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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수목사의 미국에서의 활동

하나님, 논촌, 노동을 사랑한 목회자

최재건 | 기사입력 2023/07/09 [04:57]

배민수목사의 미국에서의 활동

하나님, 논촌, 노동을 사랑한 목회자

최재건 | 입력 : 2023/07/09 [04:57]

배민수 목사의 미국에서의 활동

 

 1. 서론

 

배민수 목사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후 농민생활이란 잡지가 시골에 배포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배민수 박사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후 1960년대 초반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을 방문하고 인근에 있는 대전기독교 농민학원을 둘러보던 중 배민수 박사가 그 학원의 설립자로 각인된 것을 보고 그가 농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회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레 그가 일제 때 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농촌부에서 벌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필자가 뉴욕 근교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할 때는 배민수 목사의 장남인 배영 박사가 미국의 교육계와 미국 장로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와 유족은 배민수 목사가 서거한 후 그의 유지 실현을 위해 6만여 평의 토지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며 연구를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배민수 목사의 활동에 관해 많은 연구가 진척되었다.

배민수 목사에 대한 업적과 평가는 10여 회에 걸친 배민수 목사 기념강좌와 다원 농촌 목회자 프로그램에서 발표된 것들을 비롯한 여러 논저들에서 이미 거의 드러나고 정리되었다. 그 결실로 배민수 자서전과 자료집 및 그에 관한 연구서가 발행되었다. 그의 자서전인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이 예수교장로회 농어촌부와(1993)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2002)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어 번역본이 배민수자서전이란 명칭으로 출판 되었다. 그에 관한 자료집이 방기중에 의해 편찬되어 출판되었으며, 그의 사상도 방기중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배민수 목사(1896-1968)는 충북 청주에서 대한제국 청주감영 진위대 부교인 부친 경주裵氏 裵昌根(1867-1909)과 모친 張喜云(1867-1945)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친구들의 안내로 밀러(F. S. Miller) 선교사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예수를 믿어 자신의 영혼도 건지고 나라도 건지겠다는 것이 개종동기였다. 그의 부친은 망국의 상황에서 의병대장으로서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저항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부친의 유언 중 하나는 나라를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부친이 보여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뜻을 이어받아 그는 敬天愛人의 애국자와 농촌운동가와 성직자의 삶을 살았다. 일제하에 선친의 애국혼과 당시 한국 기독교회가 지닌 나라사랑 정신에 따라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족을 돌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편모는 아래구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神意를 성취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방법은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이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1) 사람을 사랑함이 예수를 사랑함이오.

2)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함이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함이오.

3) 사람을 미워함이 곧 예수를 미워함이니

4) 예수의 가르친 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사상의 표현이 하나님을 사랑하자, 농촌을 사랑하자, 노동을 사랑하자고 하는 三愛思想으로 나타났다. 그의 사상은 신앙을 실제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것으로 억압받고 피폐한 농촌을 구하려 한데서 현실로 표출 되었다. 이러한 삶은 일제 때 시작하여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제 때 미국에서 이승만과 조우한 이래 해방 후에 미군정의 고문을 거처 이승만 정권하의 금융조합회장으로 농촌운동을 계속했던 일이 정치적 도약을 꾀한 행위로 비쳐져 그의 농촌운동은 또 한 번 좌초를 겪었다. 그러할지라도 그의 농촌운동은 자유당 정권 때나 군사정권 하에서도 농민생활이란 잡지를 간행하고 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한평생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이것이 그의 유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당시의 장로교회가 개인구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참여의 경지까지 끌어 올린 실천적 목회자였고, 신앙을 생활화 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또한 Global man이었다. 그의 활동무대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평원과 태평양너머 북미대륙까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의 하나님 사랑으로 인한 농촌운동과 애국적인 독립운동은 그 일들의 활동무대가 주로 국내였기 때문에 이미 많이 연구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미국에서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그는 모두 4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체류하며 학업을 연마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활동을 했다. 그곳에서의 연구와 활동이 그의 사상과 이후의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하려는 것이 본 논고의 주지이다. 나아가서 그의 애국사상과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을 살펴,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이 어떠한 경로로 해서 당시 조선교회의 주류 사조와 결부될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려고 한다.

