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A. 로즈(Harry A. Rhodes, 盧解理-魯解理)
해리 A. 로즈(Harry A. Rhodes, 盧解理-魯解理, 1875-1965)선교사는 1875년 9월 1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이스트브룩(East Brook)에서 출생하였다. 자라난 교단은 북 장로교 소속이었다. 1903년 같은 주에 소재한 그로브시티대학(Grove City College)을 졸업하고, 1903-06년에 프린스턴대학원 석사과정과 프린스턴신학교를 다니고 같은 해에 두 학교를 졸업하였다. 1904-05년 한 해 동안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에서도 수학하였다. 선교사가 된 후에도 안식년을 맞으면 미국에서 연구와 년장 교육을 받았다. 비블리컬신학교(Biblical Theological Seminary), 콜럼비아대학의 티처스컬리지(Teacher’s College, Columbia University), 유니온신학교(Union Seminary)와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였다. 로즈는 1906, 9, 19에는 북 장로회에서 목사로 장립되었다. 1906-0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크로스크릭(Cross Creek) 장로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크로스크릭 교회는 안정적으로 목회할 수 있었지만,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졌다. 1902년 3월 토론토에서 열린 학생선교자원운동 대회에서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에 대한 전언이 계기가 되었다.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핼시(A. W.Halsey) 박사와 진로를 상의하였고, 해외선교부는 새로 조직되는 강계지회에서 활동하도록 추천하였다. 로즈는 마침내 1908년 부인(Edith Brown, 1906년 결혼)과 함께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로즈는 1908년 7월 9일에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한국에 도착했다. 1909-1910기간에는 평양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았다. 이어 평안북도 강계(1910-1916)와 선천(1916-1917)의 북장로교 선교지회들에서 활동하였다. 강계지회는 선천지회의 주도로 1909년에 신설되어 조직을 비롯하여 원활한 활동에 아직 제한이 많았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지역이어서 교통편도 여의치 않았다. 가끔 뗏목과 썰매로 압록강 유역과 평북 북부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했다. 강계에서 신의주까지는 천리길이었다. 1913년경부터는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을 위해 선교여정도 빈번하였다. 로즈는 클라크(C. A. Clark, 郭安連), 호프만(C. S. Hoffman, 咸嘉倫)과 함께 성경연구반을 조직하고 중국교회 예배당을 빌려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144명에게 세례도 베풀었다. 1914년 11월에도 같은 지역을 순회하며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로즈는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에 만주로의 기독교 전파가 중요한 점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선교지역이 확장되고 남만주ㆍ북만주ㆍ동만주노회가 설립되었다. 첫 안식년을 맞기 까지 1909년에서 1916년까지의 활동상은 왕성하였다. 70여 교회를 순방하고 7-10일간씩 계속된 성경공부반을 28회, 2개월씩 공부하는 성경학교를 8차례, 5일 씩하는 제직반을 7회, 6개월 간 하는 사범반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250회의 한국어 설교와 50여 차례 영어 설교도 했다. 841명에게 장년 세례와 121명의 유아세례 및 74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간 선교여행 은 30,000 리나 되었다. 7차례 압록강을 오르내리고 여름에는 당나귀, 겨울에는 썰매도 이용했다. 연례 선교사 모임에 참석한 여행도 1000마일이나 되었다. 첫 번째 안식년 후에 1917년 9월부터 1918년 3월까지 6개월간 48개 교회의 당회장으로서 평안북도 선천, 구성, 장성, 동신의주 등 70여 개 교회를 순회하며 92차례 설교하고, 26회 성만찬을 집례하며, 23회 기도회를 인도하고, 13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로즈는 1918년 4월에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해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장로교한국선교회는 그의 서울 전임을 반대하였다. 그 당시 한국선교회의 다수를 이룬 평양측 선교사들은 사립학교의 기독교교육을 견제하는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 하에서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도록 미국의 해외선교부가 인정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로즈의 개인적인 선교활동 역량이 돋보였던 점도 타 지역 인력수급의 차질을 우려한 주한 선교사들이 그의 서울 이전을 반대한 요인이 었다. 로즈는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8년 4월에 연희전문학교에 부임하였다. 주된 사역은 학원선교였다. 한양, 파주, 동막의 교회들을 돌보며 신촌 대현교회의 당회장 직도 수행하였다. 연희전문 안에서 설립이사, 이사, 학감(1921-1922), 초대신학과장을 역임하였다. 무엇보다 총독부의 사학법 하에서 정규교과로서의 성경교육과 채플운영은 불가능했지만, 이 대학의 종교교육 담당자로서 신학과를 통해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일들을 수행하여 학교의 정체성 수립의 기틀을 다졌다. 종교교육 외에 영어과목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8-1924 까지 232번의 한국어 설교와 31회의 영어설교를 했고 청중은 33,800명이었다. 교회의 기관장 모임에 187회 참석했고 45회의 성찬 집례를 했다. 매주 13회의 성경공부 인도와 한달간 계속되는 3개의 성경학교를 인도했다. 