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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스크랜튼 선교사

기난한 자를 위한 의료선교사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5/09 [09:15]

윌리암 스크랜튼 선교사

기난한 자를 위한 의료선교사

최재건 | 입력 : 2021/05/09 [09:15]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

 

윌리엄 스크랜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국 감리회 선교사인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1856-1922) 박사는 명문 예일대학교와 현 콜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원인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의사이면서도, 19세기 말에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조선(朝鮮)에 와서 빈민의 치료와 목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1856년 5월 29일 코네티컷(Connecticut)()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 윌리엄 탈코트 스크랜튼(William Talcott Scranton)매사추세츠주의 감리교회 목사 집안의 딸인 어머니 메리 플렛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부인과 구별을 위해 이후 스크랜튼 대부인으로 칭한다)

 

스크랜튼의 아버지는 그가 열여섯 되던 해인 1872년 별세하였다. 반면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아들과 함께 선교사로 같이 내한하여 이화학당을 세우며 선교사로서의 삶을 오래 살았다. 메리는 뿌리 깊은 감리교 가정출신이었다. 메리의 부친 벤톤(E. Benton)과 오빠도 감리교 목사였다. 1855년에 뉴헤븐의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고 40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메리는 그 부친과 오빠 영향으로 믿음이 깊었고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결혼한 후에도 해외 선교 기금을 헌금하는 외에 지역 해외선교회 모임의 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 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에게서 양육을 받아 윌리엄 스크랜튼은 좋은 신앙을 가진 인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1878년 윌리엄 스크랜튼은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를 졸업하였다. 미국무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된 태프트와 동기 동창이었다. 대학 졸업 후 오늘날의 콜럼비아 의과대학인 뉴욕 의과대학(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에 입학하여 1882년 졸업하였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던 7월에 그는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였다. 부인은 미국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목회자 펠프스(Phelps Arms)의 딸 이었다. 스크랜튼 부부는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을 모시고 오하이오(Ohio) ()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서 개업을 하였다. 그들은 북 김리교회인 유클리드 애비뉴(Euclid Avenue) 교회에 출석하였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이 처럼 미국 시민의 상위 1%에 속하는 당대 최고의 대학교들을 졸업하였으며, 의사로서 매우 안정된 사회적인 부와 명예를 가지고, 지역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며 살 수 있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이나 특히 미국에서는 극동(極東)에 위치한,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엔 별 관심이 없었다. 작으면서도 교역거리도 별로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나라인 조선에 의료선교사로서 아들과 함께 어머니도 선교사로서 선교의 자유도 없는 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조선은 수교는 하였지만 포교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크랜든에게는 선교사로서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었다. 1884년 여름,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Maclay)를 통해 한국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 교계에 알려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선교사 물색에 나섰다. 그때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매클레이 선교사가 클리블랜드로 스크랜턴 가족을 만나러 왔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턴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884년쯤인가 제 생각으론 매클레이 박사인 것 같은데, 선교사 한 분이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홀에서 나를 만나서는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해외선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 전도나 아메리카 토착민 선교에 관련해 조금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국내 전도인들을 돕고 있는 정도입니다. 내 대답은 '어이구머니! 안될 말이에요'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스크랜턴 부인의 계속된 증언이다.

 

"그 해 초여름, 스크랜턴이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차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 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아프리카를 제외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자신을 헌신하기로 작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얼마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저도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참 지난 후, ‘거기에 제 뼈도 묻겠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결혼하던 날 결심한 것 중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으나 그처럼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려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열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병간호를 맡았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크랜턴 모자의 병상 결심은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되었고 그에 따라 먼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188410월에, 아들 스크랜턴이 188412월에 한국 선교사로 각각 임명받았다. 이 무렵 아펜젤러 부부도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미국 북감리교회의 선교사로 스크랜튼 가정과 아펜젤러 부부는 188523일 증기선 편으로 미국을 떠났다. 이미 스크랜튼 부부에게 태어난 애기도 있었다. 일행이 6명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것은 227일이었다. 일본 주재 맥클레이의 환영을 받았다. 35일에는 맥크레이 선교사 집에서 한국감리교 선교회 회의가 처음 열였다. 매클레이가 한국선교회 회장이었다. 한국의 갑신정변으로 사회와 정세가 불안하니 두가정은 각각 분산해서 기기로 결정하였다. 아펜젤러 부부가 먼저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일행은 188545일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도 함께 왔다. (한국교회는 흔히들 부활절 아침에 도착했다고 잘못 아는 이들도 있다.) 언더우드는 혼자여서 서울에 왔으나 아펜젤러 부부는 여전한 사회적 불안정으로 제물포에서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요코하마에 머물면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한국말을 공부하며 때를 기다렸다. 반면 스크랜튼은 가족을 일본에 두고 단독으로 그해 53일에 조선에 도착했다. 실제적으로 그가 감리교 첫 내한 선교사가 되었다. 스크랜튼 가족과 아펜젤러 부부가 서울에 입성한 것은 729일이었다.

