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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이야기 14

왕실과 친교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6 [17:24]

언더우드이야기 14

왕실과 친교

최재건 | 입력 : 2020/12/16 [17:24]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4) 언더우드와 왕실과의 관계 기사의 사진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의 시의였다. 그의 회고록 ‘상투잡이와 함께 보낸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는 궁중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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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에게는 천민부터 왕실까지 모든 계층이 선교 대상이었다. 고아원을 세웠던 그는 왕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선교사들이 왕실과 가까워진 동기는 1895년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그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데에 있었다. 왕실은 처음에 선교사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남을 돕는 이들로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공개적으로 언더우드를 형제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고종의 통역으로도 활동했다. 고종은 기독교 발전이나 국가 복지, 지방 수령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1851∼1921)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것도 왕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된 요인이었다. 명성황후는 릴리아스에게 외국의 풍습과 크리스마스에 대해 물어보고 선물을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선교사들이 궁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는 거의 모든 권력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왕실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언더우드 부부가 이처럼 왕실과 친분 관계를 맺은 기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에 있었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95년을 전후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이 전개되면서 국내외적인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선교사들도 정치 상황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에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명성황후가 배일친러 정책에 관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895년 10월 8일 저녁 일본인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했다. 고종은 궁궐에서도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 그러자 고종으로부터 많은 친절과 호의를 받아온 언더우드와 다른 선교사들이 온갖 방법으로 왕을 도우려 했다.

고종은 음식도 언더우드의 집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준비해간 것만 먹을 정도로 그들만 믿었다. 음식 검역은 에비슨 선교사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의 통역을 맡고 한밤중에 궁궐을 숙위(宿衛)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왕의 주변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윤웅렬 장군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이어(移御)하려다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후에는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일시 머무른 ‘아관파천’도 발생했다.

그런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가장 신뢰를 얻었다. 그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전도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1896년 9월 2일과 이듬해 8월 23일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탄신을 축하하는 만수절 행사 개최를 주선했다. 10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만국기를 달고 무대와 제반 시설을 갖추고 정부 관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

그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에도 교회가 임금을 섬기기를 극진히 충성하라는 구절을 창간사에 실었다. 순서지도 만들어 미리 배포했다. 여기 실린 찬양가는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이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를 보우하소서. 우리 대군주폐하 만세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나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옵소서…’라는 가사로 되어 있었다.

1894년에 그가 간행한 ‘찬양가’에도 고종 탄생을 축하하는 곡들이 있었고, 애국충군적인 찬양가도 포함돼 있었다. 축하 모임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찬송과 기도로 시작돼 설교와 축가, 주기도문으로 끝났다. 예배는 기독교가 애국과 충성을 권하는 종교인 것과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만 나라가 번영한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왕실과 우호 지속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엄비의 주치의로서 계속 친분을 가졌다. 이때는 하란사가 통역을 하였다. 하란사는 인천 감리와 결혼해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학사가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교육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언더우드는 1897년 봄 의화군(義和君) 강(堈)의 유학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의화군은 한때 언더우드의 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언더우드를 미행했다. 고종은 의화군이 미국에 가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언더우드는 왕자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갈 준비를 몇 년 하고 대학을 마치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1년 정도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미국 해외선교부에 요청했다. 일제는 왕자의 미국 유학을 막으려 했다. 나중엔 언더우드가 왕자를 미국까지 모시지 못했고 가톨릭 신자가 수행하게 됐다. 언더우드는 그 후로도 왕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다.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4) 언더우드와 왕실과의 관계 기사의 사진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의 시의였다. 그의 회고록 ‘상투잡이와 함께 보낸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는 궁중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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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에게는 천민부터 왕실까지 모든 계층이 선교 대상이었다. 고아원을 세웠던 그는 왕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선교사들이 왕실과 가까워진 동기는 1895년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그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데에 있었다. 왕실은 처음에 선교사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 남을 돕는 이들로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공개적으로 언더우드를 형제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고종의 통역으로도 활동했다. 고종은 기독교 발전이나 국가 복지, 지방 수령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1851∼1921)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것도 왕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된 요인이었다. 명성황후는 릴리아스에게 외국의 풍습과 크리스마스에 대해 물어보고 선물을 보냈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선교사들이 궁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는 거의 모든 권력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왕실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언더우드 부부가 이처럼 왕실과 친분 관계를 맺은 기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에 있었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95년을 전후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이 전개되면서 국내외적인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선교사들도 정치 상황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에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명성황후가 배일친러 정책에 관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895년 10월 8일 저녁 일본인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했다. 고종은 궁궐에서도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 그러자 고종으로부터 많은 친절과 호의를 받아온 언더우드와 다른 선교사들이 온갖 방법으로 왕을 도우려 했다.

고종은 음식도 언더우드의 집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준비해간 것만 먹을 정도로 그들만 믿었다. 음식 검역은 에비슨 선교사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의 통역을 맡고 한밤중에 궁궐을 숙위(宿衛)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왕의 주변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윤웅렬 장군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이어(移御)하려다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후에는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일시 머무른 ‘아관파천’도 발생했다.

그런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가장 신뢰를 얻었다. 그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전도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는 1896년 9월 2일과 이듬해 8월 23일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과 함께 고종 탄신을 축하하는 만수절 행사 개최를 주선했다. 10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만국기를 달고 무대와 제반 시설을 갖추고 정부 관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

그가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에도 교회가 임금을 섬기기를 극진히 충성하라는 구절을 창간사에 실었다. 순서지도 만들어 미리 배포했다. 여기 실린 찬양가는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이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를 보우하소서. 우리 대군주폐하 만세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나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옵소서…’라는 가사로 되어 있었다.

1894년에 그가 간행한 ‘찬양가’에도 고종 탄생을 축하하는 곡들이 있었고, 애국충군적인 찬양가도 포함돼 있었다. 축하 모임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찬송과 기도로 시작돼 설교와 축가, 주기도문으로 끝났다. 예배는 기독교가 애국과 충성을 권하는 종교인 것과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만 나라가 번영한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능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왕실과 우호 지속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엄비의 주치의로서 계속 친분을 가졌다. 이때는 하란사가 통역을 하였다. 하란사는 인천 감리와 결혼해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학사가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교육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언더우드는 1897년 봄 의화군(義和君) 강(堈)의 유학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의화군은 한때 언더우드의 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언더우드를 미행했다. 고종은 의화군이 미국에 가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언더우드는 왕자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갈 준비를 몇 년 하고 대학을 마치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1년 정도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미국 해외선교부에 요청했다. 일제는 왕자의 미국 유학을 막으려 했다. 나중엔 언더우드가 왕자를 미국까지 모시지 못했고 가톨릭 신자가 수행하게 됐다. 언더우드는 그 후로도 왕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799970&code=23111117&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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