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슨의 의료선교활동과 1900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목 차 들어가는 말 I. 에비슨 내한 이전의 한국개신교 의료선교 1. 알렌의 서구식 병원 설립 2. 제중원의 발전과 의학교 설립 II. 에비슨의 내한과 제중원 개혁 1. 에비슨의 내한 2. 에비슨의 제중원 혁신과 새 병원 건립구상 III. 1900년 뉴욕선교대회와 에비슨의 의료선교론 1. 1900년 뉴욕선교대회 2. 에비슨의 의료 선교론 IV. 에비슨의 세브란스병원 건립 1. 세브란스의 기부와 서울과 평양지회의 갈등 2. 에비슨과 세브란스 병원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복음이 근대 세계에 전파되는데 가장 효율적인 선교 방법은 의료선교활동이었다. 한국의 개신교선교도 의료선교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미국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알렌이 주축이 되어 세운 제중원(濟衆院)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선교병원이었다. 그를 이어 내한한 언더우드는 성직자였지만 제중원에서 교사 자격으로 내한했고 그 후 내한한 헤론, 빈톤, 호톤, 에비슨은 모두 의료 선교사였다. 북감리교의 첫 한 국 상주 선교사인 스크랜턴도 의료선교사였다. 그들의 내한 목적은 인술을 통한 기독교복음 전파였다. 내한 의료선교사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할과 공헌은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근대 서구식 의료기관의 실질적 창설자였다.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의 안정된 교수직을 포기하고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좋은 병원의 설립과 의학 교육의 발전을 위해 43년간 헌신하였다. 제도적으로 국가와 선교회의 공동경영의 제중원을 개혁하여 선교회 단독운영으로 혁신하고 외형적으로 보잘 것 없던 병원을 아시아 굴지의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로 만들어 지속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에비슨의 의료선교 이론과 실현 및 활동은 20세기 세계 의료선교사상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역사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활동에 대한 연구도 상당하게 진척되었으나 중요 자료의 미간행을 비롯하여 아직도 미진한 편이다. 기존의 저술이나 논문도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번역본과 전기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그에 대한 자료집들이 간행되고 있다. 앞으로의 연구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본고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들은 물론 필자의 수집한 자료들로 바탕으로 에비슨의 의료선교론 및 그 실현을 통한 선교활동과 어떻게 세계 의료선교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에비슨의 43년간의 선교 활동이 효율적으로 마감된 그 동인은 무엇인가? 의료 선교사가 된 과정과 내한경위와 처음 선교활동은 어떠하였는가? 의료선교 이론과 그 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을 체계화하고 공론화하기까지의 그 형성의 배경과 발표과정은 어떠하였는가? 아울러 이러한 관점을 중심으로 그의 의료선교론을 처음 발표한 ‘1900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및 도움 받은 세브란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나아가서 그의 의료선교론은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추적하려고 한다. 고찰 시기는 병원 설립 전후로 부터 에비슨이 부임하여 제중원을 일신하고 새 병원을 건축하여 이름을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변경한 무렵까지로 한정하려고 한다.
I. 에비슨 내한 이전의 한국 개신교 의료선교
1. 알렌의 서구식 병원설립 조선정부는 19세기말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 서구문물, 특히 의료 기술의 수용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교회들은 한국 기독교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가 주축이 된 부흥운동의 여파로 1876년 해외학생선교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이 결성되었고 이후 수천 명의 젊은 학생들을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 이라는 표어 따라 선교에 관심이 고조 되어 있었다. 이후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 창설의 미국 측 핵심인사였고 선교잡지<International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를 주간한 장로교의 피어선(Arthur T. Pierson, 1837-1911)과 학생선교자원운동을 더욱 확장시키고 YMCA를 통한 선교로 후에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와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Board of Foreign Missions for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의 총무로 활동한 미첼(Arthur Mitchell), 엘린우드(F. F. Ellinwood), 스피어(Robert Elliott Speer)나 브라운 (Arthur Brown)의 선교정책과 열정에 의해 선교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내한한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이러한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1880년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 의해 조선의 개항과 함께 선교가 추진되고 있었다. ‘의술이 뛰어나고 헌신적인 정신을 소유한 청년’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6-1890)이 가장 먼저 1884년 4월 24일에 조선에 갈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서울에 도착한 것은 뒤에 임명 받은 알렌(Horace N. Allen)의사였다. 중국에 체류 중이었음으로 1884년 9월 20일에 내한하게 되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84년 7월 28일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그해 12월 말 뉴욕을 출발하여 이듬해 1885년 4월 5일(부활절)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선교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헤론 의사가 6월 20일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선교 금지 상황 속에 제중원에서 일하면서도 주한 미국공사관의 공의 신분이었다. 후에는 영국, 중국, 그리고 일본 공사관의 공의로도 활동하면서 선교사역을 모색하였다.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알렌에게 병원 설립의 기회가 왔다. 1884년 12월 4일에 개화파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의 주도로 갑신정변(甲申政變)때였다. 이때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묄렌돌프(Paul G. von Möllendorff)의 소개로 알렌이 치료하게 되었다. 한의들이 포기한 것을 그는 수술로 3개월 만에 완치시켰다. 종래의 한방의술과는 전혀 다른 서양의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고종과 민비의 어의(御醫)가 된 알렌은, 병원 설립도 추진하게 되었다. 조야에 신뢰를 얻은 알렌은 주한 미국 대리공사인 조지 포크(George C. Foulk, 1856-1893)와 외무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독판(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督辦)인 김윤식(金允植,1835-1922)과 의논하여 병원 건설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병원 건설안’에는 병원설립과 의학교육 실시에 필요한 깨끗한 집 한 채, 조명과 연료비, 의사와 환자를 돕는 자들에 대한 인건비, 가난한 환자를 위한 급식비, 약재비 300원 가량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과, 미국인 의사 1명을 더 초청하여 6개월 후에 병원을 건립할 것이며 알렌과 새로 올 의사는 조선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겠다는 제안이 들어있었다. 알렌의 제안은 조선정부와 미국공사관을 통하여 미국의 선교부와의 합의로 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병원의 명칭은 광혜원이라고 했다가 제중원으로 낙착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10일에 재동에서 개원되었다. 개원 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처음에 병원이 개설될 때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 이란 이름은 고종이 4월 12일에 내렸는데, 4월 26일에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바뀌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에서 “사람을 구제하는 집”으로 바뀐 과정이 개부표(改付標)식이어서 광혜원이란 이름은 문서상으로만 있었다. 개명된 날짜에 대해서도 통서일기에는 4월 21일(음력 고종 22년 3월 7일)이라고 적혀 있으나, 고종실록에는 제중원으로 개칭된 것이 4월 26일(음력 3월 12일)의 일이라고 적혀 있다. 제중원의 행정과 재정을 조선 정부가 관장하고, 치료와 의학교육 및 경비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부담하는 이원체제였다. 조선 정부는 서구식 의료시설의 도입이 필요하였고, 선교부로서는 자금의 문제와 또 한국에서 선교활동의 자유가 없어서 선교부 단독 명의로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병원 이름이 영어로는 Royal Hospital, Government Hospital, Public Hospital, His Majesty's Hospital, Imperial Hospital 등으로 혼용되었다.