위원회 모임132차례, 선교사 모임에 210회 참석했다. 171차례의 교수회의도 있었다. 59회의 선교지회 모임, 10번은 노회, 4회의 공의회(Federal Council) 그리고 두 번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했다. 58차례 채플에서 설교했고 56회의 기도회를 인도했다. 주일학교에서도 53차례 가르쳤다. 이 기간의 여정은 3,710마일이었다. 1924-1925년에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성지와 프랑스 등으로 세계여행을 하였다. 모교인 그로브시티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0개 주 50여 도시의 59개 교회에서 107회의 강연 및 설교를 통해 한국선교 사역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귀임 후에도 3번째 안식년인 1932년까지 연희전문에서 계속 봉직하였다. 이 기간에 백낙준 박사가 교수로 합류하여 로즈가 담당한 성경, 채플 등의 종교활동을 도왔다. 이 일 위해 로즈는 펜실베이니아의 타운센트(W. S. Townsend)로 부터 $1,500를 기부 받아 백 박사의 연봉을 확보하였다. 그 외에도 30명의 개인과 약 10개 교회들로부터 $11,500 지원을 받았다. 그가 은퇴할 때 연전에 등록된 학생은 총 2,500명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150차례 한국어 설교를 했고 청중은 대략 12,125명이었다. 13회의 영어설교와 89차례의 주일학교에서도 가르쳤다. 23회의 기도회를 인도하였고, 4번에 걸쳐 일주일간 계속하는 성경공부반을 지도했다. 임직원 모임 97회, 한국인과의 위원회129회, 선교사회의225회, 교수회의 참석65회, 선교지회 출석60회, 성찬예식 인도 31회, 노회참석 11회, 총회 출석3회, 공의회 참석 2회, 한국교회협의회 출석 4회였다. 이 기간 동안 여정은 걸어서 415마일, 기차여행 8,000마일, 그리고 자동차여행도 5,350마일이나 하였다. 학원선교 활동 외에 서울 서부지역의 15곳을 돌면서 교회를 보살피며 일선 선교사의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실행위원회(위원장 허대전, J. Gorden Holdcroft)에 임명되어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다른 중요한 공적은 언더우드를 도와 교파연합운동을 적극 찬동하고 감리교 대표들과 함께 일선에서 활동했다.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출판, 문화 분야에서 괄목한 활동을 한 것도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1921년에 당시의 유일한 교계신문인 『基督申報』 사장직을 맡았고, 1922년 후에는 조선예수교서회 편집위원과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장도 역임하였다. 1932- 1933년까지의 안식년에는 프린스톤에 머물렀다. 36개주, 9개 도시의 47개 교회나 강당에서 53회의 강연과 설교를 했고 청중은 10,595명이었다. 안식년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올 때는 3명의 자녀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여 두부부만 돌아왔다. 연전을 떠난 후에도 1918, 1936-37, 1939 이사로 봉직하면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가 이사로 있었던 전체 기간은 1918년, 1936-37년, 1939년이었다. 그의 부인(Edith Brown Rhodes)도 음악교수로 봉직하며 연세 음대의 초석을 놓는데 일조하였고, 한국의 서양음악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녀도 “The Possibilities of the Choir”를 비롯한 몇 편의 글을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하였다. 로즈는 한국교회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한국선교 50주년 기념행사준비위원회(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Committee)의 6인중 1인이자 조사· 확인위원회(Findings Committee)의 8인 중 1인으로서 한국선교 희년인 1934년에 미국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간행 책임자가 되어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를 저술하고 출간하였다. 이 저작은 그때까지 한국선교에 대한 종합보고서의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도 희년기념대회 문집을 간행할 때에도 서문을 리차드 베어드와 함께 썼고, 본문의 한 항목인 “Fifty Years of Christian Literature in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를 집필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제가 미국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했던 때에 로즈는 네 번째 안식년(1940-1941)과 겹쳐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미국에 체류하던 로즈는 해방되던 1945년 9월 11일에 70세를 맞았다. 그는 한국선교사로 귀임할 것을 염두에 두어 항구적인 직책을 구하지 않고 1942부터 1951년까지 뉴욕 주의 로물르스와 카노가, 플로리다의 서머나 비치, 캘리포니아의 피스모 비치, 뉴저지의 윌우드, 웨스트버지니아의 레이븐우드에서 임시목사로 봉직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 로즈는 1946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북장로회 선교 재개를 위한 조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기독교서회 평생회원으로 의촉 받고 출판문화의 발전과 향상에 기여하였다. 1947년 8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1950년까지 뉴욕과 펜실베이니아 주의 여러 교회에서 임시 목사직을 수행했고, 1951년에 선교사직을 완전히 은퇴하였다. 1951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여 샌 마리노교회(The Community Presbyterian Church of San Marino)에서 1955년까지 선교목사로 봉사하였다. 또한 그간의 한국선교를 돌아보고 자료들을 정리하여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935-1959를 집필하여 1965년에 출간하였고 1965년 6월 16일에 별세하였다.
