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토렛과 백낙준의 교회사관: 그 상관성 연구 서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라토렛의 삶과 학문 1) 라토렛의 삶 2) 라토렛의 신앙과 신학 3) 라토렛의 교회사 방법론 3. 백낙준과 라토렛의 관계 1) 백낙준의 삶 2) 백낙준 宣敎史觀과 라토렛의 상관성 3) 백낙준과 라토렛의 교류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라토렛(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교회사가였으며, 교회사가로서 미국역사학회장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양적으로도 20세기에 최대의 저서를 남긴 교회사가였다. 그는 많은 책을 쓸 것을 계획하고 저술 활동을 위해 결혼도 포기하며 저술과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크리스마스 때 자동차 사고를 당해 소천하기까지 약 15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너무나 유명한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7권과 Christianity in Revolutionary Ages: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5권은 그의 대표적 저서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저서로 A History of Christianity와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등이 있다. 그는 특히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 라고 못을 박은 선교사가로서 많이 알려졌다. 그는 백낙준 박사의 예일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 의 지도교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사학계에 더한층 널리 알려진 교회사가이기도 하다. 라토렛은 예일대학교에서 사학과, 종교학과 교수로, Yale Divinity School(이하 YDS와 혼용)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YDS에는 그를 기념하는 강의실이 있고 대형 초상화도 걸려 있다. Yale Divinity Library의 Special Collection Room에는 Latourette Paper가 168개의 박스에 분류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저서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서신, 논문, 강연 원고, 그리고 엄청난 분량의 서평 등이 주된 품목들이다. 그에 관한 신문ㆍ잡지의 기사들도 상당한 분량으로 수집되어 있다. 그 외에도 그가 해외 연관단체나 개인과 교신한 수천 통의 편지가 있다. 그 가운데 그가 백낙준에게서 받은 개인 서신이 1927년부터 1963년 사이의 것으로 18통이나 보관되어 있다. Yale 대학 문헌보관소(Archives)에도 그에 관한 파일이 있고, 백낙준에 관한 파일도 있다. 라토렛을 추모하는 강좌도 몇 차례 열렸다. 일례로 YDS의 Day Associates Lectures의 일환으로서 Andrew Young이 1995년에 Yale–Edinburgh Group on the History of the Missionary Movement 모임에서 강연을 하였다. 강연 제목은 “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Reconsidered”였다. 본고의 주된 관심사는 라토렛의 교회사관이 백낙준의 교회사관과 어떤 상관관계가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라토렛과 백낙준은 사제 관계이다. 백낙준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주저인 한국개신교회사(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를 1929년 숭실전문학교 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연세대학 출판부에서 한국어 번역판과 영문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초판 출판 때는 그의 스승 라토렛이 서문을 썼다. 그는 이 책을 한국교회사의 결정판으로 보았다. 라토렛과 백낙준, 이 두 사람은 필자가 교회사에 뜻을 둔 이래 멘토로 모신 인물들이다. 필자가 예일대학에 공부하러 간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고, 아들의 이름을 Kenneth로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서 East Asian 역사와 교회사 공부를 한 것도, 지금까지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이유도 그의 학문세계에 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멘토를 따르는 일의 첫 시작은 그의 저서들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능력과 주어진 여건을 핑계로 그것마저 이루지 못하고 그 주변만 맴돌다가 이번에 라토렛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가 열리니 논문을 발표하라고 해서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수락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 상 이 주제에만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YDS에 있는 그의 페이퍼들 가운데서 상당한 분량을 usb driver에 담는 일부터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보았던 예일대학 문헌보관소 소장의 백낙준 파일을 다시 보았다. 본 논문의 주제는 백낙준이 학위논문을 준비할 당시에 선교역사가 매우 일천했던 한국 기독교사를 어떤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라토렛이 그를 지도하고 그가 라토렛의 지도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본고는 라토렛의 어마어마한 논저들을 충분히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잘 알려진 사항들을 전제로 두 사람 사이의 학문적 연관성을 재확인 하려고 한다. 아울러 라토렛이 백낙준에게서 받은 편지를 통해 두 사람의 인간적, 학문적 연계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따라서 본고의 제목을 ‘라토렛과 백낙준의 교회사관: 그 상관성 연구 서설’이라고 붙였다.