 

II. 1차 도미-유학

 

그의 첫 번째 도미는 신앙이 생활화된, 성숙한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3단계에 걸쳐 확립되었다. 첫 단계는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한 것이었다. 부친의 영향과 어렸을 때 교육받은 기독교학교인 청남학교와 숭실학당 및 교회의 영향으로 배민수는 1923년 숭실전문 예과에 입학할 무렵까지 민족주의적인 사상과 신앙을 갖고 있었다. 숭실학당 재학 시에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민회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하다가 국민회 사건으로 수감되었고, 3.1운동 때도 함경북도 성진에서 체포되어 1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둘째 단계는 개량적인 민족운동으로 전향한 것이었다. 숭실에서 조만식을 만나 그와 더불어 농촌을 위해 활동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다니며 영적 생활과 현실생활, 교회와 사회에서의 선교와 신앙운동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했으나 그들의 추상적인 반론에 실망하였다. 신학교는 물론 당시의 교회도 실천적인 생활이 없이 영적인 면만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가서 자유와 민주주의와 물질적인 생활의 영성화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셋째 단계가 바로 이 미국 유학생활 통해 신학사상이 형성된 것이었다.

그가 1931년에 도미하여 유학한 곳은 시카고의 장로교 신학교(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곧 오늘날의 매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였다. 내한 선교사로 초기 한국교회 형성의 주춧돌을 놓은 S.A. Moffett이나 W.M. Baird가 수학할 때는 이 학교의 신학적인 경향이 보수적이었고 청교도주의 적이었다. 그러나 배민수가 공부하던 1930년대 초반에는 신학교 교수들이 근본주의적도 아니고 현대주의적도 아닌 중도적 경향에 있었다. 이무렵 한국인 학생들은 배민수 외에도 해방 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金仁俊, 세브란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金鳴善을 비롯하여 원산에서 온 이규영, 의주에서 온 백낙봉, 문창근 등이 유학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한국학생들과 달리 그룹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모여 기도와 토의를 하다가 기독인 협력 친우회’(Cooperative Christian Fellowship)란 모임을 조직했다. 모임의 표어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으로 하였고, A. 신조간의 (이해와)협력, B. 인종간의 우애, C. 경제적 삶의 풍요 등 3가지를 세부지침으로 삼았다.

이 모임은 가급적 2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극단적 환상주의와 현대주의를 극복하고 신조가 다른 교단과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토의했다. 아울러 인종문제나 경제적 불균형의 문제 등에 관해 기독교 지도자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관해 구체적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모임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회원들은 모임의 취지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 구체적인 변화가 배민수에게도 나타나 시야가 세계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넓어졌다.

 

미국에 오기 전 나의 근본사상은 나의 조국과 동포에 대한 민족주의적 애국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전 세계적 입장에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좋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친족애가 이기적이고 의미 없는 가족 친척 주의나 민족주의 보다 깊이 있고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안목이 넓어진 데는 학교 커리큐럼의 영향이 있었고, 미국의 다국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중 개방적인 자세를 갖게 된 데서도 연유했다. 당시에 이 학교의 교과과정에는 John A. Garber교수가 사회학을 담당하여 사회학개론’, ‘기독교와 사회발전(Christianity and Social Progress)', '농촌 사회학과 농촌교회(Rural Sociology and the Country Church)', '도시사회학과 도시교회(Urban Sociology and the City Church)', '사회적 종교적 기구로서의 가정(The Family as a Social, Religious Institution)', ’사회조사와 연구(Social Surveys and Research)'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사회 발전은 당시에 채택된 사회신조(Social Creeds)와 사회개혁 등의 제반 문제를 교과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과과정이 제공된 것은 산업화ㆍ도시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W. Rauschenbush의 사회복음 신학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신학훈련은 1933년에 귀국한 후 바로 그 결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민족현실을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인식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기독교 사회복음과 빈곤문제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인식하였다. 현실의 교회가 근본주의적 신앙과 부르주와적인 성격을 강하게 견지한 것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적 입장과 계급해방 투쟁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기독교 농촌연구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수탈정책과 지주의 횡포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농촌을 복음화시켜 예수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이러 일을 위해 상당히 많은 금액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액수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1년에 그를 도와 준 그린리로프 여사가 찾아와서 $4,000을 희사하며 학업보다도 즉시 한국에 돌아가서 활동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통고하고 희사금을 당시 한국 교계의 거물인 X목사에게 전했다. X목사를 민경배는 정인과 목사로 단정한다. 배민수가 자서전에서 이 기금의 관리가 불분명했던 것으로 기록한 사실을 주목하고 정인과는 안창호의 흥사단계였으나 배민수는 이승만의 동지회계여서 두 사람의 사이에 처음부터 간격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배민수가 이승만계와 가까워 진 것은 1940년대 초반이었다. 배민수가 귀국했을 때 정인과는 그를 장로회 총회 농촌부의 총무로 인준시켰다. 그는 농촌문제에 대한 사명감과 향후 4년간 그 부인이 지급한 희사금으로 인해 총무로 활동했다. 모호한 희사금 관리 속에서도 그녀는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때 그룹 활동을 같이 했던 커틀러(J. Kenneth Cutler) 목사를 통해 선교비를 보내주었다. 농촌을 향한 그의 사랑의 봉사는 1937년 타의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III. 2차 도미-미국 망명

