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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 선교사

벽안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18 [04:30]

한부선 선교사

벽안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

최재건 | 입력 : 2021/01/18 [04:30]

벽안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자 : 한부선선교사

 

 

 

 교회역사 이야기  한부선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는 필자가 가까이에서 직접 목도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6.25 동란이 일어나 휴전되기 전이었다. 필자의 고향 교회인 경남 하동의 고전교회를 방문하였다. 백인이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로 유창하게 설교했다. 한국음식도 잘 먹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시골 교회에서는 그의 방문에 앞서 그에 대해서 많이 얘기했다. 한부선 선교사는 일제 말 신사참배 강요에 목숨 걸고 반대 투쟁한 분이라고 했다. 현재는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의 교수라고 하였다.

 

그 날 저녁 예배 때 그의 설교 중 잊지 못할 간증이 있었다. 그가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를 위해 언약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수감 첫날 목이 말라 물 한 컾을 달라고 했다. 마실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아 그 다음 날 부터는 비누로 세수한 물을 아껴 두었다가 갈증을 해소하며 지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왜 살기 좋은 미국을 놔두고 한국에 와서 그토록 고생하며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필자의 학문의 여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신사참배 문제를 주제로 삼은 것이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내한 선교사 연구를 전공분야로 정하고 지금까지 선교사의 삶과 활동에 관심을 가져온 것도 그와의 첫 만남과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한부선은 2대에 걸친 내한 선교사 가정의 2세 선교사였다. 그의 부모인 한위렴(William B. Hunt, 1869-1953) 내외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내한하여 황해도 재령에서 42년간 선교활동을 펼쳤다. 1939년 은퇴한 후, 1953년 소천하였다, 한부선의 장인ㆍ장모인 방위량(William N. Blair, 1876-?) 내외도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평양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한부선은 1903년 한국에서 태어났고, 1905년 모친의 서거로 안식년을 얻은 부친 한위렴이 1906년 로이드(Anna Lloyd)와 재혼하고 돌아와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활동을 재개하여 재령에서 자랐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까지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미국 미주리 주의 솔단 고등학교에 편입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9월 시카고 근교의 휘튼대학(Wheaton College)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뉴저지의 러트거스대학교에 편입하여 1924년에 졸업하였다. 1924년 프린스톤 신학교에 진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한부선의 신학교 재학기간은 북장로교회가 분열하고 동 교단 소속의 프린스턴신학교도 신학적으로 보수, 진보로 나뉘는 진통기였다. 그는 1936년 북장로교에서 분열된 교단인 미국장로교(현 정통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그 후 메첸 등이 새로 조직한 외국선교를 위한 독립선교부(Independent Board for Foreign Mission)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내한하여 일제 말에는 만주 하얼빈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 말 일제가 한국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한부선은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하얼빈 중심으로 25개 교회의 신도 800여 명을 돌보며 활동하던 그는 신도들에게 신사참배는 일본의 신에게 참배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신도들에게 조직적으로 반대하도록 교육하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500여 명의 신도들을 규합하고 그들을 언약신도(Covenanting People)’라고 불렀다. 그들 가운데 김윤섭, 김신복, 안영애 같은 순교자도 나왔다. 그는 이때의 상황을 For a Testimony(증거가 되라라)는 책을 출판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일제의 강요와 회유책에 말려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대부분 신사에 참배하였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도 1938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였다. 사회하던 총회장이 신사참배 결의 때 하면 하시오! 가만 묻고 통과를 선언했다. 그 때 한부선은 그 자리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가결 선포를 불법이라고 소리쳤다. 참석한 선교사들을 포함한 총대들 가운데 유일하였다.

 

일본 경찰의 위협 속에 개회된 총회였고 여러 원로 선교사들과 저명한 한국인 목사들 및 장로들도 그곳에 함께 있었지만, 공포 분위기에 억눌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 후 한부선은 그가 소속된 봉천노회에서 제명되었다. 19411022일에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당당하게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1128일 일본의 펄 하버 공격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거의 모든 주한 선교사들이 철수하였고, 한부선을 포함한 소수의 잔류 선교사들은 포로교환 형식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1945815알 일본이 패망하자 한부선은 맥아더 장군의 일본 민주화정책과 반공정책을 힘입고 19451028일 다시 내한하였다. 그는 가장 빨리 한국으로 돌아온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맥아더 사령부의 관대한 입국조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인을 동반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한국의 치안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부인에게 매일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필자는 그의 집에 머물면서 1,500여장이나 되는 이 편지들을 빌려 나와 한 장 한 장 카피하여 자료집으로 최근 에야 출간했다. 수 십년간 계속한 일을 출판사의 농간에 넘어간 채로 나와 마지막 손길을 놓친 아쉬움이 남아있지만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기독교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한부선은 해방 후에 그 전에 활동했던 청주와 하얼빈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부산에 정착하였다. 당시에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 처리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굴종은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경남노회의 주남선과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그들과 같았기 때문에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조하고 교수진에 동참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공산화 되고 한국이 38선으로 분단되고 마침내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일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 중인데도 1952년에 내한하여 고려신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선교활동도 이어갔다.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이 연합하여 합동측이란 교단을 형성하자 고신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합동측에서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고신측의 환원 후에는 양 교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선교사 정년퇴임을 5년 연장하여 1976517일 은퇴 기념 예배가 부산 남교회에서 있었다.

 

은퇴 후에는 그의 선교활동을 기려 197993일에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명예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한인교회 연합 뉴욕전도대회에서 한국 선교공로상을 수여하였다. 그 후 간간이 재미교포교회에서 설교청빙을 받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필라델피아 근교의 양로원에서 지내다가 199272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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