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업인의 표상을 세운 유일한 박사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인 상을 제시한 기독교인이었다. 자는 천여(天汝), 본관은 진주이다. 한국 사람들의 보건에 기여하기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정직한 기업활동을 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고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겨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유한대학교로 발전하도록 했다. 기업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치유(healing)와 가르침(teaching)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유일한은 재봉틀을 파는 일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1934)과 김기복(金基福)사이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기연은 경상북도 예천(醴泉)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1895년 을미개혁 당시 단발령이 내려지자 많은 유생들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상투를 잘랐다. 전국을 다니다가 평양에 정착하였다.
종교적으로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전통적으로 상공업이 강했던 평양의 정서와도 잘 부합하여 사업에도 남다른 소질을 발휘하였다. 잡화점과 비단 장사를 비롯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싱거(Singer) 미싱의 평양대리점을 경영할 정도로 유능하였고 재력도 축적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1897년 수립된 이후 조선에는 애국계몽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정순만鄭淳萬, 1873-1928), 박용만(朴容萬, 1881- 1928) 등 개화파 지식인들의 활동이 강하던 때였다. 유일한은 박용만의 숙부 박장현이 평안도 선천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 부터 국어, 일어, 산술, 중국고전 등을 배웠다.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유기연은 자신의 큰아들을 9살인데도 미국에 유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 유일한의 어머니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종교문제로 이혼 이야기까지 나돌았는데, 장남의 유학 문제로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상심했었다. 유기연이 굳이 어린 아들의 유학을 보내려는 이유는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일한은 아버지의 결심 따라 1905년 2월 박장현과 그 조카 박용만이 미국에 갈 때, 이들의 제자였던 정순만의 아들 정양필, 이종철, 정한경, 유은상, 이희경, 이종희 등 후일 한인소년병학교 동반자들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유기연은 한국의 서울처럼 아들을 미국의 중앙에서 자라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유일한이 도착한 곳은 그 당시에는 오지라 할 네브라스카(Nebraska) 주의 커니(Kearney)였다. 그곳은 미국에서 지리적으로는 중심부였지만 당시부터 미국의 심장은 뉴욕과 워싱턴 일대의 동부였다. 박용만이 미국에서 활동한 지역이 네브라스카 일대라 거기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하겠다.
박용만의 배려로 유일한은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살던 태프트 두 독신 자매와 더불어 살게 되었다. 침례교회 신자들인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와 풍습을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특별히 이들 자매에게서 검소함과 경건함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고 유일한은 후에 자주 회고하였다.
비록 어린나이로 고독한 적도 많았지만 “미국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인물이 되어 돌아와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당부하던 아버지의 말씀이 큰 힘이 되었다.
1905년 10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성격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는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정신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1911년에는 헤스팅스(Hastings)로 이주하여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자립해야 했음으로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학교에서는 고등학교의 교장과 선생님들은 그를 미식축구선수로 받아들여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1915년 20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애국심도 자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기도 했다.
한편 원래 그의 이름은 일형(一馨)이었는데, 고교시절 신문배달을 하면서 보급소에서 ‘일한’으로 오기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름을 일한(一韓)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애국심과도 부합되는 것이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 유기연은 다른 형제들의 이름도 한(韓)자 항렬(行列)로 고쳤다고 한다.
10여년의 해외생활은 유일한에게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1910년 평양에서 만주(滿洲)의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한 가족들에게도 경제적으로 힘든 세월이었다. 귀국해서 가족들과 지내면서 일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받고 유일한은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귀국은 할 것이지만 미국에서 대학공부를 마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다만 힘든 형편의 가족들을 돕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중 그의 은사 한 분이 100불을 빌려 주고 1년간 나누어 갚으라고 도와주었다.
유일한은 대학진학을 일 년 늦추기로 하고 디트로이트(Detroit)에 있는 에디슨(Edison) 변전소에 취업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회사생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고, 받은 급여로 자신이 은사에게서 빌린 100불을 상환할 수 있었다. 이 돈은 가족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 유기연은 이 돈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유일한은 1916년 가을 미시간(Michigan) 주 앤 아버(Ann Arbor)에 있는 미시간주립대학교(The University of Michigan) 상과(商科)에 입학하였다.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을 받으며 수학했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할 수 없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 이라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한편 1919년 졸업할 때 까지 중국인들을 상대로 중국의 물건을 판매하여 거둔 수익으로 학비를 충당하였다. 후일 1925년 함께 결혼하게 되는 배우자인 중국인 의과대학생 호미리(胡美利) 여사를 만난 것도 이 시절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국내에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3.1운동 직후, 유일한은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에 참여하였다.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 에 참석하고,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이를 지지하는 모임으로 4월 열린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의 기초 작성위원이 되었고 대회장에서 이를 직접 낭독하였다.