2. 제중원의 발전과 의학교의 설립 제중원은 알렌과 언더우드, 6월에 내한한 헤론 의사와 함께 개원 첫해인 1885년에만 265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그중 대수술도 150여건이나 되었으며, 10,460명에게 투약하고 환자들을 진료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의료사역을 전개하였다. 1886년 3월에는 서양의학 교육도 실시하게 되었다. 교수는 알렌, 헤론, 언더우드였고 학생은 12명이었다. 병원 측이 당면한 큰 문제는 여자환자 치료였다. 알렌은 여자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기녀들을 고용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선교본부에 요청하여 엘러즈(Annie J. Ellers, 1860-1938)가 1886년 7월 4일 내한하여 제중원 부녀과가 신설되었고, 왕비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가 벙커와 결혼한 후에는 호톤(Lillias Horton, 1851-1921) 의사가 1888년 3월 27에 도착하여 제중원 부녀과 및 왕비와 원세개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언더우드와 결혼한 후에도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제중원의 장소도 처음 개원은 재동의 홍영식 집이었으나 알렌은 조선정부와 협력하여 1887년 초에 2.5배 정도 넓은 구리개(銅峴)으로 옮겼다. 그곳은 오늘날의 명동성당과 YWCA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에비슨이 병원을 확장 건축할 때는 남대문 부근 도동으로 옮겼다. 제중원의 초대 원장직은 알렌이었으나 헤론, 하디(R. A. Hardie)로 이어졌고, 1891년 4월에는 빈튼(C.C. Vinton)이 이어 받았다. 알렌 1889년 9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1890년 7월 9일에 서울 주재 미국 공사가 되기 위해 다시 사임하였다. 1893년에 부임한 에비슨에 의해 제중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II.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1860-1956)의 내한과 제중원 개혁
1. 에비슨의 내한 에비슨은 서양의학의 소개와 발전에 최대 공헌자이며, 제중원의 개혁과 세브란스로 발전하게 한 주역이었다. 그는 영국 요크 주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을 따라 1866년 6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약방에서 일하며 학교도 다녀 후에 토론토대학의 약대 교수로 활동하였고, 토론토대학 의대를 마친 후에는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에비슨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업의로써, 토론토의과대학의 교수직과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 역할도 했다. 에비슨이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니(Jennie Barnes Avison, 1862-1936)와 결혼하고 셔본가 감리교회(Sherbourne Street Methodist Church)에서 봉사하면서 일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에서 활동 할 때 한국에 게일(James S. Gale, 1863-1937), 펜윅(Malcom Fenwick, 1865-1935), 하디( Robert A. Hardie, 1865-1949)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는 것도 후원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친구 하디와 게일로부터 의료 시설이 열악하여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의 소식을 듣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에비슨이 안식년으로 뉴욕으로 돌아와 있던 언더우드를 YMCA에 선교 강연 연사로 초청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의사가 없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어 가는데 뜻있는 사람은 와서 도우라는 요지로 강연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로 한국에 와달라는 외침을 개인적으로 받아드려 한국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에비슨을 엘린우드 총무에게 한국 주재 선교사로 추천하였다. 당시 에비슨은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음으로 교단문제로 주저 하였다. 엘린우드는 “당신들을 장로교인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으며 당신들은 한국에 감리교를 전파시켜 거기서 그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란다”고 교파를 초월하는 발언으로 격려해 주었다. 엘린우드의 에큐메니칼 정신에 감동한 에비슨은 오히려 교적을 앤드류 장로교회(St. Andrew’s Presbyterian Church)로 옮기고 그 교회 장로로써 섬겼다. 그 후 그의 신앙행로는 교파에 억매이지 않고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의료선교사로 평생을 한국에서 헌신했다. 에비슨이 미국 북장로교 파송 한국선교사로 출발할 무렵 그에게는 자녀가 셋이 있었는데 셋째가 와병중이었고, 부인은 넷째를 임신중이였다. 친구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벽지인 한국으로 떠나려는 그를 극구 말렸다. 에비슨은 만일 밴쿠버에 도착할 때까지 그 애(3남 고든)가 살아 있어 승선할 수 있으면 한국으로 가겠지만 그 아이 때문에 탑승이 거절된다면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막는 신호로 여길 것이라고 하며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막내는 뱅쿠버에서 건강이 회복되어 1893년 4월에 “엠프레스 옵 인디아(Empress of India)”호로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에비슨은 요코하마에 도착한 후, 배를 갈아타고 고베에 들렸다가 1893년 6월 16일 드디어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부산의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 사택에 머문지 일주일 후에 네째 아들 더글라스(Douglas)를 출산하였다. 에비슨 가족은 두 달 정도 부산에 머물다가 8월 말에 선편으로 제물포로 떠났다. 그 배에서 알렌(Horace N. Allen)을 만나 서울의 의료 선교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제물포에서는 마중 나온 언더우드의 안내로 나룻배를 타고 서울 마포 나루에 도착하였다. 제중원 원장인 빈튼 선교사 댁에 여장을 풀었다. 하물들도 도착되어 에비슨 부인은 짐으로 부친 피아노가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 손상되지 않아 건반 하나하나를 점검한 다음, 온 가족이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함께 불렀다고 한다. 에비슨은 내한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하여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혼자서 왕실의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청일전쟁전후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미신적인 방법으로 쥐 그림을 붙이며 대처하는 민중들에게 손을 씻고 물을 끓여 마시라는 계몽을 하여 숱한 생명을 건지기도 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와 ‘호적이 달라도 친형제 같이 지내면서, 두 분이 하는 일을 서로도와 주었다.’ 둘은 사별 할 때 까지 의료 및 고등교육 선교에 뜻을 같이하였다. 특히 평양지회의 동료선교사들이 서울의 병원의 확장에 반대할 때와 서울에 대학설립을 극구 반대 할 때 그 필요성을 서로 인정하고 견해를 같이하였다.