저술 활동
1) 교회사ㆍ신학 저술 로즈는 한국기독교회사 관련 저작에 공헌했다. 1933년에 『조선긔독교회략사』란 한국교회 역사를 한글로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비록 소책자이기는 했지만, 에큐메니즘에 입각하여 개신교사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가톨의 전래와 박해에 관한 내용까지 담아 한국그리스도교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서가 되었다. 이 소책자는 한글로 된 최초의 한국교회사로서 일반신도들에게도 많이 읽혔다. 1960년대 이후의 한국기독교회사 소형 문고본의 한 모델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1934년에 간행된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회사』였다. 그는 북장로교 한국선교회가 그 해에 선교활동 50주년(희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여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 (Seoul: Chose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를 저술하였다. 은퇴한 후에도 아치발드 캠벨과 함께 History of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ume II, 1935-1959 (Seoul: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65)를 간행하였다. 이 두 책에서 그는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을 반영하는 형태로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소상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전자의 책을 쓸 때는 선교회로부터 위촉받은 대표 집필자로서 연례보고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각종보고서, 회의록, 저서, 저널 기사 등을 두루 살펴 역사적으로 종합 정리하였다. 사진 자료들도 깃들여 더한층 가치를 높였다. 저술과정에서 한국교회사는 백낙준의 조언과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을 많이 참조하였다. 한국사 분야에서는 게일의 History of Korean People이었다. 특히 1권에서 ‘대학문제’(College Question)란 용어가 창출 될 정도로 한국선교회사상 가장 논쟁이 심했고 오래 지속되었던 연희전문학교 설립문제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연세대학교 설립 전사를 이해하고 미국선교부와 한국선교회의 의견의 차이와 변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로즈는 그 외에도 『오경문답』(1923), 『모압녀인 룻』(1931)을 저술하였고 『인물설교십강』(1933), 『성경고유인명사전』(1937), 『성경요람』(1940) 등의 번역서적도 출간하였다. 또한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의 저널에도 총52편의 글을 남겼고, 『神學指南』, 『神學世界』에도 많은 글을 남겼다. 『성지순례』(Travels in Bible Lands)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그의 논저의 성향은, 포괄적인 통찰력으로 교회연합운동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한국교회가 처음 조직화를 이룰 때 교파의 벽을 넘어 단일교회를 설립하지 못한 사실을 비판하였다. ‘대학 설립문제’한국천주교회, 감리교회를 아우른 그의 『조선긔독교회략사』 기술에서도 에큐메니컬적인 입장이었다. 주었다.
2) 연희전문 관련 논저 로즈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곳은 연희전문학교였다. 그는 대학설립 문제가 오랜 논쟁 끝에 서울측의 뜻대로 결정 되었을 때 한국의 온 기독교인들에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찬사를 보냈다.(KMF, 1915,3) 그 후 학감(1919-1921)과 초대 신학과장으로서 성경교육과 채플운영을 주도하여 학교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에 기여하였다. 총독부의 방침은 종교교육을 위해 정규 시간을 쓰지 못하고 비정규 시간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신과를 담당한 로즈는 미국에 있는 여러 신학교들의 커리큘럼과 중국과 일본에서 새로 시작된 신학교들의 교과목들을 참조하여 과목을 편성하였다. 미국에서는 신학교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일반적으로 대학졸업자를 학생으로 선발하여 학부대학 안에 신학과가 있는 경우는 없었다. 연전의 신학과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총독부 규정 안에서 종교교육을 시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따라서 신학과의 성경과목은 신학과가 아닌 대학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학생들의 신학교 진학과 교회봉사ㆍ전도활동 활용을 돕기 위해 실시되었다. 성경과목은 아래사항에 준하여 개설되었다.
1) 인문학에 준하는 과정으로 신학과에서 4년 동안 매주 5시간 이수하도록 마련되었다. 2) 모든 학생들에게 초교과정으로 택하도록 마련되었다. 3) 선교반이나 신학과정을 위해 성경을 주제로 한 강좌를 준비하였다. 4) 채플, YMCA, 교회의 성경공부, 전도 등 직접적인 종교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5) 목회 활동에 관심을 가진 자와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진 자를 위함이었다.