2. 라토렛의 삶과 학문
1) 라토렛의 삶
라토렛은 매우 경건한 기독교 가정을 배경으로 태어나 성장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그의 가족은 17세기말 미국으로 이민 온 프랑스 위그노의 후예들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Lyman D. C. Latourette은 서부개척의 시기에 오레곤에 와서 교회를 세우며 정착하였다. 오레곤 시 주변에 터를 잡고 침례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가문을 만들었다. 할머니는 Ezra Fisher의 딸이었다. 에즈라는 1637년 매사추세츠의 디담으로 이주한 청교도 Anthony Fisher의 후예였다. 외조부는 John Tucker Scott이었다. 라토렛의 부친 Dewitt Clinton Latourette은 그 지역의 Pacific University에서 어머니가 될 Rhoda Ellen Scott를 만났다. 둘 다 학사와 석사를 그 대학에서 마쳤다. 아버지는 법률가와 은행가로 활동하면서 유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그들의 첫 아들인 라토렛은 1884년 8월 9일에 오레곤 주의 오레곤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짧은 서부 개척의 역사로 인해 당시에 공공도서관조차 없던 그 지역의 상황과는 달리 부모들이 장서가들이어서 독서를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라토렛은 그 지역의 고등학교를 15세에 졸업하고 인근의 McMinnville College(후에 Linfield 대학으로 교명 변경)에서 valedictorian으로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 YMCA 회장으로 활동하며 수련회 참석과 성경공부를 충실하게 행하였다.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 형성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해외 선교사로 가겠다는 선언에 서명하였다. 당시의 표어가 “the evangelization of the word in this generation"이었다. 이 표제는 금세기 안에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는 것보다 이 세기에 복음 전파를 다할 것을 의미하였다. 라토렛도 처음에는 부친처럼 변호사나 은행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형제들이 모두 모여 가족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네 부모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성구가 그로 하여금 가족들과 떠나 선교사 자원에 서명하게 만들었다. 19세기말 미국 대학의 전체 캠퍼스에서 젊은이들을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끄는 영향력이 풍미한 적이 있었다. 라토렛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 맥민빌 대학을 졸업하고 동부의 예일대학 3학년에 편입하였다. 전공분야는 역사였다. 그는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 때부터 참여했던 YMCA 활동도 병행하였다. 당시에 예일대학의 YMCA는 미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전국 최강의 조직을 갖고 있었다. 자랑스런 동문인 조나단 에드워드의 영향으로 복음주의적인 전통도 잘 계승되어 오고 있었다. 주변에서 불어온 무디의 부흥운동과 존 모트의 YMCA를 통한 선교운동의 영향도 가장 강하였다. 라토렛은 모트의 강연을 듣고 더한층 헌신을 다짐하였다. 후에는 모트와 지속적인 교류도 가졌다. Yale Divinity School에서 Wiliston Walker의 교회사 강의도 들었다. Yale 대학교에는 학생들의 선교봉사 활동을 위한 Yale in China란 단체가 조직되어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라토렛은 이 모임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박사 학위과정 중에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일본사, 중국사와 같은 동양사 공부도 하였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무역, 외교, 선교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다. 그가 학위논문을 작성했을 때 그 제목은 “The History of the early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1784-1884”였다. 그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Frederick Wells Williams였다. 졸업 전후에도 계속 신앙생활에 유념하였다. Yale의 YMCA 사무실이 있는 Dwight Hall에서 모이는 성경공부가 가장 유명했는데 라토렛은 그 성경공부반의 리더로도 일하였다. 그는 학위과정을 마치고 대외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SVM 일로 세계도처를 두루 다니면서 선교현장을 둘러보고 선교사의 꿈과 안목을 넓혔다. 1910년부터 마침내 서원했던 대로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Changsha 지방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1912년에 일본을 거쳐 오레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14년에는 건강이 거의 회복되어 Portland의 Reed College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집필도 시작하여 The Development of China(1917)란 책을 출판하면서 학문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간의 체험은 그의 학문의 바탕이 되었다. 