2. 에비슨의 제중원 혁신과 새 병원 설립구상 에비슨은 1893년 11월 1일부터 제중원 원장으로 시무하였다. 병원은 건물과 재정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아 겨우 유지 되고 있는 상태였다. 시설도 열악하여 에비슨 자신도 감염될 정도였다. 운영에도 문제가 많아 바로 잡기 시작했다. 우선 병원을 날씨에 관계없이 매일 개원하게 하여 환자들이 계속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큰 변화의 시작은 에비슨이 지방에 갔다 온 사이에 운영을 담당하던 주사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을 직면하고 에비슨은 사직하려 하였다. 제중원은 원래 의술은 선교부가 맡고 재정은 왕실이 지원하기로 했으나, 1892년경부터 정부의 재정지원이 원만하지 못하였다. 이는 계속된 정세혼란, 부패한 관리들이 환자들로 부터 금품을 쟁취한 일의 오명, 의약비 유용 등으로 재정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의료실적이 부진해졌기 때문이었다. 체제상으로는 국립-왕립이었지만 주사들이 제중원의 건물임대 및 운영비 등을 전횡하고 있었다. 에비슨은 이런 문제에 맞서 개선을 요구했다. 마침내 제중원은 1894년 9월 26일에 종래의 왕실병원과 북장로교선교부 공동 운영이 끝나게 되었다. 건물부지, 수리. 증축에 관한 모든 비용도 다 지불하고 국립병원 체제의 제중원 운영권을 완전히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양케 했다. 주사들을 대부분 해임시키고 하인들도 해고하였다. 이때 에비슨의 요구와 쇄신은 ‘선교의사의 변고와 저항’이었다기보다 운영의 정상화를 위한 선교부, 제중원, 조선 정부, 미국공사관의 협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에 힘입어 제중원의 여러 난제들이 해결되고 조선 정부가 병원운영에서 물러났다. 병원 경영도 체제 개편 첫해인 1894년에는 외래진료환자 1,398명, 입원환자 15명이었으나, 그 후 해마다 증가하여 1902년에는 외래환자가 6,666명, 입원환자가 230명으로 증가하였다. 병원에서의 예배도 국왕의 양해를 받아 자유롭게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명맥만 유지되어온 제중원 의학교도 1899년에는 교육을 강화하게 되었다. 에비슨이 1900년에 처음 안식년을 가진 후에는 학생 조수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에비슨에게는 의료 선교관과 새 병원 구상안이 있었다. 한국의 의료 시설과 구미 각 교파에서 파송되어온 선교사들이 제각기 개원을 하여 그 설비나 의료진이 부족하여 병원이 효율적으로 봉사 할 수 없음으로 한국에 주재하는 의료 선교사들이 큰 병원을 세우고 함께 일하면 효율적일 것이라고 인지했다. 병원시설의 개편문제는 같은 선교회 회원들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에비슨이 안식년이었던 1899년 10월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연례 모임에서도 일등급의 병원을 서울에 세우기로 하였다. 평양 주재 마펫도 좋은 병원을 세우는 것이 한국선교회의 공통된 견해라며 선교부에 최고급병원의 건립을 요청했다. 새 병원 건립의 열망은 에비슨이 1899년 첫 안식년을 맞아 모국으로 귀환했을 때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토론토대학의 동창이요 토론토의 한국 연합선교회(Corean Union Mission)회장이며 토론도 건축 설계사인 고든(Henry B. Gordon, 1855-1951)과 그의 비전을 논의했다. 에비슨은 40명을 수용 할 병원을 짓기로 계획하고 있고 적립된 금액은 없다고 실정을 얘기했다. 고든은 우선 설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에비슨에게 치료받은 무명의 여자가 $5을 기증했다.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뜻을 전하며 $10,000 의 모금을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III. 1900년 뉴욕에큐메니칼선교대회와 에비슨의 의료선교론
1. 1900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20세기가 시작되는 벽두에 청교도 전통을 이어오던 미국 개신교는 그간의 해외 선교 열풍에 따른 유례없는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를 뉴욕에서 개최했다. 19세기에 선교의 열풍이 일자 각 교단마다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기독교선교역사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에 따라 선교사학자 라투렛은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교회는 이민자의 나라여서 유럽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저마다 모국의 교파 교회를 세웠다. 이들의 교파교회가 선교현장에서 교파의 난립으로 교단간의 신학적인 논쟁과 불필요한 경쟁과 선교비의 중복 같은 문제로 연합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실이 ‘1900년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였다. 이 대회는 1896년부터 준비되었다. 북장로교선교부 총무 엘린우드가 집행, 프로그램위원이었다. 그 명칭부터 ‘1900년 뉴욕에큐메니칼선교대회 (1900 New York 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였다. 20세기는 태평양의 세기가 되리라고 내다보고 기독교의 전파를 위한 더한층 효율적인 선교를 초교파적으로 모색코자 함이었다. 이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는 1900년 4월 21일 (토)부터 5월 1일(화) 까지 뉴욕의 카네기 홀 및 인근의 7개 교회에서개최 되었다. 세계에 파송된 여러 교단의 선교사 대표들이 800여명이 참석했다. 현장의 경험들을 보고하는 프로그램이 발표의 주종이었다. 그 외 기업가들도 수백명이 참석하였다. 선교 현장의 선교사들과 선교를 후원 할 자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이 최대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으로도 적극 지원하였던 최대의 피선교지인 중국에서는 소위 의화단사건이 일어나 189명의 선교사가 처형당하는 비참한 일도 발생하여 선교대회의 분위기는 비장하였다. 미국이 세계 각국에 파송된 각 교파 선교사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선교에 관심을 가진 자 연인원 20여만명이 참석한 대규모 초교파 세계선교대회였다. 대회의 주제는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되라” 였다. 대회의 명예 대회장은 전 대통령 해리슨(Benjamin Harrison)이었다. 명예 부대회장은 뉴욕 상공회의 의장 제섭( Morris K. Jesup), 독일의 선교신학자 바르넥(Gustav Barneck) 등 32명, 총무위원회장 스미스(Judson Smith)와 위원 79명, 집행위원회장 캅(Henry Cobb)외 25명. 영접위원회장 브라운(Arthur J. Brown), 학생청년위원회 회장 모트(John Mott) 외 많은 부서와 부서장들로 구성되었다. 명예부대회장은 록펠러, 세브란스(L. Severance), 카네기를 비롯하여 400명이었다. 미국이 개신교의 나라임을 직시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이 대회의 역사적 개막은 4월21일 오후 카네기 홀에서 보스톤의 마비(Henry C. Marbie) 목사의 하나가 된 교회가 갖는 모임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대회장인 전 해리슨 대통령은 “이 위대한 모임의 혜택과 영향은 기독교인간의 연합(Christian Union)에서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가치는 미국내에서도 크지만, 교회의 분열로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선교현장에는 열배나 될 것입니다”라는 요지의 환영사를 했다. 매킨리(William McKinley)대통령과 뉴욕 주지사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도 환영사를 했다. 전 대통령 해리슨(Benjamin Harrison) 명예 대회장의 답사도 있었다. 전 대통령 크리브랜드 및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대리하여 캐나다의 총독과 수상도 참석했다.
