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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수 목사의 농촌운동과 신앙

도립운동과 농촌운동가 배민수

최재건 | 기사입력 2022/06/14 [17:30]

배민수 목사의 농촌운동과 신앙

도립운동과 농촌운동가 배민수

최재건 | 입력 : 2022/06/14 [17:30]

배민수 목사의 농촌운동과 신앙

 

 

 

1. 서론

2. 청년ㆍ학창시절과 노선정립

3. 농촌운동

1) 일제하 농촌운동-예수촌 건설

2) 해방 후 농촌운동-금융조합과 식산계 부흥사업

4. 사상과 신앙

1) 삼애사상

2) 농촌운동 신앙 그 나라와 한국농촌

5. 말년의 농촌운동과 삼애정신의 계승

6. 결론

 충북출신 일제하 농촌운동가 고(故) 배민수 목사 50주기 맞아 - 가스펠투데이

1. 서론

 

배민수목사는 성직자로서 농촌운동가이기도 했고 항일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도 했다. 그는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노동 사랑을 외친 삼애주의자였다. 그의 사회활동, 정치활동은 삼애(三愛)의 실현을 위한 농촌운동의 일환이었다. 성직자가 왜 농촌운동가가 되었을까? 그는 어떤 신앙형태를 가졌기에 농촌운동을 하게 되었을까? 그가 벌인 농촌운동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의 사상을 특징짓는 삼애란 무엇인가? 왜 삼애를 부르짖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답하기 위해 그가 펼친 농촌운동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것이었고, 그 신앙적 뒷받침은 어떠했는지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삶과 농촌운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저서들이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가 영문으로 쓴 자서전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을 박노원이 번역한 배민수자서전이 있다. 그의 농촌운동과 신앙과 사상에 관해서는 그 자신이 쓴 그 나라와 한국농촌이 있고, 그가 썼으나 미발표된 글들을 포함하여 방기중이 편찬한 복음주의와 기독교농촌운동이 있다. 방기중의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상은 대표적인 그의 농촌운동 연구서이다. 이 외에도 여러 논문들이 있다.

 

2. 청년ㆍ학창시절과 노선정립

 

배민수 목사는 188618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경주 배씨 배창근(1867-1909)과 모친 장희운(1867-1945)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창근은 대한제국 진위대의 부교였다. 그는 청주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08년에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네 자신의 건강에 유의하여라. 네 어머니를 잘 돌보아드려라.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과 나라를 구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였다. 아버지의 유훈은 배민수의 삶을 한 평생 반일 애족의 나라사랑의 길을 걷게 했다.

배민수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바탕을 이룬 것은 기독교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부친이 의병 활동을 하다가 가세가 기운 것울 계기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살던 집을 팔고 김응삼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김응삼을 통해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밀러(F. S. Miller, 민노아)를 만나 기독교신앙인이 되었다. 부친 배창근이 얼마 후에 순직하는 일을 겪은 배민수는 한평생 기독교 신앙을 갖고 선교사들과 교류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통해 나라사랑을 하는 독특한 성직자의 길을 갔다. 초등교육도 교회가 경영하는 청남학교에서 받았다. 중등교육은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마쳤다. 평양에서 학창생활을 보낼 때, 그 당시에 한국에서 가장 큰 장대재교회를 다니면서 한국 근대교육에 크게 공헌한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선교사 집에 머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해결하고 새로운 서양문물을 익히기도 했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가 도미하여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직자가 된 후에는 한국 농촌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줄기찬 활동을 펼쳤다.