이 모임에서 그는 이승만과 서재필 등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에게 큰 영향을 준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한 박용만이 외교노선을 강조한 이승만과는 대립적인 관계였기에 그는 이후에도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서재필과 오히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20년에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도 활동했다. 한국친우회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친우회의 가입을 권유하며 후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유일한은 1920년 미시간 중앙철도회사를 거쳐 세계적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사에 취업했다. 동양인이 회계사로 이러한 거대 기업에 취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사업에 눈이 떠 1922년 27세의 나이로 대학동창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유도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사업은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상당한 큰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2년에 미시간 주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진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도 공부하였다. 그러면서도 1924년 5월 29세의 나이로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New Il Han & Company)를 설립하였고 사장으로는 서재필을 추대하였다. 후에 서재필의 딸, 뮤리엘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과 서재필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사업적으로 성공한 유일한은 1925년 미국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소아과 전문의가 된 호미리와 결혼하였다. 같은 해 숙주나물 원료인 녹두를 구매하기 위해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길에 북간도에 정착하고 살던 가족을 21년 만에 만났다. 가족들은 귀국하여 조국에서 봉사하면서 함께 있을 것을 강하게 원하였다.
하지만 유일한 부부의 귀국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을 겸하고 있던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에 의해 1926년 본인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인 호미리 여사는 세브란스 병원의 소아과장으로 초청을 받았다. 안식년을 맞아 프린스턴 신학교에 온 로즈 선교사(Harry A. Rhodes, 魯解理, 1875-1965)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로즈 선교사가 백낙준 박사에게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올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백낙준 박사는 1927년 귀국하였다. 유일한의 귀국 역시 백낙준 박사와 시점이 매우 비슷하기에 로즈 선교사가 유일한 박사 부부의 초청에도 기여하였는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1926년 귀국한 유일한 부부는 일제의 교육령 개정으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의 경우 박사 학위를 소지한 경우에만 전문학교의 교원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되자 방향을 바꾸었다.
유일한은 이 해 12월 10일 서울 종로 2가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고 초대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일한은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에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다.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1927년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부인의 병원은 유한양행이 있던 건물 2층에 있었다.
그의 사업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형세로 성장하였다.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世界經濟大恐慌)의 여파 속에서도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1930년에는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애보트(Abbott), 파크 데이비스(Parke-Davis) 등과 거래를 시작하였고, 1931년에는 부대사업으로 해외 물류업과 보험업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1933년에는 애보트사와 함께 만주 대련(大連)에 물류창고를 설립하였고, 대표제품 중 하나인 ‘안티푸라민’의 생산을 시작하였다.
1934년에는 구미 제약업계 시찰을 위해 유럽을 다녀왔고, 그 결과 1935년부터는 프랑스(France)의 파스톨, 영국의 이반존스(Ivan Jones), 알렌험부리, 독일의 메르크(Merck) 등과 거래를 시작하였다. 세계적인 제약회사와 거래를 갖는다는 것은 식민지 치하의 경제인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유일한 박사는 1936년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기도부천군 소사면에 2만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소사공장을 건설, 12월 10일 준공하여 유한양행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탈세하지 않고 윤리에 맞는 경영을 하였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가 있다.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즉 주주자본주의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국제정세는 급변하였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미국과 전쟁에 들어갔던 것이다. 국내에서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어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하였고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하였다.
