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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이야기 10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1 [17:58]

언더우드이야기 10

최재건 | 입력 : 2020/12/11 [17:58]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0) 결혼과 신혼여행 기사의 사진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상대는 릴리아스 호튼(Lillias Horton). 의료선교사로서 언더우드보다 8년 연상이었다. 호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의사였다. 그녀는 여성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인 1888년 3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성 의사가 귀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됐던 길을 버리고 미지의 나라 조선을 향했다. 선교사로 평생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던 그녀는 ‘선교사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선교관이 같았던 호튼과 언더우드의 결혼은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더 효율적으로 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혼여행이 선교여행으로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이용해 북한 답사 계획을 세웠다. 여행의 관심사는 선교지회의 장소를 어디로 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주와 평양을 염두에 두었다. 그곳에서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팔면서 전도하는 권서인들을 돌보고 기독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했다. 폭력을 제외한 온갖 반대가 그들에게 제기되었다. 남자들도 안 가는 곳을 외국인 여성이 가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성 선교사도 지방 여행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간남자와의 접촉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에 여성을 위한 선교는 여성만이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자 선교사가 지방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만 해도 큰 공헌을 하던 시절이었다. 반대자들은 신부가 돌아오게 된다면 죽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본부도 여의사의 활동이 위축될 것을 염려해 이 여행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우리 둘이 결혼함으로써 더 많이 쓰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선교여행은 일종의 시험이 될 것입니다”라고 3월 11일자 편지로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그들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89년 3월 14일 신혼여행을 떠났다. 어려운 여행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항상 보호해주신다는 믿음과 사명으로 출발했다. 그들보다 앞서 결혼한 벙커와 애니 앨러스 선교사 부부는 반대 앞에서 그런 여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갔으며 때로는 걷기도 했다. 사실 가마를 타기보다는 신랑을 따라 걸을 때가 더 많았다. 말을 탈 수도 있었으나 당시에 말 타는 여자는 기생 같은 천민 신분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요단강 세례’ 베풀다

여행의 주요 방문지는 송도 평양 강계 의주였다. 그들이 도중에 잠을 잘 때는 볏짚을 한 발도 넘게 깔고 그 위에 일본식 매트와 이부자리를 폈다. 온돌방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와 빈대, 벼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서양 여성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은 어디에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밤에는 창호지를 뚫었고 낮에는 무턱대고 몰려들었다. 강계에서는 피신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돌림병이 도는 곳을 포함해 도처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다. 산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고, 조수와 말과 마부들이 납치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총을 써야 할 형편에서도 그들은 선교사였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붙잡힌 8명의 산적들에게는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과자들로서 이전에 일본인 여행객 한 명을 살해한 자들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범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많은 배상을 해야 했다.

언더우드 부부 일행은 여러 곳에서 대접을 받았다. 원님을 대접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 송도에서는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의주에서는 100여명의 수세 지원자 중 33명을 선발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올바른 사람을 수세자로 뽑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딘스모아 미국 공사는 ‘기독교 사업’을 하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언더우드는 의료사업을 기독교 사업이라고 여겨 전도하거나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해 공사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수세 지원자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국경을 넘는 일은 그가 출발 전 중국 통행증을 받아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이 압록강 세례 사건이었고 이 일은 일명 ‘한국의 요단강 세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신혼여행을 겸한 제3차 북한 선교여행은 2개월여 만에 끝났다. 1600㎞의 대장정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가 세례를 베풀었으며, 사경에 처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모든 여정을 통해 600여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여행에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선교책자를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그들 마음속에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심었다. 또 개종자들을 격려하고 장래의 선교 가능성을 확인했다. 언더우드는 부부가 협력하는 선교사업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과 여성도 지방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770902&code=23111117&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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