집필 전에 그가 착안한 것은 2천 년간 기독교가 점차 확장되어 왔다는 점이었다. 이 후 그는 교회는 확장되어 왔고 , 지금도 확장되고 앞으로도 확장되리라는 비전을 갖고 교회사를 서술했고 학문 활동을 했다. 그는 리드대학과의 계약이 끝나자 오하이오 주 Granville의 Denison University에서 가르쳤다. 1918년에는 침례교단에서 목사 장립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학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라토렛은 전쟁이 전 세계로 번지는 때에 동양에 대한 미국인의 인지도가 너무 낮은 것을 감지하였다. 그는 평소에 선교차원에서 시작했던 동양사 분야의 연구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 열매는 중국에 이어 The Development of Japan(1918)를 출판한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저술에 착수하였다(1929년 출판) 곧 이어 The Chinese: Their History and Culture 등의 저술도 계획하고 1934년에 간행하였다. 그는 어느새 선교역사와 중국, 일본 중심의 동양사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미국 대학들에서도 동양의 전통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학과를 확장하고 발전시키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속에서 라토렛은 시카고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초빙을 받았다. 라토렛이 최종 선택한 곳은 예일대학이었다. 그곳이 그의 모교였고 다른 어느 대학보다 선교학에 대해 관심이 컸고, 선교학 석좌교수 자리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21년 Yale Divinity School의 Willis James 석좌교수로 부임하였다. 그 부임은 선교학 석좌교수 Harlen Page Beach의 자리를 이은 것이었다. 그 당시 선교학은 학문적으로 일천하여 그가 2대째가 되었다. 그는 YDS에만 머무르지 않고 예일대 사학과와 종교학과에서도 교수하였다. 1949년에는 예일대학의 최고 석좌교수인 Sterling Professor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953년에 은퇴했고, 은퇴 후에도 오랫동안 예일 캠퍼스에 머물면서 계속 연구하였다. 1968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때 그의 고향 오레곤에 돌아가 체류하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하였다.
2) 라토렛의 신앙과 신학
라토렛은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을 믿고 살았다. 그가 신앙생활과 학문에 열중하면서 주시한 것은 지난 이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일만큼 세계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없다고 인식하였다. 과거 이천년 동안 이어 온 거룩한 하나님 영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되어 기독교의 영향이 온 세계에 계속될 것이고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나아간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봐야 된다고 믿었다. 마치 전 세계적으로 연도표기에 쓰이는 A.D. 와 B.C.처럼 일반역사도 기독교적으로 봐야 한다고 보았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이런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는 기독교 역사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손길을 부인할 수 없었고 또 일반적인 역사연구 방법으로는 해석할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믿었다. 그가 서양사에서 관찰한 것은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유럽을 새롭게 변혁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나라와 민족이든 기독교가 들어가면 야만상태에 있던 민족과 국가들이 문명국가로 변화되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도 재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연구에서 이성과 믿음을 서로 조화시켜야 된다고 보았다. 그의 역사연구의 초점과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라토렛은 침례교 데니슨 대학 재직 중에 목사가 되어 그곳에서 오랫동안 설교를 하였다. 예일 대학 재직 때에도 뉴헤이븐에 있는 갈보리 침례교의 명예목사로 있었다. 교수로서 봉직 하면서도 침례교단의 선교부나 성서공회의 일에도 참여했다. 