그가 교회와 기독교학교 교육을 통해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는 사랑과 자유와 평등이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인간은 누구나 자유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반상의 차별과 빈부의 차별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그는 민족차별을 겪고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나라를 찾는 일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이었을 때, 상급반에 속한 노덕순, 김치수, 김형직(김일성의 아버지)을 만나 함께 나라 일을 염려하고 기도하며 나라를 찾는 일을 모색하였다. 1915년에는 미국에서 무력항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의 영향을 받은 장인환을 만나 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민회의 조선지부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이 일제의 정보망에 발각되어 배민수는 19181월 말에 1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형기를 마치고 가족이 이사간 함경도의 성진으로 갔다. 거기서 1개월도 못되어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배민수는 그곳에서 강학린 목사를 만나 다른 지역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며칠 뒤에 일경에 체포되어 또 다시 1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난에 대한 묵상과 나라를 위한 충심으로 다른 수감자들이 의아해 할 만큼 감옥의 고통을 의연히 감내하였다. 출옥 후, 1923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개편문제를 다룬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임시정부 내에서 임정 개조를 주장하는 안창호 계열, 만주의 무장세력, 북경의 군사통일회의, 이르쿠츠즈 공산당 연합의 창조파, 상해공산당 연합 개조파, 임정 고수파 등이 대립하여 투쟁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실망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도 반일이라는 공동의 목표아래 같이 있었지만, 이념과 주의의 간극은 깊어 여러 계열 간에 다툼을 보고 귀국을 결단했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숭실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에 민족의 정신적 사표이자 신앙의 사람인, 조만식을 만났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조만식은 산정현교회의 장로였고, “기독교 민족주의 실천관을 내세워 민족혼을 심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에 직접 대항하기보다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으로 실력을 먼저 배양해야 한다고 하는 점진적 실력양성주의를 주장했다. 일제에 정치적으로 직접 투쟁하기보다 민족 내부의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고 구체적으로 실생활의 향상과 물산장려라는 민족 경제의 자립운동을 펼쳤다. 실천방안으로서 소극적인 면에서는 생활개선 운동을. 적극적인 면에서는 산업진흥운동과 교육개선운동을 강조했다. 조만식은 민족의 경제적 빈곤문제를 주시하여 그 빈곤의 중심을 이룬 것은 농촌의 농민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의 참 신앙은 내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민족과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농촌운동이 복음운동과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배민수는 두 번에 걸친 감옥생활을 통해 무력적인 항일만이 나라사랑의 길이 아니라고 깨닫았다. 새로운 항릴 투쟁방식을 모색하던 중에 조만식이 일상적인 삶에서 그런 목표를 실천해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무력항쟁보다 실력양성과 무저항주의를 지향하게 된 그는 조만식은 물론 안창호의 무실역행주의 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지상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신학적인 입장을 갖게 된 사실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넘어 사회현실과 실생활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 배민수는 그 후에 인구의 80%가 넘는 농촌에서 실력양성의 이상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농촌의 빈곤문제 해결을 우선책으로 하고, 나아가서 농촌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농촌복음화, 농민의 교화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농민의 물질적인 구원은 복음화의 실현수단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주의 교육과 이 이념에 기반한 공동체인 예수촌 건설을 목표로 하는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영과 육을 동시에 구하는 지상천국 운동이자 복음주의 기독교 이상의 실천 방안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가장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길이라고 여기고 이런 농촌운동에 매진했다.

 

4. 농촌운동

 

농촌문제는 1920년대 이후에 세계 기독교계의 관심였다.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모인 국제 선교대회에서도 농촌문제가 주요 주제가 되었다. 이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앞서 콜럼비아대학의 사회학자 부룬너(E. S. Brunner)가 한국에 와서 둘러본 후, “조선농촌사회의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여 예루살렘 대회에 제출했다. 이 선교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했던, 신흥우, 홍병선, 김활란 등은 YMCA, YWCA를 중심으로 농촌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는 장로교회의 유일한 대표로 그 대회에 참석했던 정인과의 건의에 따라 1928년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기독교 농촌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일에 배민수, 유재기 등이 관여했다. 이 조직은 농촌의 경제적 자립을 기초로 한 예수촌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일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기독교 협동조합을 건설하는 기독교 농우회 조직론을 제기하고 농민생활이란 잡지도 간행키로했다. 그들은 농촌의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나라의 독립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빈민구제와 빈민의 복음화를 목표로 한 이상주의적인 현실사회 개조방안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공황,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 자체적인 교육기관과 인적ㆍ재정적인 지원의 부재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 일제하 농촌운동-예수촌 건설

이러한 이상을 품은 배민수는 신학적인 무장을 위해 1930년에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층 깊은 공부하기를 계획하고, 1931년 시카고의 매코믹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에 미국에서는 경제공황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신학적으로 라우센부시(W. Raushenbush)의 사회 복음주의가 크게 호응을 받고 있었다.