 

스크랜튼이 내한했을 때 조선에는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과 언더우드가 소속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회와 조선정부가 합력하여 제중원(濟衆院)을 통해 의료 선교사업을 막 펼치고 있었다. 알렌은 스크랜튼을 초청하였고 스크랜튼은 이를 받아 들여 522일부터 제중원에서 함께 일했다. 한 달이 지나는 사이 장로교에서는 헤론 의료선교사가 도착하였고 스크랜튼은 감리교 독자적인 병원을 정동에서 개원하려고 624일 제중원을 사임했다.

 

스크랜튼 박사는 외국인에게 선뜻 집을 파는 사람들이 없었던 그 시기 어렵게 정동에 미국공사관 근처의 높은 지대에 있는 한옥을 매입하여 비록 충분한 설비가 갖추어지지는 않았지만, 때마침 미국에 보낸 의료장비와 약들이 도착하여 1885910일 그의 집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새 병원 개원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M. F. Scranton.) 여사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스크랜튼은 사저를 진료소로 개조하여 출입문 양쪽에 영어와 한글, 한자로 ‘AMERICAN DOCTOR's DISPENSARY', '미국의원 시병원(美國醫院 施病院)’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간판에는 영어와 한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이든지 낮 10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의원에게 보이시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스크랜튼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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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약을 처방해 주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모두 병()이나 돈을 갖고 오질 않고 항상 말했습니다. ‘선생께서 이 병을 나에게 빌려주시면 내일 약값과 함께 병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들 중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약속을 지킨 사람은 단지 극소수였으므로, 내가 모아두었던 병이 곧 동이 났고, 하는 수 없이 강제로 병을 가져오도록 조치했던 것입니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병원 건물을 마련하고 615일 개원했다.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스크랜튼의 한국이름 시란돈(施蘭敦)의 시를 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병원은 한국에 설립된 서양 의료기관으로는 제중원 다음으로 두 번째이며 최초의 민간진료기관이었다. 당시에 제중원은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회와 조선정부의 공동 경영 체제였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을 비롯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들은 민간병원을 개원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차이점이기도하고 역설적으로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상대로 진료소가 개설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선교사들 만의 투자로 설립된 정동 진료소에는 돈 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1886615일 정동에 새 병원 건물을 마련하기까지 9개월 동안 552명을 진료하는 놀라운 업적을 보였다.

 

새로 지어진 독립된 병원 건물은 전통 한옥을 구입해 내부를 개조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개인 집에서 하던 진료소보다는 크게 발전된 형태로서 정식 병원의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외래진료만 하던 시병원은 이제 입원실을 갖춘 병원으로 정식 개원되었다. 환자용 대기실, 응접실 또는 사무실, 사무실과 통하는 조제실, 그리고 수술실 등이 있었다. 본 건물 옆에 병실 3개가 있는 여성 전용건물도 따로 마련되었다. 결국 25-30명의 남자와 15명의 여자가 입원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모여든 환자는 극빈자와 버림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래는 그의 선교보고서의 일부이다.

 

우리가 상대해서 일한 사람들은 거의가 극빈자들이었으며 종종 버림받은 자들도 돌보아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 몸의 상태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을 경우에는 치료받는 동시에 생활비 전체를 우리가 부담해야 했습니다.”

 

스크랜튼 박사는 1886-87년의 1년 동안 2천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는데, 이처럼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제중원의 의사 헤론(John W. Heron, 1856-1890)도 와서 협력하였다. 이에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수차 새로운 의료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으며, 이와 같은 요청을 접한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서는 18871031일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하워드는 과로로 내한한지 2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1889년에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여의사가 파송 받아 왔다. 그녀를 따라 약혼자 홀(William James Hall)도 오게 되었다. 둘은 결혼하여 로제타는 남편의 성씨를 따라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로 많이 알려졌다. 둘은 후에 평양에서 활동했다. 남편은 동학전쟁으로 콜레라가 평야에 유행하자 과로로 순직했다. 로제타는 해산을 위해 일시 귀국했으나 아들도 의사가 되어 평양에서 봉사했다. 점자성경도 만들고 폐결핵 환자 위해 크리스마스 씰 행사도 펼치고 후에 경성여의전(현 고려대 의대)도 세웠다.