2. 에비슨의 의료선교론과 뉴욕선교대회 역사적 이 모임에 주한선교사들 가운데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비롯하여 빈튼(C. C. Vinton), 베어드(W. M. Baird) 부부, 밀러(F. S. Miller), 해리슨(J. W. Harrison) 등의 발표도 있었다. 그 외 라이드(C. F. Reid)도 참석했다. 언더우드는 참석은 못했으나 원고는 보내었다. 에비슨은 4월 24일 센트랄장로교회에서 “한국에서의 성경(The Bible in Korea)" 4월 27일 센트랄장로교회에서 “선교지 교회의 자급: 중요성, 방법, 우연성(Self Support by Mission Churches: Importance, Methods, Incidents)에 대해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발표는 4월 27일 ‘병원 및 진료소 분과 위원회’ 주관으로 센트랄장로교회에서 “의료선교에 있어서 예양(Comity in Medical Mission)”이란 제하의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30일 오전 8시에 장소도 변경되어 카네기 홀에서 ‘의료선교분과 위원회’ 주관으로 있었다. 개성에서 선교하던 리이드(C. F. Reid)가 기도한 후 시리아 영국, 중국에서 온 의료선교사들의 발제가 끝났다. 에비슨이 오전 발표로는 마지막으로 등단했다. 청중석에는 5,000여명의 각국에서 파송되었던 선교사. 미국내의 기독교 기업가들이 주류였다. 특히 크리브랜드에서 온 우스터대학교(The University of Wooster)의 신임총장 홀든(Loise Edward Holden)과 그 대학을 설립하고 자선사업가로서 이미 명망이 높은 세브란스(L. Severance)도 있었다. 그는 당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탠다드석유회사(The Standard Oil Trust)의 경영자였다. 에비슨의 강연 제목은 “의료선교에서의 예양(Comity in Medical Work)”이었다. 이 제목은 엘린우드 총무가 제시한 것이었으나 에비슨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엘린우드는 한국에 의료선교를 지원하면 자립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고 에비슨을 적임자로 판단하였다.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의 의료분과 위원회에서 북장로교 파송 의사로서 에비슨 보다 한국에 먼저 파송된 빈튼의사도 이 대회에 참석했으나 엘린우드는 오직 에비슨에게만 발표하도록 했다. 에비슨은 그의 원고가 다른 사람 것 보다 단순하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얻기 위해 부인을 연단 앞에 앉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연설 도중에 원고 보다는 자기의 소신에 따라 연설했다. 그의 소신은 1900년 뉴욕에서 피선교지에서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그 예양(禮讓)문제는 여러 개의 작은 병원을 세우기보다 연합하여 하나의 좋은 의료기관을 설립할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요지였다.
1) 의료 선교 협동론 에비슨이 카네기 홀에서 발표 한 것은 의료선교협동론이었다. 그는 제중원 책임자로서 6년간 한국 의료선교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확립한 의료 선교 방법이었다. 스스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이론화하고 체계화한 보다 효율적인이론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각 교단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가 피선교지에서 소규모의 병원에서 혼자 활동하는 것 보다,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선교활동비를 함께 모아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시설을 갖춘 병원을 세우고 서로 협력하며 일한다면 훨씬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이었다. 에비슨이 활동하던 시기에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해외선교부와 영국성공회에서 파송되어 온 7인의 의사들이 서울에서 제각각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 병원들은 건물, 장비, 인력 수입 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다. 기본 이유는 자금의 부족이었다. 이는 선교단체들이 각각 선교비에 맞추어 병원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양적으로는 서울에 7개의 병원과 진료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9명의 의사와 6-7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이처럼 분산된 여러 개의 취약한 시설과 인력을 통합하여 하나의 병원을 만들면 많은 장점을 갖게 될 것으로 보았다. 보다 나은 장비, 많은 의사, 간호사가 있으면 어려운 수술을 할 수 있고 여러 의사들이 있으면 분업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전문적인 독서와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물론 의사들이 개인적으로 복음전도에 참여 할 시간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의사간의 교대도 할 수 있고 현지 토착주민들에 게 의학교육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를 실현할 구체적 3가지 방법도 제시했다. 1) 몇 개의 지역에 연합병원을 설립하고 각 교단이 미리 정해진 비율로 건물, 장비. 인력 관리에 기여토록 한다. 2) 각 교단이 맡고 있는 지역에 개별 병원을 설립한다. 그러나 병원은 그 지역에서 연합 병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3) 업무를 교차하는 원칙을 적용한다. 예를 들면 한 교단이 병원을 설립하면 다른 교단은 인쇄 업무나 교육 업무와 같은 다른 일을 하도록 한다. 2) 병원과 의과대학 병설과 동시 발전론 에비슨은 원래 4월 23일 갈보리교회에서 “의료교육(Medical Training)”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4월 25일 카네기 홀의 챔버뮤직 홀에서 발표했다. 에비슨은 피선교지에서 의료선교활동은 시설이 잘 갖추어진 병원 건립뿐만 아니라 양질의 지속적인 의학교육이 병행되어야함을 피력했다. 병원과 의과대학이 병설되어야 동시에 두기관이 발전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는 내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선교부가 의사 파송을 많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본토인 의사 양성을 최대한 빨리해야겠다고 계획했다. 피선교지에서 효과적인 의료선교를 위해서는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병원의 설립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토착인 의사를 지속적으로 길러내어 공급해야 됨을 일직 인식했고 이를 피력한 것이었다. 