배민수는 사회복지, 경제, 인종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학생들과 토론했다. 1932년에는 기독인 협력 친우회(Cooperative Christian Fellowship)”란 학생단체에 가입하여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와 실천방안을 강구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을 모토로 삼고 (1) 신조 일치, (2) 인종간 형제화, (3) 사회경제 부흥을 실천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농촌운동에 대한 꿈을 더 구체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민족, 인종, 국가를 뛰어 넘는 기독교의 사해동포주의에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아울러 신학적인 면에서도 복음주의의 실천적인 관점, 기독교 보편주의를 자각하게 되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예수의 재림, 최후의 심판을 확신하는 종말관을 확신케 되었다. 이 종말관이 사회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세계 구원의 길로 지상천국론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내세에만 있지 않고 지상천국의 건설이 그 시작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천국관은 예수의 재림과 심판을 확신하는 종말론의 토대 위에 있었다. 종말에 처한 현세를 구원할 실천 경로는 지상천국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다.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물질생활이 아닌 정신적, 영적, 내세적 방면에 있지만,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 지상천국을 이루어 예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빈민대중의 구원이 지상천국 건설의 기본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는 요체라고 보았다. 말세에 고통 받는 빈민대중의 현실을 묵과하고는 복음이 무의미해지고 효과도 없게 되기 때문에 빈민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을 경제적인 빈곤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1933년에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농촌운동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기독교농촌연구회” (The Christian Rural Research Association)를 다시 조직하고 활성화시켰다. 이 단체는 도미 전에 그가 유재기 목사 등과 조직했던 것이었다. 이 일에 조만식 선생을 비롯하여 박학전, 김성원, 정인과, 매큔 선교사, 숭실대학의 농업경제학자인 이훈구 등 농촌문제 최고의 권위자들이 동조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목적은 (1)조선의 전반적인 농촌문제 연구, (2) 기독주의 농촌사업 실현 (3) 회원양성과 실제 사업투신이었다.

1933년 선천에서 모인 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그는 농촌부 총무로 선임되어 명실공이 한국농촌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기존의 농촌운동과 그의 생각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사회복음, 한국의 농촌운동에 새로운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현을 위해 승낙했다. 총회의 농촌부는 그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총회가 간행한 농민생활이란 잡지 외에 농촌통신이란 기관지까지 발행하며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1933111일에 배민수를 비롯한 일련의 인물들은 총회 농촌부 상설기관 설치에 제하야라는 고시문을 발표하며 의욕에 찬 이상적인 예수촌 건설을 주창했다. 농촌운동의 목표는 예수의 정신, 곧 기독주의로 돌아가 조선백성을 살리고 세계를 구원하며 예수의 사명과 행적을 농촌에 실현하여 영적생활과 물질생활을 동시에 책임지는 예수촌을 건설함으로써 이 땅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 영원한 천국복음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예수촌 건설의 핵심은 한마디로 표준적 물질생활이었다. 현실사회 소유관계의 엄청난 불평등구조의 해결책 제시가 바로 복음주의 기독정신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조직적 협동생활을 이루고 이를 통해서 농촌 조직화를 이루자는 것이 그 실천원리였다. 이 예수촌 건설을 위한 기초 사업은 4가지 방향으로 전개했다. (1) 협동조합운동 (2) 농촌지도자 양성 (3) 농촌수양회 활동 (4) 이론 선전운동 등이었다.