 

시병원에는 1890년에는 맥길(W. B. McGill)을 파견하여 의료선교팀의 인력은 배가되었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와 이화학당’(梨花學堂)이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설립되어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되고, 하워드 선교사에 의해 관리된 보구여관(保求女館)’이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 되었다. 선교회가 차별받는 한국여성을 위해 선교적 관심을 볼수 있는 사역이었다.

 

선교활동의 자유가 없던 때여서 초기 선교 과정이 순탄하고 원활한 것만은 아니었다. 18885, 한국 정부에서 돌연 서양 선교사들의 종교전파 행위를 중단하라는 금령’(禁令)을 발표하였다. 남산 명례방(오늘날 명동)에 궁궐보다 더 높은 지대에 성당 건축을 강행하는 천주교 신부들에 대한 조선정부의 불쾌한 감정이 작용한 결과였다. 게다가 이 무렵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해서 눈알은 뽑아 사진기의 렌즈를 만들고 실험용으로 쓰거나 남색을 즐기고, 미국에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풍문이 돌면서 영아소동(嬰兒騷動, Baby riot)이 일어났다. 흥분한 군중이 선교회에 몰려와 돌을 던지며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을 파괴하려는 민중의 무지에서 비롯된 유언비어였지만 선교사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무리를 부추기는 결과를 빚어 배재, 이화학당을 습격했다. 그 바람에 외국인들은 출입도 어려웠고 이화학당을 지키고 있던 한국인 하인이 맞아 죽기까지 하였다.

 

서양과 맺은 수교 초기 종교전파는 못하도록 하여 선교회는 병원과 교육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선교사들은 처음 겪은 큰 시련을 통해 오히려 믿음과 선교의지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사태의 해결과정에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게 된 민중은 오히려 선교사와 그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소동을 겪으면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특히 서민계층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된 것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상황을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지났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처음에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비웃기만 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암묵적으로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때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우리가 이들을 대했던 일관된 생각과 동정심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한국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정동의 시병원이 성공적인 결과를 나타내자 버려진 극빈층의 환자를 돕는 계획인 선한 사마리아인병원의 일환으로 188812월에는 서대문 밖 애오개에도 진료소가 세워졌다. 영아소동의 와중 속에서도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1888년에 5,500명을, 1889년에 3,939명을 진료하였다. 그가 1886년 의료사업을 시작한 후 4년 동안 진료한 총 환자 수는 12,209명에 이르렀다.

 

또한 스크랜튼 박사의 영향으로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는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과 평양의 기홀병원, 해주의 구세병원, 원주의 서미감병원으로 확산되었다. 스크랜튼 박사는 한국의 의료선교를 위하여 국내 각 지방에 순회 의료전도를 실시할 것과, 서울 중심부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건립할 것, 제물포에 의료사업을 실시할 것, 그리고 동대문에 시약소를 설치할 것 등 네 가지 방책을 북감리교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한국 초기선교사로서 성서번역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의 번역본인 마가복음을 소지하고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18872월 성서번역위원회(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성서번역에 착수했다. 당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알렌, 윌리엄 스크랜튼, 헤론 등 5명이 모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중요한 결정은 선교 공용문자로 한글을 사용토록 했다. 한글은 세종이 창제한 후 공용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한글이 공용으로 된 것은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였다. 스크랜튼 박사는 189216개월간의 안식년 휴가를 다녀온 뒤에는 성서번역 외에도 감리교 교리서와 전도문서 등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의료선교사로 뿐 아니라 감리교회의 목사로 파송된 스크랜튼은 초기 한국교회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상동교회(尙洞敎會)가 설립하였다. 정동에 있던 병원을 서민선교의 본거지인 남대문으로 옮겼다. 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병원이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그 위치가 대중의 요구에 맞게 번잡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동에 있는 남대문병원은 제 판단으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한 면들이 많습니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많고 사람들이 밀집해 모여 있는 남대문 지역을 민중이 있는 곳으로 보고 이곳에서 교회를 세우기 원했던 것이다.