피선교지에 한두 명의 의사로서는 효율적인 의료 선교 활동에는 어려운 점이 많고 선교부에서는 인적, 물적 원인으로 충분한 의료진을 파송 할 수도 없는 실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의료선교병원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속적인 의사의 공급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선교부들이 파송교파를 초월하여 공동으로 토착 의료인을 양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병원을 운영하고 의학교육을 통해 의료진의 공급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 지속적인 의료선교라고 확신하고 이를 주창 한 것이었다. 3). 토착인 양도론 에비슨의 또 하나의 주장은 토착인 양도론 이었다. 선교사 경영의 병원과 의학교는 제대로 궤도에 오르면 피선교지의 토착인들에게 병원의 경영과 의료인의 양성 기관을 이양하여 스스로 운영토록 하는 것이 의료선교의 최종 단계라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 토착인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기술을 전수하고 훈련을 전제로 하였다. 에비슨은 병원장과 의학교의 수장으로서 세브란스 병원 및 연합의학교육 그리고 간호교육을 체제화 시키고 활성화 되도록 하였다. 여러 선교회의 성원을 힘입어 연합기구가 되도록 하여 외적인 규모와 면모가 쇄신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내실을 기하여 한국의학교육의 중추적 기관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1934년 그가 은퇴 할 때는 그의 아들 더글라스(Douglas Avison)가 에비슨의 자리를 승계하기를 원했다. 더글러스는 에비슨의 넷째 아들로 부산에 도착한지 3일 만에 부산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에서 자라나서 대한 애착이 깊었다. 한국 태생에 의학도 공부하여 부친의 일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에비슨은 자기가 세운 이론적 원리와 원칙에 따라 아들에게 양도하지 않고 한국인에게 지기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오긍선이 의학교의 수장직을 물려받았다. 그는 남장로교선교부의 협조로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남장로교 파송선교사로 세브란스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그 후에도 세브란스에서 계속 봉직했었고 1942년 일제의 선교사 추방령에 따라 캐나다로 돌아갔다. 해방 된 한국에 돌아오길 원했지만 못 오고 죽거든 뼈라도 묻어 달라는 유언 따라 그들 부부의 유해는 양화진에 묻혀 있다. 4). 에비슨의 에큐메니즘 에비슨이 뉴욕에서 발표한 의료선교의 이론과 실제는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 바탕이었다. 그의 에큐메니즘에 의한 선교관은 이미 초교파적인 토론토대학 YMCA에서 활동 할 때 부터였다. 캐나다에서 한국에 처음 파송한 선교사들은 미국과 달리 교파중심의 선교사들이 아니고 게일(James S. Gale, 1863-1937), 펜윅(Malcom Fenwick, 1865-1935),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와 같이 모두 토론토 대학 YMCA가 파송했다. 에비슨은 이때 초교파적으로 선교사 파송하는 일에 동조했다. 그 자신이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도 엘린우드 총무의 교파를 초월한 파송결정에서도 감동하였고 에큐메니칼 정신은 점점 다져졌다. 기독교는 한 주님, 한 하나님, 한 성령임을 확신한 그의 신앙행로는 교파에 억매이지 않고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의료선교사로 평생을 한국에서 헌신 하며 그의 지론을 펼쳐 나갔다. 한국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은 파송 교단 때문에 교파에 민감하나, 일반 교인들의 대다수는 교파심이 없는 것을 알았다. “부정한 세력이 점점가세하야 우리의 생활을 공격하는 이때에 기독교 세력은 가급적 밀접히 연결할 필요가 있지 아니한가? 하느님은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요, 성신도 하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왜 하나가 되지 못 할까? 만일 어떤 국가가 각기 정견과 정책이 상이를 따라 각 당파도 분열한다면 그 국가는 유지 할 수 있는가? 마태12장 25절에 예수 가라사대 무릇 나라가 분쟁하면 멸망하고 성이나 집이나 분쟁하면 서지 못하니라하셨고 마가 3장에는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서지 못하고 망한다 하셨다.” 이러한 성서적 신앙의 바탕에서 ‘의료선교 협동론’ 이 자유롭게 형성되었다. 그 주변의 언더우드, 엘린우드 같은 인물들도 초교파적이었다. 세브란스도 장로교회 장로였지만 초교파적으로 자선사업과 교회의 연합을 위한 운동, YMCA를 후원한 에큐메니칼 입장이었다. 에비슨은 1886년 3월 29일에 제중원 부속으로 시작된 의학교를 교파 연합으로 운영하리라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체계화해서 선교회의 주변 인사들에게 설득하고 전했다. 에비슨의 아이디어와 실천을 위한 노력으로 새 의료기관은 미국, 캐나다. 호주선교부에서 파송된 의사들이 연합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IV.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건립: 에비슨의 의료선교론 실현
1. 세브란스의 기부와 서울과 평양 선교지회의 갈등 에비슨이 카네기 홀에서 의료선교에 대해 발표한 후에 스탠다드 석유회사 사장인 세브란스(Luise H. Severance)를 만났다. 의료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세브란스는 에비슨의 발표를 듣고 공감하여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를 통해 에비슨을 만나게 되었다. 세브란스는 에비슨에게 연설가운데 우의(Comity)와 조화(Unity)라는 두 단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칭찬하고 다시 만나기를 원했다. 며칠 후 5월 2일에 에비슨은 세브란스를 다시 만났다. 에비슨은 카네기 홀에서 발표한 내용인 서울에 이미 숫자상으로 7-8개의 선교병원이 있지만 건물이나 간호사 하나도 없는 부실한 실정을 거듭 언급했다. 새 병원 설립의 계획, 의의, 전망에 대한 대화도 나누었다. 에비슨이 보여준 고든의 설계도도 보고 만족해했다. 신축비용은 $10,000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린우드는 에비슨에게 5월부터 10월 까지 6개월의 안식년을 연장하도록 제안했다. 새 병원 설립 모금을 위한 배려였다. 그 첫 기회로 4월29일 주일에 세넥타디 (Schenectady, NY) 교회에서 강연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 중국에서 사역하던 테일러(Hudson Taylor)와 인도의 토번(J. M. Thoburn )대주교도 동행했다. 그 교회에는 미국 최대의 기차 제작회사부사장 핏트킨(Walter Pitkin)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도 선교 후원에 동참하고 있었다. 핏트킨은 에비슨의 선교 병원 건립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후 $ 500을 기부했다. 세브란스는 미국장로교 선교부에 에비슨이 제의한 새 병원 건립을 위해 $10.000을 기부하겠다고 약정했다. 에비슨은 1900년 6월에 열린 북장로교 총회에 참석하여 간접적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브란스의 기부 소식을 듣고 에비슨은 $100만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세브란스는 우스터 대학에 기부할 때도 직접 전달하지 안했다. 