그가 구상한 예수촌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건전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정신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어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며 육적으로 배고픔이 없는 복락을 누리는 모범촌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개인주의의 소유욕에서 벗어나 표준적인 물질 생활정신적인 경제생활을 하는 상보상조적인 경제공동체와 신앙공동체였다. 그리스도의 박애와 희생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거하여 토지 소유관계를 실현하는 자립적인 기독교 농촌공동체였고, 그 조직원리와 경제이념은 기독교 협동조합주의였다. 그의 강조점은 농민들의 개별적인 물질적 풍요 추구가 아니라 농촌 마을들이 공동체적인 협동생활을 이룩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우선 생산자와 직거래로 중간 상인의 모리행위를 철폐하기 위해 조합이 직접 분배정의를 실현할 협동조합 같은 기구가 필요하고 그 바탕은 기독교 정신이어야 하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라기보다 이미 알려진 덴마크의 농촌운동가인 그룬트비히의 애신, 애인, 애토의 삼애주의에 입각한 농촌 지도자 양성, 존 내 목사의 유토피아적 예수촌 건설 운동, 일본의 기독교사회운동가인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言,1888-1960)의 하나님나라운동과 애의 사회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기독교 공동체 구성안은 100여 호의 단위로 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에 각 농가가 5-6천 평의 토지를 자작하고, 생산ㆍ소비ㆍ신용조합을 조직하여 경제생활을 효율적으로 하고, 학교, 교회, 이발소 등을 갖추어 이상촌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민족문제ㆍ정치적 문제 속에서 농가당 5-6천 평의 토지를 갖게 하는 일에서부터 현실성과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는 협동조합의 구성 다음으로 농촌지도자의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그 부락을 지도할 인물은 반드시 그 부락 출신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지역의 사정과 사람들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성공을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전국에 사만 오천여 마을이 있으므로 구만 명의 남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파악했다. 그는 각도마다 강습소를 세우고 매회 100명을 일 개월씩 연 10회 강습하면 4년 만에 지도자 양성이 가능하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었으므로 여름 기간에 40일간 연수하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346월말부터 81일까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이란 주제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서 개최된 연수회에서 43명의 지도자가 처음 배출되었다. 그 후 배민수는 농한기인 11월 중순경에 5일 동안 집중적인 수련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모일 때 마다 작게는 100여 명이 많게는 400여 명이 참여 했다.

그는 1936년 기독교보에 기독교 농촌운동의 지도원리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반공주의자였으므로 당시 사회가 경제문제로 공산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농촌의 피폐를 초래한 한 요인이 이윤추구와 분배모순 등 자본주의 체제의 맹점에 있다고 보았고, 특히 일제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박애정신이 이를 보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소외당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더한층 넓혀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이대위 목사를 비롯한 당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숭실학교 때부터 빈부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빈민들의 모습을 보고 전국적으로 빈부의 차별이 너무 심한 사실에 고뇌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학생이었을 때 기생집으로 팔려간 소녀를 구하려고 했다가 빈곤과 무지의 문제에 도전을 받았다.

배민수의 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촌부 총무의 일은 1937년에 농촌부가 폐지되면서 막을 내렸다. 재정적으로 경제공황으로 미국교회로부터 도움받기가 어려워졌고, 교회 안에서 교회가 농촌운동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개인적으로 1938년에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던 배민수는 유재기, 송영길, 김철훈과 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에 계속 진력하고자 했으나 독립위장 단체로 지목되자 밀러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도미하여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농촌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내세우며 농민들에 대한 효율적인 농사법의 교육을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민수는 농촌부 총무로서 세 가지 일을 이루었다. 첫째는 고등농사 학원을 중심한 농촌지도자 양성이었다. 각 지역노회에서 추천한 청년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3년간 49명의 농촌지도자를 양성했다. 둘째는 농촌수양회였다. 전국의 농촌을 순회하며 노회와 교회 중심으로 농사지도, 협동조합지도, 전도활동을 수행했다. 셋째는 각지에 있는 교회 농촌사업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교회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만들고 공동경작, 공동노동, 공동생산의 훈련을 쌓게 했다.

미국에 망명해서는 미국 전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의 집회나 수련회에서 강연하고 설교를 하는 순회 목회자의 활동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을 상대로 1300여회나 강연하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연구하는 시간도 가졌다. 1948년 매카레스터 대학에서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차 대전 말기에는 미군을 위해 일본어 편지 검열관의 역할을 했다. 한편 뉴욕에 체류할 때는 이승만 박사와 관련이 있는 뉴욕한인교회를 잠시 담임하기도 했다.

 

2) 해방 후 농촌운동-금융조합과 식산계 부흥사업

이차 세계대전 후 미군정 시기에는 남원 일대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는 일에 통역관으로 공헌했다. 이 일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테러의 대상이 되어 국내 체류를 못하고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625 동란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해외로 빠져나가려 하던 때에 그는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란에 휩싸인 고국에 돌아온 그는 1951년에는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를 창설하고 농민생활이란 월간 잡지를 간행하면서 옛 농촌운동의 불을 지펴나갔다.

