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언더우드이야기 16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6 [17:40]

언더우드이야기 16

최재건 | 입력 : 2020/12/16 [17:40]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6) 언더우드와 YMCA 기사의 사진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은 조선 젊은이와 상류층 복음화를 위한 시작이었다. 사진은 서울 종로2가에 세워졌던 YMCA 회관 건물로 6·25전쟁 때 파괴됐다. 국민일보DB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언더우드는 선교의 문을 젊은이들과 상류층으로 확대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선교 초기 교회에는 부녀자와 노인이 많았다.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이라는 4계급이 뚜렷하던 당시 사회에서 고아나 갖바치, 백정, 기생 같은 천민들이 먼저 개신교와 접촉한 것이다. 하층민들이 교회에 먼저 나오게 된 것은 양반들이 가톨릭을 접했다가 핍박을 받으면서다.

당시 양반 등 상류층은 개신교보다 100여년 앞서 가톨릭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제사 거부를 비롯한 여러 이유들로 장기간 박해를 받았고 1866년부터 수년간 8000여명이 순교하자 같은 서양 종교인 개신교에 대해 문을 닫고 있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뿌린 기독교 복음의 씨앗은 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로 서서히 자라났다. 선교사들은 전란 때에도 피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양반들은 이를 지켜봤다. 그러나 하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반상(班常)의 차별이 심해 한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고, 언어에 존대체가 있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양반들이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천민들과 한자리에 앉아야 했기 때문에 변장을 했고 때로는 자기 집 하인을 보고 당황해했다. 언더우드는 이 모든 광경을 목도했다.



지식층 청년을 위해 YMCA 설립

언더우드는 젊은 상류층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큰 과제로 여겼다. 그는 ‘청년’이란 말이 없던 시대에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청년들을 교회로 이끌 방안을 구상했다. 당시 기독 청년은 주로 하류층으로 150∼200명 정도가 있었다. 서울에는 5만여명의 청년들이 살고 있었는데 조선 청년들은 혈기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없었다. 공원과 도서관은 물론 오락이나 스포츠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랑방에 모여 노름이나 하고 주막이나 드나드는 정도였다.

언더우드는 상류층이나 지식인이 모일 수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하는 것이 한 방책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아펜젤러와 공동 명의로 뉴욕에 있는 YMCA 국제위원회에 한국에도 YMCA를 설립해 주기를 요청했다. 150여명 청년들의 진정서도 같이 보냈다. 그러자 YMCA 국제위원회가 돕겠다고 회답했다.

회원은 정회원, 준회원, 명예회원으로 했고 이사회는 선교사들과 정회원으로 구성하게 하였다. 실무 간사로는 영국과 미국에 다녀온 한국인을 두기로 하였다. 회관은 아펜젤러의 집을 사용하기로 했다. 2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청원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정치 단체를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고 설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중국 톈진에서 YMCA를 창설했던 라이언(D W Lyon) 선교사가 이 무렵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중국 산둥과 베이징의 서양선교사 189명을 죽인 의화단사건(1900년)으로 중국인들이 선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살해하던 시기에 한국으로 피신해 있었다. 라이언은 언더우드를 만나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었고 이를 뉴욕에 보고했다.

뉴욕의 YMCA에서는 훗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존 모트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모트는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인물로 질레트(Philip L Gillett, 吉禮泰)를 선정하여 파송했다. 그는 지식층 젊은이를 다룰 수 있는 인재였다.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다재다능한 데다 다양한 문화에 대해 열려 있었던 사람이었다. 질레트는 미국 콜로라도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1년 반을 공부한 후 예일대 YMCA에서 전도목사로 봉직한 경력도 있었다.



연희전문 설립의 발판이 되다

한국에 온 질레트는 언더우드 등의 환영을 받고 먼저 한국어 공부에 몰입했다. 주일을 제외하고 주중 8시부터 4시 반까지 1년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이와 함께 어느 계층의 젊은이들을 전도하고 참여시킬 것인지 고민했다. 그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로부터 현장의 사정을 청취했고 상류층의 젊은이들과 접촉하기로 했다.

그 무렵 조선에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돼 기독교서적을 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상재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유성준 신흥우 이승만 윤치호 전덕기 등이었다. 질레트는 이들을 YMCA로 끌어들여 민족운동의 맥이 이어질 수 있게 하였다. 미국의 백화점왕 워너메이커의 기부로 모금에도 성공해 1908년 종로2가에 회관을 건축했다. 질레트는 청년들과 더불어 등산도 하고 성경반도 조직했으며, 야구 등 스포츠도 한국에 도입했다.

언더우드는 YMCA를 통해 젊은이와 상류층을 교회로 끌어들여 선교의 문을 확장했다. 그는 YMCA 회관의 건축 부지를 마련하는 데에도 기여했고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은 마침내 그의 필생의 꿈인 조선기독대학(연희전문)에서 젊은 지식인을 직접 길러내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그 대학의 강의가 YMCA 회관에서 시작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11775&code=23111117&sid1=chr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뉴스
메인사진 없음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1/5
교회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