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의 영성)
1.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영과 육과 혼으로 이루어진, 만물의 영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아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영성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의 피조물인 자연 그리고 그가 주관하는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창조적인 생명의 힘과 생기를 얻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적으로 각성하면 거룩한 절대자에게 신적인 본질을 질문하고 인간의 근본 뿌리를 찾는 경건한 자세를 갖게 된다. 인간의 영성은 만남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생동적 개념이요, 관계적 개념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고 타 존재와 만나는 것을 통해 영성이 생성되고, 고양되고, 거룩해 진다. 인간의 영성은 어떤 추상적인 지식이나 도덕이나 제도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도, 행동, 속죄, 선교, 내적, 외적, 관상, 활동을 통해, 전례적, 개인적인 양태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시간과 장소, 신학이나 수도회, 영성 단체 등에 따라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영에 나의 영이 반응하여 영적인 삶이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필연적으로 성령과의 동행을 뜻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림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는 인간의 영성이 시공간의 제약성, 역사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영성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이 다양한 영성의 유형들을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영성(spirituality)의 근본 뜻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2. 기독교 영성은 지난 2천 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어지고 추구되어왔다. 한국에 가톨릭교회의 전래와 개신교의 전래는 불과 1,2세기 전에 시작되었다. 그 얕은 역사 속에서도 거룩한 영의 역사로 한국 기독교인의 영성이 형성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의 영성은 20세기 초의 부흥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왕조의 붕괴에 정치적인 절망을 느끼는 한편 서구 선교사의 교육ㆍ의료 활동에 서구의 힘을 체감하며 서양 열강의 도움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는 이들이 있었다.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 인식은 분명하지 못하였다. 토론토대학에서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감리교 선교사가 된 로버트 하디는 원산지역에서 사역하는 동안 자기 선교를 돌아보고 열매가 적은 것을 회개하였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그의 참회가 전국적인 회개운동으로 확산되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부흥운동의 불꽃이 온 나라에 퍼졌고, 조선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영성의 중심은 참된 회개였다. 회중이 큰소리로 각자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는 통성 기도를 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였다. 새 사람이 되는 중생의 역사가 집단적으로 일어났었다. 그 결과 새로이 윤리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교회도 급성장하였다. 블래어 (William Blair, 방위량) 선교사는 이때의 일을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와 흡사하였다고 평하였다. 복음에 기초하여 세워진 영성이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사경회를 통해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배우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고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통성 기도를 하며 통회 자복을 하였고, 나아가 매일 여는 새벽기도회를 공적인 교회 모임으로 제도화하였다. 세계적으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제도였다. 신구약 성경도 이 무렵 완역되고 출간되어, 교회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여 약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이러한 복음주의 영성이 많이 약화되었고, 관심이 사회적인 방면으로 많이 전환되었으며, 신사참배와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교회가 점차 피폐해져 갔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비주의 경향도 강하게 나타나, 이용도 목사 등과 같은 부흥사들의 영성이 괄목할 만큼 표출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비참한 민족적 아픔을 겪고 폐허 속에서 통회하며 기도하는 영성을 이어갔다. 