 일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주관한 용신봉사상도 받았다. 2002329일에는 충청남도와 이화여자고등학교와 동아일보가 공동 주관하여 유관순 탄신 100주년을 기린 제1회 유관순상을 수상하였다. 그해 411일에는 스스로 증언한 삶의 기록을 출판하고 기념예배를 드렸다. 그는 유관순 상 수상 인사에서 여생을 사회를 위해 더욱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일치하는 삶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밝힌 것이었다.

 

2. 신앙의 특징

 

2010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개최된 조수옥 기념강좌에서 일본에서 온 유끼신지 목사는 조수옥의 신앙과 삶이란 제하의 강연에서 1) 영적 감각의 예리함, 2)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 자세 3) 일생을 통한 검소한 생활을 특징으로 들었다.

조수옥은 삶의 좌우명을 구약성경에서 찾았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역대하 16:9)이었다. 이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근 5년간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 석방이 되어서는 이웃사랑의 삶을 살았다. ‘인애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윤락녀, 노약자를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연장이었다. 이상규는 그의 정신을 기독교 사랑의 실천으로 보았다.

조수옥의 신사참배 반대도 신앙체험에서 온 깨달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믿음과 행함을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같은 논리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라와 이웃도 사랑하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대동아공영권이란 제국주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국민정신 총동원 훈련의 일환으로 이해하였고, 천조대신보다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믿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수감생활을 감내하였다. 그는 기록된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믿고 행하는 것이 옳다는 성경관을 가졌다. 이런 믿음을 갖고 옥중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짐을 체험했었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견디고 이길 수 있었다. 옥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위배하면 바로 지옥이 시작되는 것을 체험하였다.

조수옥은 자신의 신사참배 반대는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 신사참배에 반대한 주기철, 최상림, 한상동, 이약신의 신앙을 존경하였지만, 그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서 반대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신앙적 관점에서 일본의 1945년 패망을 하나님의 승리로 보았다. 그의 소회는자기와 같이 약한 자라도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믿음의 이적과 역사를 체험하게 되므로 주님을 의지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IV. 신사참배 반대 투쟁과 신앙 운동의 관계

 

신사참배 문제는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한국교회는 왜 일치단결하여 반대하지 못했는가? 신사참배 문제는 무시하고 지나가도 좋은 것인가? 왜 공적인 회개는 거부되었는가? 왜 오늘날도 회개만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가? 결의하고 기도하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닌가? 계율에 얽매였다는 폄하는 타당한 것인가? 출옥성도들은 과연 오만, 교만, 독선적이었는가? 신사참배 거부는 왜 분리주의인가? 고려파는 왜 총회에서 축출되었는가? 고려파는 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하지 않았는가? 다른 일제의 잔재들은 아직도 많이 남이 있는데 유독 신사는 해방 후에 곧 없어졌던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사참배는 강요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한 총독부의 선전은 왜 나왔고 과연 타당한가? 이런 문제들이 아직도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해결해야 할 쟁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교단들이 순응하고 예수교장로회 총회마저 굴복했던 역사적 과오를 해방 후에 인정하고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계는 일치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기존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신학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 일에 대응하는 태도는 크게 아래와 같이 세 갈래로 나뉘어 나타났다.

일제에 굴복한 대다수 교회의 신사참배 행위를 묵인하고 교회를 일제 말 상태 그대로 재건하자는 태도. 이런 태도를 보인 교회정치 수뇌부의 교권주의자들은 암암리에 뒤로 정치 권력과 손잡고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최소한 침묵하였고 더러는 친일하면서 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한 교회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는 태도, 재건파 교회의 최덕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그렇게 살고자 하였고, 기존 교회를 마귀당이라고 하며 정죄하였다. 그러나 조수옥은 재건파와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그는 평양감옥에 함께 수감되었던 최덕지 목사의 신앙은 존경하였지만, 문자적 해석에 얽매어 신사참배를 한 교회와의 관계를 끊자고 한 것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한 죄를 다 같이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한상동의 방법에 조수옥은 이 동조하였다. 출옥성도들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은 일제 말에 전국의 교회들이 신사참배에 결의에 한가지로 반대하지 못하고 의견이 나뉘고 참배했던 것을 다 같이 회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은 빼고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만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 모든 공직자가 다 같이 2개월간 강단에 서지 말고 회개하자는 자숙안을 제시하였다.