얼마 후 세브란스와 에비슨이 만났다. 에비슨이 병원 설립을 위해 일년 반 동안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도와주어서 기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자 세브란스도 자기도 기도해 왔고 “받는 당신의 기쁨 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보다 더 크다”고 화답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의 후의에 감동하여 그의 여섯째 아들의 이름을 세브란스(E. Severance Avison)라고 지었고 한평생 아름다운 교제를 이어갔다. 에비슨이 세브란스가와 만남은 한해 전부터 있었다. 에비슨이 1899년 가을에 뉴욕의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에비슨의 새 병원 건립을 위한 모금을 해도 좋다는 통고를 받고 나올 때였다. 재무부장 핸드(Charles W. Hand)가 세브란스의 아들 죤 세브란스를 에비슨에게 소개 하 였다. 핸드는 세브란스가 떠나자 저 사람의 가족과 사귀기만 하면 병원을 지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세브란스가 에비슨을 도와 조선에 병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경로는 여러 관계로 파악된다. 세브란스와 그의 가정은 이미 극동,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 다닌 크리브랜드의 올드스톤 교회의 사라 아담스선교사와 허친스 목사가 선교를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선교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브란스는 중국 등주에 여학교 건물을 세운 바도 있었다. 세브란스는 선교병원 설립을 후원 할 곳을 물색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세브란스는 “우리를 드높이고 우리에게 용서의 마음과 미래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권세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중심의 기도를 매일 낮 12시에 하는 사람이었다. 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선교 열풍에 따라 중국에서는 이미 그 당시에 400여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다. 또 뉴욕선교대회 회기 중에 의화단의 난도 극동에서 다른 지역에 새 선교 병원 설립도 고려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도 병원 명목으로 7곳이 설립되어 있었다. 세브란스가 개인적으로 에비슨의 주장에 이끌린 것은 “현재 조선에 설립된 병원들은 건물, 장비, 사람 수입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금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각 선교부가 제대로 된 병원을 운영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예를 들면 7개의 병원과 진료소가 있는데 도합 9명의 의사와 6-7명의 간호사가 있습니다....”는 피선교지에서 힘을 모아 시설이 좋은 하나의 병원을 세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 것이었다. 세브란스의 한국선교와 에비슨에 대해서는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인 미첼(Arthur Mitchell, 1835-1893)과 엘린우드 총무를 통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세브란스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를 발행하던 호머 (Hulbert Homer, 1863-1949)와도 그 가족과의 연줄이 있어서 한국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가 경영하던 스탠다드 석유회사도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피어슨(Arthur Pierson)이 주관한 『미션나리 리뷰 오브 더 월드』(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란 세계적인 월간 선교잡지를 통해서도 한국선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빈톤을 비롯한 여러 주한 선교사들이 그 저널에 글을 게재했고 1897년 북장로교 선교부총무 스피어 (Robert Speer)의 한국선교 현장 방문기도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브란스의 기부 사실을 전해 듣고 고종 황제도 그 신축병원대지를 증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남산 아래의 땅이 선정되었으나 양녕대군 사당의 지맥을 끊는다는 관리들의 비협조적 태도로 이뤄지지 않았다. 남대문 밖 복숭아골 병원을 신축하면서 선교회의 의학교육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이곳의 부지가 새 병원 터로 지목되었으나 대금이 문제가 되었을 때 세브란스가 $5,000을 추가 기부하고, 이전의 구리개 병원건물에 대하여 조선 정부의 보상을 받게 되어 매입 할 수 있었다. 새 병원의 건립은 대지 문제뿐만이 아니라 주한 선교사들 사이에 거액의 기부금을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선교전력적인 면에서 서울선교지회와 평양선교지회의 의견이 상충되었다. 선교지에서 의사 개개인의 활동보다는 교파 간에 연합하여 제대로 갖추어진 하나의 큰 병원이 선교에 보다 효율적이라는 에비슨의 주장에 대해 평양지회를 중심하여 반기를 들었다. 오히려 병원의 확장과 의료선교 활동의 축소를 내세우며 그 비용으로 복음전파에 써야 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오천 달러만 병원 건축에 써야 하고 오천달러는 복음 전파에 써야 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미국의 선교부에도 제출했다. 마펫은 이미 언급한대로 한 해전에는 병원의 최신화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규모에 비례해야지 과도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헌트(William Hunt)는 그토록 많은 돈을 병원 건립에 쓰는 것은 죄라고도 했다. 미국의 선교부는 현지 선교회의 극심한 대립 안을 중재하려고 엘린우드의 뒤를 이은 브라운(Arthur J. Brown) 신임총무를 파견하였다. 에비슨은 브라운에게 병원 신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예정 된 스케줄에 따라 평양 지역을 방문하기 위하여 선교 현장을 살펴보는 가운데 큰 병원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걷거나 당나귀 타고 다녀야 했기에 통역 겸 길안내로 동행하게 되었다. 서양 의사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도처에서 환자들이 기다렸다. 황해도 장연에서는 에비슨의 제자 하나가 살고 있어 소문이 났고 많은 환자들 때문에 브라운도 에비슨의 수술을 돕게 되었다. 현장을 본 브라운은 에비슨과 선교지에서 큰 병원 설립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서울과 평양지회의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평양지회에서는 선교의 부대사업에 쓰이는 건물은 교회의 발전에 뒤 따라야지 앞서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나왔다. 