남북의 분단과 좌우의 이념적인 갈등 속에서 방황하기도 하였지만, 피폐한 현실 속에서 소망을 담은 부흥운동의 영성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신유와 기적들을 동반한 오순절 계열의 은사주의 영성이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제의 부흥과 발전을 최고의 목표와 가치로 여기던 시대 상황 속에서, 부흥운동의 물결이 물질 축복과 육신 치유 등의 외적 차원들에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하게 만드는 경향을 유발하였다. 균형을 잃은 영성으로 변질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한국교회는 그 대안으로 제자훈련, 성경공부, 셀 모임, 두 날개 운동 등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예수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셨다. 쉰다는 것은 온유와 겸손을 배운다는 의미이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멍에를 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성을 찾는 방법은 말씀을 대면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있다. 예수의 영성을 가진 자는 변화된 삶을 산다. 회개와 칭의, 중생과 성령체험의 복음주의적(evangelical) 영성으로 한국교회는 든든히 서 왔다. 한국교회의 역사적 주류교단인 감리교 신앙의 핵심은 체험(믿음의 확증)과, 거룩한 생활(성화)이다. 구원의 확증을 위해 체험적 신앙, 곧 성령체험을 중시하였다. 장로교는 칼뱅을 좇아 구원의 확신을 위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러한 교리와 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두 교단이 한국 개신교회의 주류로 영성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교회는 사회적 격변 속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보다 감성적 부흥회 중심으로 점차 변하였다. 오순절주의(Pentecostal)가 확산하면서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한국교회에 오순절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다.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와 평신도 여선교사 메리 럼지 등에 의해 한국교회에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고, 한국 최초의 오순절교회가 세워졌다. 오순절 운동은 6.25 전쟁 이후에 더욱 확산되었다. 비록 이단성 시비도 있었지만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 장로교의 박태선 장로, 성결교의 양도천 목사 등이 이 시기에 성령운동을 주도하였고, 1960년대부터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오순절 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전쟁으로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진 가운데 신유와 방언 같은 은사들을 강조하는 집회가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나타내었다. 오순절 운동은 개혁주의가 지배적인 한국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말씀보다 체험, 성결보다 능력, 고난보다 영광에 몰두했던 오순절 운동은 일부 교단에서 극단적 열광주의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오순절 운동은 한국교회에 긍정적 공헌도 하였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초대교회 시대에 한정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입증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생활에 입문하게 되었고, 한국교회에 영적 동력을 회복시켜줌으로써 부흥과 성장도 가져왔다. 1970년대 전후부터 부흥회, 금요 철야 기도회, 기도원 등을 중심으로 소위 은사집회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고, 은사를 위해 기도하고, 은사를 받고, 은사를 나누고, 은사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변하였다. 교단의 구분을 뛰어넘어 방언과 신유 같은 신비 현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신사도운동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다. 3. 한국교회의 특이한 형태의 영성은 새벽기도의 영성이다. 기도로 새벽을 깨우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영성은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 때 길선주 목사에 의해 교회에 정착되었다.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새벽기도회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새벽기도의 영성은 해외선교사들에 의해 피선교지에서도 시행되어 세계적이 되었다. 한국은 서구인에 의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민간 종교로 새벽에 정한수를 제물로 놓고 비는 전통이 있었다. 불교계도 이른 새벽부터 예불을 하였다. 평양의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을 때, 숫자는 적었지만 영적인 영향은 컸다. 한국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어도 새벽기도회 참여자는 늘어났다. 서울의 명성교회는 매일 4부에 걸쳐 2만여 명이 참여하여 교회성장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영성을 일깨웠다. 필라델피아의 에논(Enon Tabernacle Baptist)교회는 명성교회의 새벽기도예배를 도입하여 364명이던 교회가 14,000여명이 출석하는 개교회로 성장하였다.