그는 자기가 가야할 길을 바로 찾아 갔고, 존경과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학문을 접목시키고 그 길을 변치 않고 끝까지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했던 것은 복음적 경건을 좇는 기독교 신앙의 사람으로서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자신의 신앙체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모가 물려준 가정의 신앙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또 그 자신이 역사의 진행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주변 동료들의 진보적인 신학의 경향에도 동요하지 않고 더욱 더 자기신앙을 확신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나아갔다. 여러 곳에서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기도와 경건의 생활을 추구하는 데에 변함이 없었다. 그가 내세운 교회사관의 특징은 그의 신앙 따라 기독교의 세계성을 추구하고 신학화 한 것이었다. 전 세계의 기독교회는 하나란 점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됨을 추구하였다. 세계의 기독교를 하나로 묶는 기구와 관계를 갖는 것도 중시했고, 관련인사들과도 열심으로 교류하였다. 선교지에서 일기 시작한 에큐메니칼운동에 공감하고 평생동안 Ecumenical Movement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런 종류의 세계 기독교 기구로서 그가 열심히 참여한 곳들은 Student Volunteer Movement,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s, 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등이었다. 세계교회 운동과 관련된 인물로서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John Mott 였다. 그는 모트가 1922년에 세계기독학생연맹의 책임을 맡은 후 중국의 북경에서 그 확대회의를 할 때 참석하여 협조했고, 그 후 여생 동안 그와 교류하였다. 모트가 코넬 대학 출신이었는데도 그의 페이퍼들이 YDS 도서관에서 보관 중인 것도 그와 모트가 나눈 교류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교회연합 기구에서 일하던 William Temple, J. H. Oldham, William Paton 등 많은 사람과 교제하고 여러 직책들도 맡았다. 교회연합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나누어진 교회보다 연합된 교회가 선교하는 데에 효율적이라고 인식하였다. 이 점은 당시 일선 선교사들에 의해 실증된 바도 있었고, 1900년의 뉴욕 선교대회나 1910년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공인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런 것은 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신학적 진보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교회가 땅 끝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확신하였고, 모든 크리스천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앙의 한 표지로 삼고 살았다. 모든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라고 확신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자주 역설했다. 나아가 새롭게 학문으로 등장한 선교학을 전통적인 신학의 한 분류 학문으로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선교의 역사를 교회의 역사와 병합시켜 교회의 역사가 곧 선교의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성장기와 학창시절과 사회 활동기에 급격하게 일어난 미국 교회의 선교열풍에 공감하였다. 깊은 관심을 갖고 자기를 거기 투신시켜 자기 스스로가 선교 일선에 나가 선교사가 되었으며, 선교 현장에 갈 수 없게 되자 생업인 학문 활동도 선교와 연관시켰다. 대외적으로도 선교와 연루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선교사로서 활동한 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선교기관에 관여하며 선교사 파송에도 기여하였다. 라토렛은 그의 저술과 논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널리 각인시켰다. 영국과 미국에 실제로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선교역사나 선교학은 그 역사가 일천하여 체계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으로 인정하지 안으려는 경향이 이있었다. 그는 Yale에 있으면서 많은 강의, 강연 및 논저들을 통해 선교의 중요성을 거듭 각인시키고 선교학과 선교역사를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그는 선교역사와 교회사가로서 명성을 쌓고 존경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료 교수들의 진보적 신학 경향과 계속된 선교학 학문성 논란 나아가 선교 열풍이 사라지고 세속화된 교회들, 학교들, 학생 단체들의 선교태도를 비롯한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도전에 맞서야 하였다.