일제 말에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고 투쟁했던 이들은 실로 소수였다. 장로회에서만 아니라 일제의 지시로 교단이 폐쇄된 침례교와 성결교에서도 반대자들이 나왔다. 감리회는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했지만, 그곳에도 교회의 수용 방침을 추종하지 않은 신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반대자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도자도 없고 뚜렷한 조직도 없이 각자 기도하는 가운데 판단하고 소신대로 행동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뜻을 통하게 된 이들끼리 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을 하게 된 정도에 불과하였다. 남과 북에 있는 신사참배 반대자들 사이의 연락은 젊은 이인재가 하였다. 생계문제에서 어려움에 봉착한 그들은 서로 도울 길을 모색하였다. 그런 어려움을 보고 몰래 도운 유지들이 생겼다. 그것을 필요한 곳에 배급하는 일은 조수옥이 담당하였다. 총독부 당국은 예심 때 이 문제를 추궁하였지만 모두 함구하여 돈의 움직임을 끝내 밝혀내지 못하였다. 조수옥은 1940년 북부산 경찰서에 수감되었을 때 자기는 반대투쟁자의 반열에 오를 자격도 없다고 하며 겸양을 표하였다. 반대 투쟁을 하였다기보다 그저 반대만 하였다고 하였다. 봉경 이원영 목사, 고흥봉 목사 등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도 더욱더 조용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양태를 보였던 신사참배 반대투쟁이 독립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와 판단에는 문제가 있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체포 투옥되기까지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각자의 내면적인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을 때 각 사람이 가졌던 신앙 자세,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관계, 장로교ㆍ감리교ㆍ성결교 등 교단 간의 관계가 더 철저하게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수옥의 경우를 주목하여 보면,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결과적으로 일제하의 독립운동에도 공헌하였다. 예심 재판에서 취조자가 참배거부를 민족운동이라고 몰아갔을 때는 신앙적인 동기에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조수옥은 신앙을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조선민족에 대한 사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항일 투사들과 신사참배 반대자들 사이에서 어떠한 민족관과 일본관의 차이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일제 말기에 대다수 한국인은 독립을 체념하고 우선 살기 위해 외적으로 친일 성향을 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신앙을 힘입음으로써 끝까지 굴종을 거부하고 민족의 양심을 지킬 수 있었다. 조수옥은 최덕지와 함께 최근 경남도민일보의 한 기사에서 최덕지와 성평등ㆍ민족의식 불씨 지핀 기독교 여성이란 제하에서 소개된 일이 있었다.

조수옥은 출옥 후 인애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적산 가옥을 인수하는 문제로 부산의 경남 경찰국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제 때 조수옥을 취조했던 경찰 국장 강판락이었다. 강판락은 자진해서 주변의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조수옥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 선생님은 여기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분이시다.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여 싸워 우리나라를 독립시킨 위대한 은인이시다라고 소개하였다. 취조했던 자의 심중에 신사참배에 반대한 조수옥은 애국자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5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수옥은 유관순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인사말로 유관순 열사는 신사참배 거부운동 전부터 마음속의 표상으로 삼아 온 분이라고 말하였다. 이 고백은 그의 심적 태도의 애국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표현과 기록을 보더라도 그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수난을 오로지 신앙적인 동기에서만 기인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V. 결론

 

조수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신앙인이었고 애국자였다.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사에 참배하기를 거부하여 26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되었다. 평양 감옥에서 근 5년간, 엄밀히는 410개월 27일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연약한 여성이었지만 강한 신앙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가운데 신앙 안에서 두 계명을 일치시켰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출옥해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였다. 인애원을 설립하여 1700여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노인병원을 세워서 한평생 사회사업가로 살았다. 그는 200210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조수옥은 오늘날 교회가 본래적인 사명과 참된 신앙훈련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신앙을 견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소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초창기 교회의 순수했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수옥의 삶은 귀감이 된다.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 우선적인 동기는 기독교 신앙이었지만, 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는 민족의 양심을 지키는 순기능을 행하였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짓밟는 일제의 국가적, 폭력적인 압박에 저항하는 일이 바로 애국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온전하고 선량한 신앙 양심 위에 선다면 바로 그 순수한 신앙으로 인해 국가에 기여하고 사회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독립 유공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기록과 해석에 따라 선정결과가 달라지고 있지만,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심사하는 일에서도 우선적으로 살필 것은 그들이 과연 외세에 어떠한 자세로 살았는가일 것이다. 굴종하지 않고 민족의 지조를 지켰으며 동족에게 선을 베풀었는가 하는 점이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심군식. 조수옥권사의 생애. 서울: 도서출판 영문, 1997.

이상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회 사업가 조수옥권사”, 고신교회의 여성지도자들. 전국 여신도회연합회, 2014.

_____. 부산지방 기독교전래사. 서울: 글마당, 2001.

이중구. 백합동산 30-전국여전도회3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전국여전도회 연합회, 2002.

조수옥. “나의신사참배반대운동”, 장로교회와 역사. 2(2009),

_____ 증언, 와따나베 노부오(渡辺信夫) 기록, 김산덕 옮김.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서울: 동인, 2002.

  • 도배방지 이미지

신사참배 반대 투쟁, 인애원 관련기사목록
포토뉴스
메인사진 없음
1/4
논문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