기독교는 그 자체로 천명해야지 어떤 기관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종합 병원은 하나의 자선사업이고 오직 입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해야 할 사업이라는 안도 제기되었다. 병원 건물을 짓는 것은 세속적이고 영적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서울지회 선교사들은 물론 세브란스는 병원의 확장신축과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맞섰다. 언더우드는 의료사업은 단순이 전도 사업을 위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가서 병자를 고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고상한 사역이라고 맞섰다. 의료행위 자체가 선교라는 신학적 입장과 그것은 간접선교라는 차이였다. 또 서울에 병원을 짓는 데는 그 금액 전체가 사용되어야 하고 그 전에는 선교회에 이의가 없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선교부는 서울지회의 주장과 기부자의 전액을 병원 건축하는 데 사용을 원한다는 점에 따라 엘린우드 총무가 에비슨에게 백지위임장을 보내어 에비슨의 안을 승인했다. 평양측이 내건 마지막 조건은 10,000원의 경비로 병원을 신축하되 더 이상 신축하지 말 것과 병원 운영비도 연간 3,000원이하로 사용토록 요구하였다. 새 병원 건립은 근 2년여 지연되었고 이후에도 의사 추가문제, 간호사 고용문제에 양측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2. 에비슨의 세브란스 병원 신축 새 병원의 건축은 우여곡절 끝에 그 정초식이 1902년 11월 27일에 있었다, 병원을 세웠던 알렌이 미국공사로서 초석을 놓았다. 건축책임자는 고든(Henry Bauld Gordon, 1855-1951)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으로 낙스장로교회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설계한 저명한 건축가였다. 그는 이미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40명 수용 규모의 설계도를 무료로 작성해주었다. 세브란스도 이 도면을 보고 만족해했다. 고든은 새 병원신축을 위해 장기간 토론토의 건축회사를 떠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부터 파송 받아 1901년에 내한하였다. 건축공사는 중국인 헨리 장(張時英)이 맡았다. 난방시설과 배관시설은 기술자가 없어 고든과 에비슨이 하였다. 고든의 한국 체류비는 서류상 북장로교 선교부의 부담이었으나 에비슨은 그 실질적 재정 부담은 세브란스임을 암시했다. 고든과는 원래 1년 계약이었으나 러·일전쟁 및 다른 이유들과 물가의 변동으로 공사가 지연됨에 따라 그는 3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체류하다가 1904년 7월에 돌아갔다. 건축도중에 비용이 증가 되었을 때도 세브란스의 추가 희사로 병원은 완공되었다. 1904년 9월 23일에는 건물이 완성되어 봉헌예식이 있었다. 에비슨이 은제 열쇠로 병원 문을 열고 입장한 후 참석자들이 뒤따라 입장했다. 때마침 북장로교 한국선교회 연례모임의 회기 중이어서 선교사들도 이 개원식에 참석했다. 에비슨의 건축경과 보고, 휫트모어의 기도, 아담스의 성경봉독, 마폣이 봉헌기도, 언더우드가 설교를 했다. 본관은 약 40X 80피트이고 지상2층과 높은 천장과 채광이 잘되는 지하층으로 건립되었다. 지하실에는 난방시설과, X레이 공공 시약소, 2개의 대기실, 진찰실, 실험실과 약국, 약품 보관저장실, 부엌, 저탄소, 건조실, 세탁실, 시설도 갖추었다. 1층엔 의사실, X레이실, 관절치료를 위한 시설, 남자용 내과 병실 등과. 2층에는 수술실 멸균실 간호실 등등 한국최초의 서양식 종합병원이었다. 개원식은 11월 16일에 있었다. 에비슨 부인이 은제 열쇠로 첫 병원 문을 열고 언더우드는 개원식 축사를 했다. 에비슨 혼자인 의료진을 보강하기 위해 같은 해 북장로교 선교회는 두 번째 내과 의사로 허스트(Jasse W. Hirst, 許濟,1875-1934)를 세브란스의 비용 부담으로 파송했다. 세브란스는 격리병동 건립도 약정하여 1905년에는 완공되었다. 아버클(V. C. Arbuckle)과 같은 전문 간호선교사도 부임했다. 신축된 병원은 제중원이 아닌 세브란스병원으로 개명되었다. 이때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은 국왕폐하의 후의에 의해 1884년 알렌이 세운 왕립병원을 바로 승계한 것”이라고 병원의 전통을 천명하였다. 비록 이름은 바꾸었지만 제중원의 역사를 승계함을 알린 것이었다. 병원을 신축하면서 의학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901년에는 의학교의 학생수가 7명이었다. 의학 용어의 제정과 교과서도 편찬했다. 학생 조수란 말도 의학생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1908년에는 제1회 의학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한국 최초의 의술개업인 허가장이 주어졌다. 에비슨은 교장인사에서 한국인이 무지하고 무능하여 의학연구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라던 일본인들의 편협한 견해에 대하여 오히려 한국인의 능력을 모르는 무지라고 비판했다. 통감 이또히로무비가 내빈으로 참석한 졸업식석상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한 연설이었다. 1907년에는 세브란스는 그의 주치의 러들로(A. I. Ludlow)를 동반하여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병원과 의학교를 돌아보고 $30,000을 더 기부하였다. 그 후에도 그의 자녀들이 1926년 $10만을 비롯하여 1939년 까지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세브란스의 주치의인 러들로는 외과 의사로 내한하여 병원과 의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했다. 에비슨은 이후 세브란스가와 깊은 친교가 죽을 때 까지 계속되었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선교공의회가 구성된 후 에비슨은 그의 에큐메니칼 신앙과 의료선교 협동론 및 병원 의대 병설과 동시 발전론에 의거 한국 의료현장에 실현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1909년 에비슨이 한국선교회 회장이 되었을 때 서울에 교파가 연합하여 기독교 의학교를 설립키로 하였다. 그 이듬해에 세브란스의학교를 대체키로 결정하여 세브란스병원도 의학교도 각 교파 연합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북감리교, 남감리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의 교파연합에 의한 세브란스병원은 의료진의 보강과 재정의 지원으로 한국 굴지의 종합병원이 되었다. 의학교육도 보다 활성화 되어 여러 선교회의 성원을 힘입어 그 면모가 쇄신되었고 한국의학교육의 중추적 기관으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4년 그가 은퇴 할 때는 한국인으로 남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였던 오긍선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게 되었다. 부친의 자리를 원했던 더글러스는 해방 된 한국에 돌아오길 원했지만 못 오고 죽거든 뼈라도 묻어 달라는 유언 따라 그들 부부의 유해는 사후 양화진에 묻혔다. 에비슨의 의료선교 이론 따라 병원과 의과대학은 선교사상 유레 없이 성장, 발전하였다.