3) 라토렛의 교회사 방법론
라토렛은 그의 스승 워커의 교회사관을 따랐다. “교회사는 하나님이 교회를 인도하신 과정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라 보고 교회를 기독교와 인류를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싸인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라토렛은 교회의 역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세계화하였다. 라토렛 교회사의 공헌과 가장 독특한 점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지정학적으로나 본질적으로 세계화 하려는 사관, 즉 교회사를 전 세계로 확대시키는 확장적 견해를 편 점이었다. 그는 종래의 서구중심 교회사의 지경을 아시아, 아프리카, 남태평양, 라틴 아메리카까지 넓혔다. 교회사 개념도 영어의 Christianity란 말 그대로 가톨릭이나 정교회 중심도 아니고 개신교 중심도 아닌 전 교파와 교단을 망라한 세계교회적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교회사는 기독교가 영향력과 교세를 점차 확장(Expansion)시켜왔다는데 착안하고 그 점을 부각시켰다. 기독교의 역사는 교회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선교사명 때문에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고, 성령의 역사가 기독교인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영향력도 증진시켜왔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국가와 국가의 만남으로 확장된다고 보았다. 그 자신이 중국선교사가 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지나간 19세기동안 교회를 확산시켰다고 깨닫고 현재도 그 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확장되어 갈 것이라는 비젼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20세기 중엽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기독교를 믿고 지리적으로도 가장 넓게 확장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지구상에서 단일 기구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가 기독교란 점을 보았다. 이런 이론을 뒷받침하는 첫 작품이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이다. 이러한 관점을 갖게 된 바탕은 선교를 통해 교회가 지구상 이곳저곳으로 확장되어가는 현상을 두루 파악한 데에 있었다. 확장되어가는 세계적 기독교(Christianity)의 역사라는 이런 통찰력의 결실은 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7권이다. 그중 특히 4,5,6권이 이에 해당된다. 그는 확장과정에서 하나된 교회, 교회의 연합을 중시하였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저서가 교리논쟁을 주로 취급하여 교회의 연합보다는 분리를 조장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그는 논쟁의 긍정적인 면을 중시하였다. 우선 복잡한 교리논쟁은 보다 간략하게 기술하고 교회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에 더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서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19세기에 수많은 선교단체가 생겨나고 전에 없던 선교의 열풍이 일어났다고 하여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이러한 확장의 주제로 위에서 언급한 그의 주저 7권을 넘어 Christianity in Revolutionary Ages: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5 vols.을 연이어 출간하여 자기주장을 각인시켰다. 우선 20세기 까지 기간의 확대와 아울러 확장된 지역에 지면을 보다 할애 했다. 미국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을 비롯하여 과학혁명, 기술혁명의 시대에 들어와 기독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도전을 받았지만 다 물리치고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지론대로 성장ㆍ발전ㆍ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권에서는 20세기에 진입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급팽창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라토렛은 한국이 이 기간에 경험한 망국의 국가적 비운 때문에 받은 정서적 충격으로 인해 교회의 급증과 확장을 가져왔다고 분석하였다. 이후에 간행된 저서들도 같은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라토렛은 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에서 그의 연구 방법과 의도를 나타내는 기본적인 질문들을 제시하였다. 1) 무엇이 기독교를 뻗어 나가게 했는가? 2) 어떻게 기독교가 확장되어 나갈 수 있었는가? 3) 반대로 왜 기독교는 박해를 받고 때로는 부분적 승리만을 얻었는가? 4) 어떤 방법으로 기독교는 뻗어 나갔는가? 5)기독교는 어떤 영향을 주위에 주었는가? 6)그 환경은 기독교에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가? 7) 기독교가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주위 환경에 준 기독교의 영향과 기독교에 끼친 주위 환경의 영향은 무엇일까? 앞의 네 질문은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것이지만 뒤에 세 질문은 기독교가 전해지는 곳의 사회 문화 등, 그 지역적 특성과의 상관관계 연구를 위한 조항들이다. 이러한 라토렛의 교회사관이 미친 영향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우선 지역적으로 구미 중심적인 데에서 벗어나 세계화되었다. 그는 교회는 ‘땅 끝까지 이르는 증인들’의 공동체이고 복음 자체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역사적 고증으로 드러냈다. 이는 그가 문화적, 사회적 접근방법으로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끼친 영향을 찾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얻은 수확이었다. 