그의 기독교 농촌운동은 해방 전의 것과 다소 달라졌다. “예수촌 건설에서 현실 사회체제와 밀접한 기독교 모범농촌 건설론으로 바뀌었다. 농가 300호를 구()라는 단위로 조직한 대규모 농촌 부락을 근간 단위로 했다. 구 단위의 모범농촌은 다시 조()와 반()으로 하부조직을 갖추게 했다. 농가 5호를 1반으로 묶고 10반을 1조로 하고 6조가 한 구가 되도록 조직하는 것이었다. 모범 농촌에는 교회, 학교, 의료소, 협동조합, 이발소, 세탁소, 탁아소 등의 시설을 갖추고 운영은 소비조합 같은 협동조합을 통해서 하도록 했다. 농업기술의 개발을 위해 작물, 원예, 축산 임업 등으로 나누어 각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농사의 품목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또 일상생활 면에서도 식당, 화장실 같은 주거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음식, 의복의 개량, 위생 등 상론하였다. 실천방안으로서 각 부락을 이끌어갈 기독교 농촌지도자 양성방안인 중앙기독교농민학원 설립안을 제시하였다. 이 안은 1950년대 전쟁 후의 농촌사회에 대한 개선책이였으므로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거리가 있다. 방기중은 체제유지용이라고 비판했다.

배민수가 1953년에 금융조합연합회(현 농협중앙회)회장에 취임함으로써 그의 농촌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식산계 부흥사업(殖産契 復興事業)을 펼쳤다. 이는 금융조합의 농촌 말단조직인 부락 식산계를 모법농촌으로 만들어 농촌을 부흥케 하고 협동조합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반 강제적인 현물 저축운동을 실시하고 영농자금의 집단 융자 방식을 채택하게 했다. 이를 위해 식산계 지도자를 양성하는 지도자 교육사업을 전개시켰다. 금융조합의 영농지도자와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농촌지도자들을 교육하고 농촌부락을 협동조합화 하는 식산계 부흥사업은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새농민이란 잡지도 간행하여 농촌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농촌운동은 전쟁상황으로 인해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얻어내지 못했고 전후의 농촌 현실이 너무 열악하여 농민자본을 끌어낼 수도 없었다. 구조적인 영농개혁이 아니었고 개량적인 농촌사업이었던 데다가 미국 잉여농산물의 유입으로 애초의 거대한 계획은 자동폐기나 다름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배민수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창당에 관여하여 15인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식산계 부흥운동을 통해 부통령이 되려한다는 풍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그가 이기붕의 세력에 밀려 모든 공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전후 정주 기구를 통한 농촌운동은 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4. 사상과 신앙

 

1) 삼애사상

 

그의 삼애사상은 이미 언급한대로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노동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실천방법이라 확신하고 이 바탕 위에 나아갈 세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자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분이 명하신 도리에 순복하고 실천하여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을 뜻했다. 그는 그 도리를 따라 사람을 사랑할 때 활로가 열린 된다고 보았다.

다음에는 이를 바탕으로 농촌을 사랑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은 80% 이상이 농민이었고 식량난으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촌의 흙을 사랑하고, 전답을 사랑하고, 산과 들의 자연과 경치를 사랑하고, 기후와 풍토를 사랑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농촌을 사랑하면 농민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농민이 잘 살게 될 것이고, 나아가 온 백성이 다 잘살게 될 것이었다. 농민을 일깨우고 교육하고 열심히 일해서 잘 살게 하는 것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을 사랑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내가 수고하여 남을 돕고 나의 노동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숭고한 정신으로 살면 한국농촌이 변화되고 민족의 진로도 바르게 열릴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었다. 기독교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기적만 바라지 말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안하면서 하늘만 처다 보는 것은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2) 농촌운동 신앙 그 나라와 한국농촌

 