 

결국 스크랜튼은 1888년 상동에 2,000평의 땅을 구입했고, 1889년부터는 진료소 운영 과 함께 전도하는 데에도 힘썼다. 전도의 결과 20여명의 교인들이 생겨났고, 이곳은 선교사역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상동병원이 바로 상동교회로 발전된 것이다. 1893년 그는 병원교회를 정식으로 상동교회로 발전시켰으며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의 혼란 속에서도 폭발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유수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상동교회의 설립은 고난 받는 조선 민중에게 민족교회의 발판을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다. 민족운동의 주역이 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애국지사들이 스크랜튼 박사의 감화로 상동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1887년부터 아펜젤러가 배재학당 안에서 기독교 교리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출발하여 1893년 연회 안에 단기 성경학교 형태의 본처사역자 양성과정을 두고 선교사들이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1899년부터 신학회(Theological Class)’란 이름으로 정착한 모임도 큰 도움이 되었다.

 

, 구한말 의병운동가로 일제의 고문에 의해 순국하게 되는 구연영(具然英, 1864-1907), 한국 초기 사역의 대표적 인물인 목사 최병헌(崔炳憲, 1858-1927), 목사로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굳건히 거부한 이필주(李弼柱. 1869-1942), 정동교회와 상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한 김종우(金鐘宇, 1884-1939), 신민회(新民會) 결성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105인 사건(1911)의 여파로 순국하게 되는 전덕기(全德基, 1875-1914) 등이 그 대표이다. 한글학자 주시경, 김윤경, 후에 헤그 밀사로 간 이준 등 이들은 엡워스 청년회’(Epworth League)를 조직하였는데, 그 중 전덕기는 이른바 상동파’(尙洞派) 형성을 주도하였으며,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큰 활약을 전개하였다. 군사교육도 했다. 공옥학교도 시작했다.

 

스크랜튼 모자는 1898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상동교회 교인들과 이들 모자는 넘쳐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새 교회당의 건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 모자는 귀국하면서 가져 온 4천 달러와 성도들이 감사의 기도로 모은 돈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19007월 상량식을 올릴 수 있었다. 새 예배당 공사는 1년 만에 무사히 끝나 기부자인 미드(Mead)양의 이름을 따서 미드기념예배당’(Mead memorial Church)로 명명되었다. 190159일 개회한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17차 연회를 상동교회 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연회 사흘째인 512일 주일에 연회를 주재하기 위해 내한한 무어(D. H. Moore) 감독 집례로 새 예배당 봉헌예배를 거행하였다. 연회 참석자들은 연회 마지막 날 “1년 만에 이처럼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던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와 그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에게 찬사와 감사를 보내는 바이다.”는 치사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의 건강히 급격히 나빠져 국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본국으로 모시고 가서 치료를 받기로 하여 19017월 말에 모자는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1904년으로 접어들면서 대부인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스크랜튼 박사도 다시 한국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러일전쟁(露日戰爭)이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19045월 미국 북감리회 총회는 새로 감독으로 선출된 해리스(M. C. Harris, 1846-1921)에게 일본과 한국 선교를 관리하도록 위임하였다. 일본선교 개척자로 30년 이상 일본인 선교경력을 갖고 있던 해리스 감독은 일본에 대해서는 잘 알았으나 한국은 거의 아는 것이 없었기에 해리스 감독은 코네티컷 주() 이스트 하트포드(East Hartford)에서 요양 중인 스크랜튼 가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이들 모자는 19049월 다시 한국에 나왔다. 이 후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주로 일본에 거주하던 해리스 감독을 대신하여 한국선교 관리자 겸 경기도(京畿道) 지방 장로사로 선교사역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주재 해리스감독과의 관계에서 선교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19076월 연회에서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한국 의료선교사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의료선교 사업을 지원하는데 힘썼다. 1911년에는 평북(平北) 운산(雲山)의 미국인 소유의 금광에서 광산소속 의사로 일했다. 1916년에는 충남(忠南) 직산(稷山)의 금광소속 의사로, 1917년에는 한국을 떠나 중국 대련(大連)으로 건너가 병원 개업을 하였다. 1919년 다시 일본 고베(神戶)로 자리를 옮겨 개인 병원을 차리고 한국인들을 돌보며 말년을 보냈다. 한국 개신교 초기선교사이며 개척자이자 상동교회의 설립자인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는 1922323일 고베에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시신은 로코산(六甲山)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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