그는 또한 역사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역사를 통합하려는 시각을 가졌다. 세계교회사의 서술을 시도하며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교회의 역사를 보려 하였다. 관심도 넓어 “세계역사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였다. 기독교회의 영향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이 교회 밖에서도 나타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것은 종래의 배타적이고 편향적이고 가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 중심적인 교회사 서술, 서구중심의 지역성, 초대교회 때부터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온 교리사적 연구방법론에서 탈피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자료를 지역과 교단을 가리지 않고 두루 방대하게 모으며 공정한 자료를 선택해서 사용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사관이 형성은 라토렛이 그 정신적 바탕에서 복음적 경건의 사람, 세계적 기독교정신의 소유자, 개화된 낙관주의자, 선교에 열정을 품은 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는 복음자체가 세계적인 것이고 교회도 지역적으로 전세계화 되었기 때문에 세계 기독교 역사를 써야 한다는 교훈을 후학들에게 남겼다. 그 자신이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역이나 교파에 대해 공정을 기하려고 노력한 점이 그의 저작들에서 은연중 드러나고 있다. 그는 역사연구는 객관성을 찾아야 하고 사실은 사실로 말미암아 드러나야 한다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에 공감한 예일대학 사학자들에게서 훈련을 받았고, 또 그 방법론을 따라 역사를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가치관의 영향이 그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도 미쳐야 하고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가 기독교신앙 속에서 주제를 선정하고 자료를 활용하고 해석하는 주관성을 인정했던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세계교회를 복음화 하고 자신의 저술활동을 통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뜻을 이 땅에 이룰 것인가하는 진지한 자세로 살았다. 라토렛의 이러한 주장에는 의심할 부분도 있고, 그가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해석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그의 학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많다. 그는 미국침례교협회의 여러 직책들을 맡았고, 교회사가이면서도 미국역사학회 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아시아연구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때 동경의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부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를 기리는 저작물이 생전인 1962년에 W. C. Harr가 편집을 맡아 Frontiers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로 출판되었다. 그 자신도 생을 마감하기 전에 Beyond the Ranges: An Autobiography 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저작 때문인지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평전은 아직 출간되지 안했다.
3. 백낙준과 라토렛의 관계
1) 백낙준의 삶
庸才 白樂濬(1895-1985)은 1895년에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에서 백영순과 경주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서당과 기독교 학교인 영창학교를 거처 1913년 북장로교 선교부가 세운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학교 교장 George S. McCune의 일을 도왔기 때문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 으로 피신하여 하북성 천진의 新學서원에서 3년간 수학하였다. 1916년에 맥큔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영어를 익히기 위해 파크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2년간 수업 받은 후, 미주리 주의 파크대학에 들어가 역사학을 전공하고 그 학교를 졸업하였다. 프린스톤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프리스톤 신학교에서 신학과정도 마쳤다. 1927년에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해에 미국 북장로교 캔사스노회에서 목사 장립도 받았다. 그는 같은 해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문과 과장을 역임하면서 연희전문학교의 국학연구에 기여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은둔생활을 했지만, 해방 후 미군정 때 경성대학 법문학부를 거쳐 1946년에 연희대학교총장을 맡았고, 1957년에 연희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을 통합한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한때 연세대 명예총장과 이사장도 맡아 영원한 연세인으로 살았다.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문교부 장관, 참의원 의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ㆍ교육ㆍ교회 기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85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의 학덕을 기리는 기념강좌가 수차례 개최되었고, 『한국의 이상과 현실』 상ㆍ하를 비롯한 단행본과 『배낙준 전집』 10권도 간행되었다. 『나의 종강록』과, 『시냇가에 심은 나무』이란 저자의 자서전적 저작도 있다.