이런 속에서도 유일한 박사는 결코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 43세가 되던 1938년 4월 수출증대를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그는 상황이 악화되자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로스 엔젤레스(Los Angeles)에 정착하였다. 미국통인 선생이 귀국하면 미국과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일제가 회사도 문을 닫게 할 것이고, 사장인 유일한 박사 역시 친일에 협력을 하든지 아니면 투옥되어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회사의 운영을 동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에 활용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유일한은 1941년 12월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2대 사장이 된 동생 유명한을 통해 국내의 사업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남가주대(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A)를 취득하였는데, 어려운 속에서도 자기개발을 위한 결과였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후부터 유일한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일한은 1941년 8월 미주 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자 로스앤젤리스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12월에는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했다. 1942년에는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중국선교사의 딸인 펄벅과 교유를 시작했다.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 국방과장 송헌주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 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다. 1945년 1월에는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RP(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 전경무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했다. 또한 곧이어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하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 비무장전추법, 지도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훈련, 비밀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 침투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침투작전은 좌절되었다.
해방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만주를 포함한 중국과 북한(北韓) 지역의 사업기반을 모두 잃었다.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 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유일한에게 초대상공부 장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고사하였다. 대신 그가 택한 것은 학문의 길이었다.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1948년부터 국제법에 관한 박사과정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6. 25 동란으로 다시금 유일한 박사의 사업기반은 파괴되었다. 더욱이 동생 유명한이 1951년 여객선 창경호 침몰사건으로 사망하는 아픔까지 있었다. 전쟁의 와중 속에서도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기술 한국을 이끄는데 앞장섰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그는 회사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58년에는 소사공장을 대규모로 확장하는 공사를 마무리하였고 1962년에는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시켰으며 서울의 대방동 신사옥으로 이전하였다.
유일한의 경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유한양행은 1967년 경기도 안양에 2만 5천평 부지의 공장을 새로 지었고, 1969년에는 영등포에 새로 공장이 들어섰으며, 1970년에는 자회사로 ‘유한킴벌리’가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여 회사의 성장을 직원들과 함께 나누는 모범을 보여 1950 –1970년대 노동자들을 핍박한 기업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만년의 유일한은 교육사업과 재산의 사회 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어려서 유학 하면서부터 기독교인으로 선한 청직이의 삶을 살아 온 그는 독실한 기독교기업인으로서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62년 재단법인 유한학원(柳韓學院)을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개인소유주식 1만 7천주를 장학기금으로 연세대학교와 보건장학회에 기증하였다. 1964년에는 한국고등기술학교와 유한공업고등학교(柳韓工業高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70세가 되던 1965년에는 ‘유한교육신탁기금 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자신의 주식 5만 6천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사업을 확대하였다.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1970년에는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설치하여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운영하였다. 유한공업전문대학은 현재 유한대학교로 발전되었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일한이 살던 집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구두인 선교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일한 박사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였다. 사람들은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인적인 소유물과 소지품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구두가 두세 켤레, 양복이 두 세 벌이었을 뿐 나머지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가지 소지품뿐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했는지 족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검소함을 증명하는 다음의 일화가 1995년 주식회사 유한양행이 발행한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유일한』에 전하고 있다.
쉐퍼 만년필을 쓰면서 가까운 친지들에게 “내가 어째서 이렇게 좋은 만년필을 쓰고 있는지 알아? 19년 동안 쉐퍼 만년필을 써 왔는데 그 놈이 고장이 났단 말이야. 그래서 쉐퍼 만년필 본사에 고장 난 만년필을 우송하면서 내가 이 만년필을 미국에서 샀을 때 거기에는 언제나 고장이 나면 무료로 수리해 준다는 설명서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니 수리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그 회사에서 19년 동안이나 우리 만년필을 사용해 주어서 고맙다면서 수리 대신에 새로운 만년필을 보내 준다고 우송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평생을 기독교 기업인의 정신을 잃지 않고 헌신한 유일한 박사는 마지막 임종의 순간도 하나님과 함께 했다. 그는 평소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연세대학교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사망하기 며칠 전, 평생의 지기로 연세대학교 의과대 학장과 부총장, 초대 유한공고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김명선(金鳴善, 1897-1982) 박사에게 영어 성경책을 갖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성경 책을 받자 너무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성경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며 영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기업인으로 아울러 기독교 기업인으로 표상을 세운 큰 족적을 남긴 유일한 박사는 76세가 되던 1971년 3월 11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후 전 재산은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탁되어 사회에 환원되었다. 유일한 박사는 자신은 인생의 순위가 먼저 국가 그 다음에 교육, 기업 가정이라고 말하고 인생의 전부였던 회사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일한 박사는 직계가족인 아들 유일선에게는 자립할 것을 강조, 한 푼의 유산도 상속해 주지 않았다. 다만 딸 유재라에게만 유한중고교 안에 있는 자신의 묘지 일대 5천 평을 주어 유한동산으로 꾸며줄 것을 당부했고, 손녀 일링 양에게 학자금 1만 달러를 주었을 뿐이었다. 장녀 유재라 여사는 부친의 뜻을 이어 1991년 작고하면서 자신의 200억이 넘는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증하였다. 유한양행은 철저한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운영하면서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의 제약업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기업인으로 이러한 모범을 보인 유일한 박사는 여러 상을 받았다. 1963년 제7회 ‘약의 날’에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의장상을 받았고, 1965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1968년에는 모범 납세자로 동탑산업훈장을,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사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유한양행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기업인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표상을 세운 그와 그 가족의 상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클 것이다.