1958년에 간행된 그 나라와 한국농촌은 배민수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기본전제 아래 현세 천국의 의미와 기독교이념의 역사성과 현실성, 말세와 현세의 지상천국 건설의 시급성을 논하면서 기독교 농촌운동이 천국의 시민운동이 되는 신학적 원리와 실천적 의미를 밝히려 했다. 그의 지상 천국론은 광신주의나 신비주의 및 공산주의의 세계관과는 다른 보편적이고 사회적 실천성을 갖는 신학적인 논거로서 제시되었다. 그는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십자가에서 무고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예수의 희생정신을 본받으면 개인적인 욕망은 물론 인종, 국경, 계급, 혈연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말구유란 비천한데서 태어나셨듯이 천국은 비천한데서 시작 된다고 믿었다.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이 가질 자세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 한분만을 섬기며 주님의 뜻을 조금씩 채워 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같이 한국농촌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추구할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런 믿음 속에서 교계나 정계에서 상류층으로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가난하다 못해 비참한 한국농촌을 마음의 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 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그는 천국운동이라는 기독교신앙의 토대위에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농민들의 영혼이 잘되는 농촌운동을 펼쳣다. 그가 강조한 자주, 평등, 상호부조의 기독교 농촌운동의 출발점은 하나님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확신한 그는 누누이 십자가의 정신을 강조했다. 십자가 정신은 그의 애국정신의 바탕이 되었고, 현세적인 하나님나라 실현운동의 배경이 되었고, 삼애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첫째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정신, 둘째로 자기를 낮추고 남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정신, 셋째 참을 숭상하고 신용을 회복하며 정직한 언행과 생활을 하는 정신이었다.

 

5. 말년의 농촌운동과 삼애정신의 계승

 

배민수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사적으로 다시 농촌운동을 시작하여 1956년에 대전에 기독교 농민학원을 설립했다. 5.16 , 한때 군사정권이 실시한 농촌운동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1964년에는 이 농민학원에서 분규가 일어나 별도로 대전 기독교여자농민학원을 설립했다.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1966년에는 일산에 삼애농업기술학원 및 삼애 실업학교를 설립하여 농촌지도자 양성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1968825, 바라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배민수의 삶과 정신은 세상에 뒤늦게 알려졌다. 1993815일에 부친과 더불어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배민수 사후에 부인 최순옥 여사와 유족 및 한경직, 방지일 목사 등으로 구성된 그의 유산 관리위원회는 일산에 있던 56,000여 평의 삼애실업학교 대지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했다. 그 땅의 시가를 환산해 보면 연세대학교에 기증한 어떤 개인보다 가장 고액의 기부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연세동문이 아니고 숭실 출신인 자가 한국사회의 변화와 지상천국의 실현을 바라는 대승적인 비전을 가지고 기증한 것이었다. 연세대학교는 농업개발원, 낙농학과 등을 설치하여 배민수 목사의 농촌운동의 유지를 이어왔다. 또한 삼애교회를 설립하여 그의 신앙의 영성을 계승하고 있다. 아울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격년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학술강좌를 개최하고,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부담하는 삼애장학금으로 박사과정을 개설하여 국내외에서 선발된 학생들을 통해 그의 정신이 계승되게 하고 있다.

 

6. 결론

 

배민수는 평생토록 인간은 자유롭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믿음 위에서 일제 때부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농촌운동을 펼쳤다. 그는 종말신앙에서 비롯된 책임의식을 지닌 목회자로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가 연결된 삶을 살았다. 한국의 농촌문제를 기독교신앙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십자가 정신을 내세우며 한평생 노력했다. 이처럼 초지를 꺾지 않고 성심껏 노력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본을 보임으로써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농촌운동 사상은 독창적이라기보다 조만식의 사상, 미국의 애미쉬 공동체, 이스라엘의 기브츠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외친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노동 사랑의 삼애정신도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나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독교인이 되어 하나님사랑으로 확대시켰고, 하나님사랑이 곧 이웃사랑이란 것을 깨달아 하나님사랑을 농촌사랑과 노동사랑으로 구체화시켰고, 이러한 기독교적, 애국적인 사랑의 실천운동인 농촌운동에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 땅에서 이룩할 지상천국운동이란 신학적 뼈대를 더했다.

 

그는 하나님나라와 자본주의를 논하는 거시적인 안목, 금융조합, 협동조합에 대한 정책적인 안목, 농가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개선책을 강구하는 미시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복음주의 이념은 빈민구원과 지상천국 건설이란 지향하며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개조를 논하여 기독교 사회주의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의식도 공존시켜 자유민주주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그의 농촌운동은 큰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가 체제에 순응하고 반대세력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간혹 비판을 받는다. 그는 사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체제나 이념문제보다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에 따라 평생토록 농촌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상가라기보다 실천운동가였다. 그가 고뇌하며 해결하려 애쓰던 농촌개선 문제는 산업사회화 한 지금의 상황에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꿈꾼 지상천국 건설의 과제는 바로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이 이어서 풀어가야 할 현 시대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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