2) 백낙준 宣敎史觀과 라토렛의 상관성
용재선생의 사관에 영향을 준 이들은 국내외를 통해 여려 명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프린스턴대학 시절에 Maclroy 교수에게서도 미국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과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는 예일대학 시절에 박사학위과정을 지도한 Kenneth Scott Latourette이었다. 용재 선생이 그로부터 받은 인상은 “사람됨이 퍽 투명한 분으로서 표리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며 접촉해 볼수록 인상 깊은 학자”이며 “성격이 매우 섬세하고 정직했던 분”이라는 것이었다. 용재는 학창시절 초기부터 그의 저서에 심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역사 연구 방법을 동양사 연구에 응용해보려고 라토렛에게 접근하였다. 라토렛은 그에게 ‘한국교회사’라는 연구테마를 제시하였다. 용재는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지도를 받아 논문을 쓰기로 하였다. 서구인들의 역사방법론은 요약하면 테마 선정, 사료 수집, 자료 분석과 종합평가, 사건 고증과 인과관계 규명, 사실 서술의 단계를 밟는 것이다. 사실의 기술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토렛이 백낙준에게 끼친 영향을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기독교적 종합사관을 갖게 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부터 들어가는 곳마다 변혁적이었다. 야만적이던 국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백낙준은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중요시한 라토렛의 사관을 받아들였다. 당시 기독교의 전래와 수용으로 한국사회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것을 목도한 용재는 한국사에서 기독교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런 인식은 그의 학문적인 자세와 방향과 방법을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29년 6월에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 1832-1910”란 제하의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논문은 숭실전문학교의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라토렛이 그 책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서문에서 그의 연구자세와 연구방법론과 그 책에 대하여 더 이상의 찬사가 없을 만큼 칭찬하고 이 분야의 공부를 하는 이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할 정도로 극찬하였다.
西洋史學家의 方法應用에 능숙할만한 훈련을 받았으므로 持久力을 가지고 자료를 搜索, 蒐集하였고 그 資料의 비판과 해석에는 客觀性을 견지할 줄 아는 奇術을 所有 하였다. 그 결과는 초기 한국개신교의 활동을 기록하는, 이 처음 되는 진지한 시도에 거의 완벽을 기하였다. 이부분위 역상 관하여는 다시 연구에 착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저술가나 학생은 배각사의 저작을 숙독하지이할 수 없을 것이다. 백박사는 자기가 만들어 맡은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한국개신교의 전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던지 항상 백박사의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서문에 쓴 대로 이 책은 한국교회사 연구자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자료면에서도 아직까지 이때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용재가 취한 교회사관에 대해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선교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자신도 분명하게 선교사관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런데 용재가 주장하는 宣敎史觀은 선교역사관이지 宣敎師觀은 아니다.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 있어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사상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 까지만 존재하게 되어 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존재체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용재는 라토렛의 “The Study of the History of the Mission”이란 논문에서 영향을 받았고 방법론도 그의 선교사관을 따랐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그의 저서 한글판은 “韓國改新敎 傳來期에 선교자 측에서 능동적으로 선교를 선행한 사실에 치중하여 차편에서 다루는 초기 전래사를 선교사로 서술키로 한다”고 전제하고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에 실린 글을 나름대로 풀이하여 구체적으로 이 방법론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宣敎史에서는 ①傳來하여 온 基督敎의 性格과 ②宣敎過程과 ③ 宣敎機關과 ④ 宣敎方法을 考察하고 나아가서는 ⑤政治的 經濟的 기타 宣敎事業과 관계있는 모든 運動과 ⑥기독교가 被宣敎地人에게 끼친 영향과⑦ 被宣敎地의 새 환경이 기독교 그 自體에 기친 變改의 程度를 硏究의 대상으로 하고, 또한 이처럼 ⑧ 變改된 被宣敎地人과 기독교가 該當社會에 가져오는 影響力과 ⑨ 기독교가 전파될 當時 그 社會情勢와, ⑩ 특히 사용된 宣敎方法을 다루게 된다.”