4. 한국교회의 영성에서 가장 높이 흠모를 받은 것은 순교적 영성이다. 순교적 영성은 한국교회의 초창기부터 존재하였다. 십계명의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순종하기 위해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 초기에 유교 전통의 제사의례를 배척하여 일만여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개신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신도(神道)의식을 좇는 신사참배에의 강요를 거부하여 주기철 목사 외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해방 후에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자의 박해로 아직 그 숫자마저 파악되지 않았지만, 최대의 순교자를 내었다. 전라남도 영암포의 한 교회에서는 70여 명의 교인이 모두 한 우물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순교적 영성은 각자의 생명을 주를 위해 바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가장 완전한 신앙을 지향하였다. 순교를 통해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일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이러한 영성이 나타났다. 한국교회의 순교역사 자체가 놀라운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이 영웅적으로 죽음 앞에서도 침착하고 평온한 기쁨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의 교인인 천민 출신의 황일광은 1801년 박해 때에 체포되었을 때 천국을 확신하고 빨리 처형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5.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경제 번영과 도시화, 산업화의 영향으로 수도원주의(Monasticism)적인 영성을 전보다 더 추구하였다. 서구의 초대교회나 중세의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노동과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이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경제 발전 이후 수양관, 기도원을 세우고 그러한 영성을 강구하였다. 도심에서 먼 깊은 산속에서의 산기도가 대표적인 영성 추구 양태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주로 19세기 말부터 청교도적 미국 선교사의 지도 아래 보수적, 복음주의(Evangelicalism)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전통 위에서 오늘날 보수주의 교단은 ‘개인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고, 반면에 진보주의 교단은 ‘사회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보수적인 교회가 추구한 영성은 경건주의적 영성, 신비주의적 영성이었다. 한국교회에서 민족의 독립과 문화 변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영성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계속되는 식민통치 아래 교회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으면서 ‘개인 영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보수주의 개인적 영성을 사회적 영성보다 우선시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인 영성을 저해시키지 않지만, 보수주의 안에 그렇게 할 위험성을 내포되어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보수주의의 장점은 절대와 상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를 혼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수주의는 쉽게 잊곤 한다. 진보적 교회는 보수적 교회의 영성 추구에 대한 반작용으로 1960년대 이후 세계교회에 등장한 소위 ‘사회적 영성’ 또는 ‘해방의 영성’이라고 불리는 영성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영성 이해는 인간의 내면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공공적인 차원에서 이끌려 나왔다. 이러한 이해에 기본을 둔 영성운동은 세계평화, 정의와 자유, 인간해방, 생태계 보존 등에 깊은 관심을 둔다. 정치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의 영성신학이 이런 사회적 영성의 범주에 속한다. 진보주의적 영성 이해는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영성을 강조한다. 사회복음주의(Socio-evangelicalism)적 영성을 필두로, 민주화운동과 짝하여 현재 진행 중인 환경보호운동, 경제정의 실천운동, 여성운동 등과 같은 것들이 사회적 영성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교회와 분리된 사회적 영성은 신자들이 실천을 등한하게 하기도 하였고, 건전한 사회적 영성과 불건전한 사회적 영성을 분간할 수도 없게 만들기도 하였다.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시대적 아픔과 사회구조적인 문제 앞에서 무책임했던 자신들의 무지, 무관심, 무책임, 비겁함을 통렬히 자각하고, 예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군사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현장 체험과 신학적 반성의 결과물이 바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였다. 군사정권 아래 인권이 유린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며 독재와 분단이 정당화되는 정치적 암흑기에 민중신학은 정교함과 완성도 면에서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적어도 정치, 사회 문제를 신학 안으로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 보수 신학의 관념론적 한계를 일정 부분 극복하였고, 신학의 시대적 책임과 실천적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6. 한국교회는 한 세기를 지나는 동안 다른 나라에 비할 수 없게 눈부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8·15 해방으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6·25전쟁의 참화와 공산주의의 박해에서 벗어나 196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교회가 세계 선교사상에 유례없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성장이 멈추었지만, 오늘날도 4만 교회와 1,000만 신도를 보유하고, 25,000여 명의 선교사를 외국에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성장 속에서 질적으로 미성숙한 여러 가지 병리 현상을 동시에 나타내었다. 그런 가운데 문제의 원인을 ‘영성의 결여’, 혹은 ‘영성의 퇴조’라고 전제하면서 해결책의 하나로서 예배의 영적갱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한국교회 영성훈련의 역사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그것은 ‘기도훈련’과 ‘말씀 훈련’이었다. 그리고 ‘기도훈련’에는 통성기도, 중보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새벽기도, 산상기도 등이 있었다. 영성을 개발하는 영성훈련의 이 두 핵은 과거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은 삶 자체이다. 삶으로 구체화 된 영성이 예수의 영성이다. 이를 얻기 위한 훈련으로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영성훈련이 ‘렉시오 디비나’(성경 독서 기도법)이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좋은, 성경적 영성훈련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독서가 기도로 연결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한 영성의 추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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