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 -한국기독교의 역할 정립을 위하여-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란 블로그를 개설케 되었다. 한국근현대사에 큰 변혁을 일으킨 기독교의 역할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근대화로 이향하려는 변혁기에 수용되어 한국의 근대화, 항일, 3.1운동 ,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다. 일제 강점기에 105인 사건, 3.1운동을 거치며 신사참배 반대, 항일 투쟁을 하며 자유, 독립, 민주, 공화, 정의, 평등, 평화의 정신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해방 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지주로서 전국적 조직으로서, 현실에 활동하는 주역들과 교인들을 통해서 자유 민주국가 건설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크게 공헌했다. 그 소임을 다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교회 마저 그 사실을 망각해 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한국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분명한 사실을 일반 사회와 학계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역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워 애써 외면, 부인 하고 있다. 근대화를 원하는 내재적 요인들이 있어 외부의 것을 받아들임으로 한국의 근대화는 이루어졌다.
1. 19세기 말 조선은 개항했다. 문호의 개방으로 기독교가 전래 되었다. 내한 기독교 선교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했다. 학교와 병원을 세워 무지와 질병으로 부터 건져내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는 것, 미신을 타파했다. 관혼상례도 간소화 했다.
교회에서 각종 회의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훈련도 했다. 감리교연회, 장로교 총회가 전국적 조직을 갖추었다. 각 기구마다 헌법을 만들고 토론과 다수결 통과의 회의법도 알게 되었다.
2, 일본이 강점했을 때 저항하고 민족혼을 깨웠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켜 신생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지만 오히려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자유 독립, 정의 평등 평화라는 기독교정신은 3.1정신이 되었다. 마지막 민족 말살 정책이 끝까지 저항하여 신사 참배 반대를 한 것도 기독교였다.
3. 이념 대결에 생명을 걸고 투쟁한 것도 기독교였다.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기독교인들이 주역이었다. 임정은 이념 대결로 바람 잘날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와 레닌의 공산 혁명이념은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같은 자유 민주주의는 기독교의 물결을 타고 국내에 소개 되었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고려공산당을 세운 이동휘를 비롯한 정 기독교인들이었다.
현순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그 아들 피터 현과 딸, 앨리스 현은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같이 활동했다. 딸은 박헌영의 비서로서 북에서 박헌영 처형 때 미제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었다. 미군정, 해방 후의 남로당, 6.25 전쟁 때의 공산주의 자들의 만행은 일제 보다 잔학했다.
문제는 건국방해자들이 대거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박헌영의 첫째 부인 주세죽을 비롯하여 200여명이나 된다.
그렇게 된 데는 일제 때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 후 1987에 이르기 까지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막연하고 포괄적이며 애매모호한 역사 기술 때문이다. “항일”은 볼셰비키 혁명을 위한 측과 자유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양측으로 나뉘어 내내 대립되어 투쟁했다. 해방 후 미 군정, 대한민국 건국 직후 부터 1987년 까지 민주화 운동도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한 그룹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다 명확한 기술이 요구된다.
4. 대한민국의 건국은 혁명적이었다. 왕정에서 공화정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났다. 건국을 부인하려는 세력도 있지만 70년간 이미 존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 지주는 기독교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 때의 불교, 조선 건국에는 유교가 정치, 도덕, 윤리는 물론 정치적 이념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과 정신은 기독교였다. 대한민국의 건국 전후 좌파, 우파, 중간파도 기독교인들이 주류였다. 대한민국 건국은 분명히 애국가로 표시 되듯이 일제 때부터 민주주의 국가 건국을 목표로 한 평생을 혁명가로 헌신하여 이룩한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세웠다. 한경직의 ‘건국과 기독교’란 씨리즈의 설교, 한치진의 『민주주의원론』등이 뒷받침이 되었다. 기독교 정신으로 계속 나라를 이끌지 못한 결함도 있지만 그 바탕이 된 기독교의 정신이 계승되도록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지난 수십년간 내재적 발전론 주창자들이 주류였다. 역사는 헤겔의 정반합 이론에 따라 내재적 요인과 외적 요인의 상호 작용을 통해 발전해왔다. 내재적 요인의 강조는 항일 적인 면에서 공이 크지만 외적 요인을 무시,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역사 서술은 재고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대개 이상과 같이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비롯한 근대화에도 최고의 공헌을 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갈 때 내한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물론 한국 근대화에 앞장서며 한국 사회에 새 정신적 지주로 등장했다. 한국의 근대화와 항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 후의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독교가 정신적 지주였고 그 주역이 되었다.
필자는 1970년대 초 부터 한국근현대사에서의 기독교의역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미국과 한국에서 학업과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살아 왔다. 보다 더 명확한 연구를 위하여 신학을 전공하며 교회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교회사 전공을 하다가 일반 역사학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예일대학교에서 학부의 청강, 석사 과정을 거쳐 하바드대학교 박사과정에서 한국근현대사 전공으로 학위도 했다.
한국근현대사 속의 기독교를 탐구하기 위해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란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다. cjk42.com이다. 사실들을이 사실대로 정리되고 알려지게 되길 바랄 뿐이다.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최재건의 역사탐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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