성경과목은 전교생이 매주 2시간씩 4년 동안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하였다. 채플은 매주 5번 모두 참석해야 하였고, 매일 30분 동안 진행되게 하였다. 1919년에 발표한 연전 학생들의 종교 활동 통계는 초기의 한국 고등교육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데이터이다. 학생들의 과반수가 결혼을 하였고 자녀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63명 중 60명이 세례교인이었다. 연전의 학생선발은 종교의 차별이 없는 기회균등 교육정책에 따라 행해졌지만, 그런데도 기독교인이 절대 다수를 이루었다. 이런 사정은 당시 기독교인 학생들이 서구문화의 보급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야 했던 실정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초중등 교육관이 어떠하였던 것은 서구문명의 필요성과 실용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부합하지 않아 농학과가 정원 미달과 폐과를 겪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대부분 크리스천이었던 학생들은 주말이면 교회, YMCA, 주일학교에서 봉사하였다. 로즈는 수업 외의 과외활동도 관장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주일 예배 참석여부를 보고하게 하였다. 4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가게 하였다. 1923년 금강산 수학여행 후에는 학생들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며 수학여행의 좋은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산정의 눈과 얼음의 모습을 보고 산의 이름이 ‘Diamond’인 이유를 이해했다고 설명하였다. 유점사, 장안사, 구룡폭포 등 불교 유적들을 보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많은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며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기보다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졌던 것도 보여주었다. 그는 학내 행사와 외부인의 학교시설 이용을 관장하고 교수들의 활동을 파악하였다. 기독교사역자연맹의 교수분과위원회 회의가 연희전문에서 1926년 7월 21-28일에 열렸을 때 연전의 조병옥 교수가 ‘교회와 사회“란 주제로 네 차례 강연하였다. 이 강연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직면한 문제를 성서적 입장에서 살피는 기회가 되었다. 1929년에는 연희전문 전체 학생 226명 중 105명이 세례교인이었고, 34명이 학습교인. 62명이 새 신자였다. 많은 학생들이 학기 중에 교회에서 설교, 음악, 기타 방면들에서 봉사하였다. 겨울 방학이나 여름방학 기간에는 각자의 고향을 찾아 남북으로 흩어져 더한층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다. 밴드부는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며 봉사하였다. 서양악기에 대한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는 졸업생들의 활동에도 대해 관심을 가져 그들이 한국 복음화에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에 관해 조사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32년 3월까지 연희전문학교 졸업생은 총 314명이었다. 과별로 세분하면 문과 105명, 상과 152명, 수물과 54명, 농과 3명이었다. 신학과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의 방침과 대학설립 이념의 구현을 위해 사명을 다하였다. 다른 학과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 진학률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는 원래 의도했던 대로 장로회신학교를 위한 신학 예과 기능을 하였다. 이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연희전문 졸업생 중에서 작고한 사람은 18명이었다. 생존해 있는 졸업생 가운데 80명이 대학 교직원, 기독교학교 교사, 교회 사역자, 신학생이었으며, 36명이 미국 유학 중이었다. 정부 관리가 20명이었고, 은행ㆍ사업체ㆍ산업기관 직원, 자영업자, 농업 종사자가 80명이었다. 그런데 1933년에는 그 한 해의 졸업생만 395명이나 되어 이전 졸업생 총수를 넘었다. 로즈는 언더우드의 기념동상 제막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원두우 목사의 기념비가 제막된 때는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한 지 43년 23일이 되는 1928년 4월 28일이었다. 이 제막식에서 사회는 윤치호가 맡았고, 동상의 제막은 원한경의 세 아들이 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하나인 서경조 목사가 1887년에 언더우드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그의 동상을 보니 ‘그의 영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술회하였다. 로즈는 이 동상과 언더우드관을 통해 한국교회와 그 한국인 지도자들 및 선교사들이 그의 비전과 사역을 이어가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한국의 복음화가 더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로즈는 The Korea Mission Field에도 많은 글을 남겼는데, 연희전문 학생들과 가진 금강산 등반 기행문을 비롯한 8편의 글을 남겼고, 많은 기사들을 통해 그의 신앙과 신학을 밝혔다. 또한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발표한 “Do Korea Need Medical Missions?”라는 글에서는 더 많은 의료선교사 파송과 의료선교비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가 쓴 연희전문 관계 기사와 논문들은 그의 직책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글도 그러하였다. 이 기사에서도 로즈는 당시의 연전 교장인 에비슨 의료선교사와 합일되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나 한국의 선교회와는 그렇지 않았다. The Korea Mission Field에서도 에비슨의 부인 제니(Jennie Barnes Avison)이 서거했을 때는 그녀를 기리는 조사도 남겼고, 학내의 중요 일들과 재학생의 종교사항을 비롯한 각종 통계, 졸업생의 동향을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여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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