라토렛의 권유에 의해 논문 제목을 확정했으나 원래 한국선교를 연구주제로 선택하게 한 사람은 조직신학교수였고 대학원 종교학과의 주임이었던 D. C. Macintosh교수였다. 용재 선생은 위와 같은 라토렛의 방법론을 따라 논문을 전개 발전시켰는데, 그는 자신의 책 영문판 서문에서 라토렛 교수도 세심하게 백낙준의 학위논문을 지도하고 비평할 것은 비평하며 의견도 제시하며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용재는 한국교회사를 한국역사의 한 부분으로 서술하려 하였고, 라토렛은 세계교회사를 기독교사관으로 보게 하였다. 용재가 교회관계만 기술하지 않고 당시의 국내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에 끼친 영향을 함께 다루었다는 점에서 라토렛과 상통한 견해를 지닌 것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양자 간의 상관성은 많이 찾아 볼 수 잇을 것이다.
3) 백낙준과 라토렛의 교류
라토렛은 백낙준의 사고방식이나 학문의 여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언급한 대로 Yale Divinity Library Special Collection에는 용재가 라토렛에게 보낸 18통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백낙준 전집에는 이것들이 모두 없다. 이 편지교류는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1927년부터 1963년까지 지속되었다. 라토렛이 백낙준에게 보낸 편지도 보관되어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 첫 편지는 그가 1927년 학위취득 후에 대학시절을 보낸 파크빌에 돌아가 옜 친구들을 만나보고 7월 21일에 캔사스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하는, 그의 동향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처 귀국한 후에 논문을 출판할 것이란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예일에서 논문을 쓸 때에 도와준 것을 감사하며 많은 빚을 졌다고 술회하였다. 두 번째 편지는 연희에서 문과과장의 일과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너무 바쁘게 지내고 있어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1935-36년까지 Yale Sterling Fellowship을 받아 도미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요지의 편지이다. 1938년에는 모교인 파크대학에서 역사와 종교학을 가르치고 동양문화에 대한 특강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용재가 미국에 체류할 때 워싱턴의 국회도서관에서 한국관계 도서를 볼 수 있도록 라토렛의 친구를 통해 도움 받은 사실을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다. 미군정 때인 1946년에는 아놀드 장군이 군정장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가 예일 출신이어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소식들을 전하였다. 라토렛이 일본의 국제 기독교대학 부총장으로 있을 때 그에게 보낸 생일축하 글에 대해 감사하는 글도 있다. 그는 라토렛이 변함없이 잊지 않고 생일 때마다 축하 해준 것을 고마워하였다. 마지막 보관된 편지는 뉴욕에 체류하면서 예일의 Day Mission Library에 갈 계획이 있음을 알리는 편지이다. 이토록 둘은 교류를 한평샐 지속했다. 미국의 전통은 학문하는 자는 학문의 길로 가는 것이다. 대부분 그렇게 했고, 정치나 다른 길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이다. 라토렛은 미국적 학자의 길을 갔다. 끝까지 미혼으로 혼자서 외길을 갔다. 많은 저서도 냈다. 백낙준은 한국적 학자의 길을 갔다. 한국은 관료적 전통이 강하여 학문의 길로 가다가 정치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국사회의 인재 부족과 관료사회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4. 나오는 말
라토렛의 교회사관이 백낙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혹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에 본 논고는 주된 관심사를 두었다. 백낙준은 그 스스로 자신이 라토렛의 것을 전수ㆍ수용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런 사실을 연구자들도 거의 다 수긍한다. 따라서 이런 점에 대해서는 본고의 결론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백낙준의 교회사관에 대해 설왕설래 하면서도 아직까지 그가 인용했던 자료마저 국내에 많이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료수집이 급선무이다. 아울러 그의 스승인 라토렛에 관한 자료도 어느 정도 수집되고 검토될 때, 그들의 학문적 상관관계 대한 더 나은 성찰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선별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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