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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이야기 15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6 [17:54]

언더우드이야기 15

최재건 | 입력 : 2020/12/16 [17:54]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5) 언더우드와 연합사업 기사의 사진
1911년 YMCA 모임에서 언더우드가 참석해 찬송을 부르고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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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초교파주의자였고 연합운동의 선구자였다.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 에큐메니컬 신학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한국에 교파 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1885년 4월 5일 그와 나란히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도 교파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정동에 각각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세웠으나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했다.



교파 구별 없는 하나의 교회 설립을 꿈꾸다

1888년 1월 1일 그들이 세운 정동감리교회와 정동장로교회(새문안)는 첫 번째 연합기도회를 가졌다. 선교활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시작할 무렵인 1893년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협정을 맺었다. 1893년에는 장로교공의회(The Presbyterian Council)라는 연합기구를 조직했다. 미국의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개의 외국 장로교선교회가 하나의 장로교를 형성해 하나의 신학교를 세웠다. 남·북 감리교선교회도 나중에 하나의 신학교와 하나의 교단을 이룩했다.

1905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선교사 150명이 모여 주한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의장에는 언더우드가 추대되었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모든 교회가 교파 구별 없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하나의 한국교회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1890년부터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세워 교회 서적의 출판을 같이했다. 서회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탄생했고 그 자신이 초대, 5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 활동은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그가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성경 번역도 타 교파 사람들과 같이 했다.

언더우드 주도 아래 공의회는 학교와 병원도 공동으로 경영하기로 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주일학교 공과도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찬송가, 신문도 같이 발행하기로 하였다. 그 전까지 언더우드는 자신의 편찬 노력과 형의 재정 지원으로 찬양가를 독자적으로 발행해 10여년 동안 사용해왔다.

‘그리스도신문’도 일부 동료들의 협조를 얻어 독자적으로 발행했다. 그러다가 공의회 조직을 기해 자신이 주관하던 찬양가와 신문을 중단시켰다. 연합을 위해서였다. 미국의 개신교회는 교파마다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는 하나의 찬송가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자기애에서 벗어나는 결단으로 한국에서 이런 연합의 결실이 맺어지게 했다.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선교사들을 위한 영문 월간지 ‘The Korea Mission Field’도 함께 발행하게 했다. 이 잡지는 주한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해외에 한국 선교와 교회 소식을 알리는 유일한 월간 언론매체였고, 지금은 한국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되었다. 교파를 초월한 한국청년운동(YMCA)도 언더우드가 출범시켰다.



선교지 분할, 부흥운동에도 연합

언더우드는 장·감 교파 선교회들이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활동 구역을 나눈 선교지 예양을 추진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문제는 근 5년의 세월을 설왕설래하며 흘려보내다 그의 결단으로 확정되고 실행되었다. 그 결과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경상북도는 미국 북장로교가, 함경남북도와 만주는 캐나다 장로교가, 전라남북도는 미국 남장로교가, 경상남도는 호주장로교가, 경기도와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은 미국 남북감리교 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선교하게 되었다. 서울과 평양 같은 큰 도시는 양 교파가 다 같이 활동했다. 그러나 애초에 바랐던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은 이 교계 예양으로 인한 지역분할 고착과 본국 교회와의 관계, 기타 여러 사정 등으로 이룩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연합운동은 부흥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9∼1910년 한국 선교 25년을 기리면서 ‘백만명구령운동’이란 부흥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의장을 맡아 주도했다. 당시 이 운동은 목표 숫자에 미달하면서 실패작이었다고 흔히들 규정하고 있지만 1960년대 등장했던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로 시작된 전도운동이나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엑스플로74에서도 애초 목표로 세웠던 숫자가 달성된 적은 없었다.

백만명구령운동 때에는 많은 신도들이 하루를 온전히 전도를 비롯한 사역에 헌납하는 날연보(day offering) 로 헌신 봉사했고, 70만권의 성경이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때는 성경이 전부 번역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신약과 쪽복음 위주로 보급되었다. 언더우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사 55:11)란 말씀을 확신하면서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그런 믿음으로 한 손은 중국에, 한 손은 일본으로 뻗어 한·중·일 3국에 기독교권을 형성해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비전을 통해 교회가 힘을 모으는 데 앞장서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도록 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06157&code=23111117&sid1=mis&si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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