<저서> When I was a boy in Korea, Lothrop, LEE & Sheperd Co., 1928.
<The First Korean Congress> 결의안 4월 14일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유일한 등이 제출한 결의안 (유일한, Henry Kim, Miss Joan Woo의 세사람으로 4월 14일 1919년 오전회의에서 구성되었고 오후회의에서 유일한이 낭독하였다.)
의장님과 초대 한인 독립연맹의 대표자회의의 회원여러분들은 서구세계에서의 미국의 이념을 인지하고 이곳 미국과 다른 곳의 한인들이 그 목적을 결정화하고 포부를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다음의 결의안을 작성하여서 여러분의 승인을 위하여 제출합니다. 지금 결의안을 읽으며 읽은 대로 채택할 것을 권고 드립니다.
한인들의 목적들과 포부들(한국건국의 10원칙; people은 인민으로 번역)
(1) 우리는 권력을 지배받는 자들로 부터 얻는 정부를 믿으며 그래서 정부는 지배하는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 합니다.
(2) 우리는 미국정부를 모범으로 하여서 가능한 한 대중의 교육과 부합하는 정부를 가질 것을 제안합니다. 다음 10년 동안은 정부의 좀더 중앙집중적인 권력을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민의 교육이 향상되고, 자치의 기법의 경험이 많아지면 인민은 정부의 업무에 좀더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지역과 지방입법자를 선출하는 보편적 참정권을 줄 것을 제안하고 지방입법자들이 국가 입법부에 보내는 대표를 선출할 것입니다. 국가입법자들은 정부의 행정부와 조화하는 권력을 가질 것이며 국가의 법을 만드는 유일한 권력을 가질 것이며 그들이 대표하는 인민들에게만 유일하게 책임을 질 것입니다.
(4) 행정부는 대통령과 부통령, 내각관료들로 구성되며 국가 입법부에서 만드는 모든 법들을 집행합니다. 대통령은 국가 입법자들에 의해서 선출될 것이고 대통령은 내각 장관들, 지방 지사들, 외국에 보내는 대사를 포함하여 정부의 주요한 행정관료들을 지명하는 권력을 가집니다. 그는 외국과 조약을 맺을 권력을 가지며 조약은 국가 입법부의 상원의 승인대상입니다. 대통령과 그 내각은 국가 입법자에 책임을 집니다.
(5)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믿습니다. 어떤 종교나 교리도 그 가르침이 국가의 법률이나 이익과 저촉하지 않는다면 나라 안에서 자유롭게 가르치고 설교할 것입니다.
(6) 우리는 전세계 모든 국가와 자유 통상을 믿으며 조약국가의 시민과 신민들에게 그들과 한국 인민들 사이에 통상과 산업을 증진하는 동등한 기회와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7) 우리는 인민의 교육을 믿으며 다른 어떤 정부 활동보다 더 중요할 것입니다.
(8) 우리는 과학적 성찰에 의한 현대 위생의 개선을 믿으며 인민의 건강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일차적 고려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9) 우리는 자유언론과 자유출판을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전체인민의 삶의 조건들이 무한한 발전에 적합한 민주주의, 평등한 기회, 건전한 경제정책, 세계국가들과의 자유로운 교류들과 완전하게 동의합니다.
(10) 우리는그 행동이나 발언이 다른 인민의 권리를 저해하거나 국가의 법이나 이익을 저촉하지 않는다면 모든 행동의 자유를 믿습니다.
생명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한 이들 중요한 점들을 우리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수행할 것을 우리 모두 엄숙한 말로써 맹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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