나오는 말
한국 의료선교의 최대공로자는 에비슨이었다. 알렌이 시작한 제중원을 에비슨은 그 체제를 선교부 주관으로 개혁하고 나아가 시설 좋은 병원을 신축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으로 개명·발전시켰다. 그의 이론, 꿈, 계획, 노력에 힘입어 세브란스의료원은 한국의 의료계와 고등교육의 토대와 발전, 후생 복지 향상에 기여하였다. 한국인으로서 양의가 한 명도 없던 상황에서 수많은 의사를 배출했고 오늘날에는 의술 또한 세계 정상급이 되었다. 나아가서 20세기 세계의료 선교사상 규모나 시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으로 가장 대표적 기관이 되었다. 1900년의 뉴욕에큐메니칼 선교대회는 에비슨이 이룬 세브란스병원의 신축과 세브란스의학교로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였다. 거기에서 그가 발표한 의료선교협동론과 이에 의거한 병원과 의대의 병설과 발전론 및 토착인에게 양도론은 가장 좋은 의료선교방안의 제시였다. 그의 이론은 그 자신에 의해 실제로 구현되었고, 세계교회 의료 선교에 가장 효율적임을 밝혔다. 그는 병원의 시설강화와 지속적 토착인 의사의 공급에 의한 의학교육의 외적, 제도적, 질적으로 향상 시켜 수많은 수준 높은 의사들을 길러내어 서양의학의 토착화와 의료기술의 향상을 이룩했다. 나아가서 에비슨은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 양교의 교장을 18년 동안 겸직하여 한국근대 고등교육에도 토대를 놓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0년대부터 종합대학 설립의 추진과 세브란스연합의전과 연희전문의 통합안도 내어 놓아 양교 통합의 터전도 마련하였다. 이 기구들은 장족의 발전을 하여 세계선교역사상 유례없는 굴지의 기관들이 되었다. 에비슨의 43년간에 걸친 한국 활동과 그 영향력에 대하여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952년3월 1일 이승만대통령이 자기의 상투를 잘라 준 에비슨에게 독립유공자상을 수상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1875-1965)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로 노벨상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료 활동은 의과 대학을 세우지 않아 의사가 후속되지도 못하여 후속적인 영향력도 에비슨 만큼 크지 못했다. 에비슨의 활동에 힘입어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은 세계 의료선교역사상 가장 좋은 모델이 될 정도로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 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오늘의 상황에서 그를 통한 한국교회에 주어진 사명은 그가 세운 기관들이 지난 한 세기 이상 잘 발전 한 것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물론 발전의 기본 사상인 에큐메니칼 정신에 의한 ‘의료선교 협동론’과 ‘병원과 의대의 병설과 동시 발전론’ 및 ‘토착인에게 양도’를 통한 선교 방법의 계승과 발전일 것이다. 이미 에비슨의 의료선교 방법은 한국교회에 계승되어 명성교회가 에티오피아에 병원을 세우고 이어 의과대학을 세우고 보다 발전 하면 토착인에게 양도 까지 계획하고 있다. 에비슨의 선교활동에 대한 바른 인식과 평가도 새롭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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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주제어: 에비슨, 뉴욕선교대회, 예큐메니칼, 의료선교 협동론, 세브란스, 고든, 제중원 English Key words: Avison, Severance, Ecumenical, medical mission, Gordon, Jejungwon
<국문 개요> 에비슨의 의료선교활동과 1900년 뉴욕선교대회
한국의 최근 의료 기술은 세계의 정상급이다. 그러나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도 서구식 의료시설도 빈약했고 의사 한명도 없었다. 다만 알렌이라는 미국북장로교 파송의 의사가 내한하여 1885년 제중원이란 병원을 세우고 명색만의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제중원을 개혁하고 새롭게 시작한 것은 에비슨이었다. 그는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였고 토론토시장의 주치의였다. 그는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육체적, 영적으로 의사가 필요한 한국인을 치유하기 위해 1893년 의료 선교사로 내한했다. 왕실의 재정적 지원을 받던 제중원을 완전히 선교부가 경영하는 기구로 개편하였다. 선교병원의 복음전파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시설면에서도 에비슨은 제중원을 새로운 현대식 병원으로 재건축하고 의료진을 확충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추진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피선교지에서의 효율적인 “의료선교 협동론”을 주창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국과 영국의 각 교단에서 파송한 7명의의료선교사들이 제각각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에비슨은 각 교단이 파송한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병원을 세우고 그 한 병원에서 근무하면 종합병원이 되고 시설과 운영경비도 절약하게 된다는 방안이었다. 이 생각의 신학적인 바탕은 에큐메니칼 정신이었다. 에비슨의 에큐메니칼 신학은 그가 선교사로 지원할 때에도 영향을 주어 감리교에서 장로교로 교적을 바꾸기 까지 한 것은 어느 교파이건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에비슨의 의료선교협동론과 병원 및 의대의 병설론이 공론화 된 곳은 1900년 뉴욕에큐메니칼 선교대회였다. 이 선교대회는 1900년 4월21일(토)부터 5월1일(화) 까지 뉴욕의 카네기홀 및 인근의 7개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명예대회장은 전대통령 해리슨(Benjamin Harrison)이었다. 맥킨리 대통령도 참석하여 환영사를 하였다. 수많은 재벌들이 명예부대회장으로 참석하였는데 선교사업에 기부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에비슨은 4월30일 카네기홀에서 “의료 선교에 있어서 예양(Comity in Medical Mission)”이란 제목으로 그의 선교지에서의 의료 선교 협동론을 발표했다. 그는 으병원고 의과대학의 동시발전론도 내놓았다. 이 주장에 호응한 세브란스(Luise H. Severance)가$10,000을 기부키로 하였다 새 병원의 건립기금을 둘러싸고 서울선교지회와 평양선교지회의 의견이 상충되었다. 에비슨을 비롯한 서울지회선교사들은 즉시 크고 좋은 병원을 건축하려고 했으나 평양지회 선교사들은 그 많은 돈으로 큰병원 건축보다는 작은 병원을 짓고 나머지 돈으로는 직접 복음전도하는 데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선교부의 브라운총무가 내한하여 현지 사정을 살펴 본 결과와 기부자의 뜻을 받아들여 에비슨의 뜻이 수용되었다. 고든의 설계와 건축 감독으로 1904년 현대식병원 건물이 완성되어 11월16일 개원식을 했다. 제중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고, 이름은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명되었다. 에비슨은 병원뿐만 아니라 그 병원의 발전은 토착인 의사의 지속적 공급이 있어야 함을 내세우고 의학교육도 강화해 나갔다. 1907년에 세브란스는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병원과 의학교를 돌아보고 $30,000을 더기부하여 총$50,000을 기부하였다. 오늘날 이 기관은 세계 의료 선교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와 연희에서 18년간 두학교의 교장으로 한국 근대의학과 고등교육에 공헌했다. 한국과 한국인은 의료계와 고등교육에 기여한 에비슨의 헌신과 공헌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의료선교 협동론”은 이어가야 할 한국교회의 유산이다.
O. R. Avison's Medical Mission Activity and 1900 New York 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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