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언더우드이야기 19

대학창립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6 [18:09]

언더우드이야기 19

대학창립

최재건 | 입력 : 2020/12/16 [18:09]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19) 대학설립 기사의 사진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란 이름으로 개교, YMCA 건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사진은 창립 당시 기념 촬영 모습. 국민일보DB
언더우드 교육선교의 정점은 대학 설립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사회가 개화하지 못한 것은 필요한 지식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신분제도가 철폐돼 누구나 학문과 지식을 넓히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 이런 사회 변화에 앞서 사람의 마음을 개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 지식의 확산을 위해 처음부터 서구식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초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무상 교육에 무상 급식은 물론 목욕까지 시켜줘도 싸늘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교육선교를 경시한 동료 선교사들에 의해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교가 폐쇄되기까지 했다.



서울에 대학 설립을 반대했던 선교사들

그러나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1905)을 겪고 나면서 서구식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달라졌다. 기독교 인구는 급증했고 교회와 학교, 학생도 늘었다. 배재학당과 숭실학당에서는 대학부가 운영됐다. 언더우드는 초중등 교육기관을 설립한 후 불굴의 의지로 에비슨(O R Avison)을 도와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의 설립을 관철시켰다.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을 오랫동안 계획하고 추진해 왔다. 1889년에 이미 대학 설립 문제로 조선 정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명성황후와도 1895년 논의를 거쳐 실현을 앞두고 있었으나 시해사건으로 허사가 되었다. 그가 꿈꾼 대학상은 초교파적 종합대학을 서울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뉴욕대학을 모델로 해 일본의 도쿄대학보다 더 좋은 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대학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06년이었다. 그는 서울과 평양에 두 개의 대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선교본부 곧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와 서울 주재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의 대학 설립 안에 동조했다.

반면 평양의 마펫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에 대학이 설립되는 것을 반대했다.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이미 합의해 평양 숭실학당에서 대학부를 운영하고 있었고 평양에 기독교인들이 더 많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숭실은 1905년 대한제국의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1910년 일본과의 강제 병탄으로 새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후 1925년에야 숭실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주한 선교사들은 대학을 둘 장소를 서울로 할 것이냐 평양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도 근 10여년을 끈질기게 싸웠다. ‘대학 문제(College Question)’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그들은 극렬하게 대립했다. 언더우드는 한국인의 서울 선호사상을 간파했다. 서울에 꼭 대학을 설립해야 할 이유로 서울이 한국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문화 외교 지리의 중심이고, 각 선교부의 한국선교회가 모두 서울에 있으며, 교육시설이나 철도를 비롯한 교통 등 모든 게 서울에 집중해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전체 선교사의 3분의 2는 평양을 선호했다. 총독부의 사립학교 규칙 개정으로 학교 채플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총독부가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파를 두려워해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채플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내부의 반대와 외부의 억압으로 대학 설립은 자꾸만 지연되었다.

언더우드는 동료 선교사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해외선교부 지도자들과 주한 남북감리교 선교회원들과 보조를 같이 해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그의 친정 격인 북장로회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고, 휴양차 간 안식년 기간에 미국 전역을 두루 다니며 모금활동을 펴기도 했다. 모금 캠페인은 성공적이어서 5만2000달러가 축적됐다. 그의 형이 거액을 기부해 대학 부지 기금도 마련했다.



연희전문학교로 인가 받다

언더우드는 마침내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란 이름으로 개교해 YMCA 건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학교는 일제 당국과의 마지막 교섭 단계에서 1917년 4월 7일에야 대학령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이 아닌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문과 상과 농과 신과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를 두었고 ‘조선크리스천칼리지(Chosen Christian College)’란 영어 명칭을 붙였다. 학교의 조직이나 구성 과목 수업 연한도 4년제 종합대학 체제를 취했다.

그 후 1923년 경성제국대학 설치를 위해 총독부가 대학 설치령을 제정하자 연전 측은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감리교신학교, 피어슨성경학교를 묶어 종합대학 설립을 신청했다. 해외에서도 해외선교부 등이 이 일을 위해 모금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에서는 경성제대 하나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연전의 대학 설립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언더우드가 바라던 종합대학은 해방 후인 1946년에야 연희대학교(Chosen Christian University)의 설립으로 성취됐다. 1957년에는 세브란스의대와 통합해 연세대학교로 재창립, 그의 꿈이 성취됐다.

연희전문학교의 창립 정신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학문과 기술을 연마해 국가와 민족을 지도하며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 있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인들만 양성하려 했다면 신학교만 세워야 했을 것이다. 언더우드가 종합대학을 고집한 것은 민족을 구원할 인물을 길러내기 위함이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32910&code=23111117&sid1=chr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뉴스
메인사진 없음
1/4
한국교회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