 

두 번째의 도미는 일종의 망명이었다. 그의 농촌운동과 사상이 몰이해되어 총회에서 농촌부가 해체되었고, 일제는 그가 농촌연구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음모했다고 보았다. 그의 농촌운동이 설 땅은 없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님과 이웃(농촌)과 노동에 대한 사랑의 삼애 정신이고 그 근본바탕은 하나님나라 사상이었다. 이것은 영적신앙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하나님나라 실천운동이었다. 이 사상은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이나 YMCA 및 장로교 농촌운동처럼 단순히 농촌의 경제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정도를 넘어선 조선농촌의 예수화였다. 생산량 증가운동에 분배운동도 가미시킨 것이었다. 장로교의 원로였던 채청민과 신앙생활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하던 논객 김인서도 이 점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농촌부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다른 한편 그의 활동은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도 대립되어 탄압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신사참배를 또한 적극 반대하고 있어서 그의 농촌운동은 반체제운동으로 몰렸다.

그는 국내에 있을 수 없어 미국에 있는 친구 Cutler에게 부목사로 초빙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친구의 주선으로 1938년에 동경과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LA의 김성락 박사 집에 머물렀다. 주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하여 그 부근에 사는 마펫을 만나 그간의 한국교회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동부로 가면서 Salt Lake City의 몰몬교회에 들려 장엄한 파이프 올갠 연주도 들었다. 19387Indiana주의 Gary City에 도착하여 Ken Cutler 목사가 시무하는 ‘43번가 장로교회의 부목사 자격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 시기의 활동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순회하며 강연 및 설교를 하던 시기였다. 그는 19389월부터 1941년 여름까지 미전역에서 순회설교를 행했다. Fort Callins에서 시작하여 이후 3년간 New York, L.A., California, Vermont, New Hampshere, Houston, Texas 28개주와 여러 도시들을 돌며 학교와 교회, 봉사단체, 여성ㆍ청년모임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여기에는 매코믹신학교 동기생들의 도움과 협조가 컸다. 매코믹신학교 동기였던 Harold Congdon이 시무하는 IwoaSandwitch 교회에서는 한 주일에 7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따라 노래도 하고 풀루트도 불며 대화도 나누었다.

강연이나 설교의 내용은 장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동소이했다.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는 민족이란 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한국 백성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참석, 헌금, 전도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특히 일본의 종교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기독교 탄압정책을 폭로하며 이기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활동을 예화로 들기도 했다. 나라 잃은 망명객의 혼신을 다하는 애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설교 대상으로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어른들에게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고등학생ㆍ청년 여름수양회에 즐겨 참석했다. 그 수양회가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고 미래를 설계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는 점을 감안하여 준비도 많이 하였다. Colorado에서 시작하여 Kansas, New Hampshire, Vermont, Massachusetts, Minnesota, Montana, South Dakota, 그 외 여러 주에 걸쳐 청년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3년간 28개주의 약 440개 교회와 단체에서 1300여 회를 설교했다. 청중은 대략 90,000여명이나 되었다. 받은 사례비는 $5,000 정도이고 훗날에 한국에서 일할 기금으로 $1,250가량을 저축했다. 그는 이 활동을 바탕으로 'The Good Samaritan Project in Korea'라는 이름의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미국인 2~3천명이 여기에 동조했다.

두 번째 단계는 19419월부터 19435월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다시 학업을 연마하던 시기였다. 그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거의 다 찾아보았기 때문에 미국 전역을 다니며 3년간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원하던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1941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연구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학위에 관심이 있었으나 희랍어와 히브리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포기하고 관심 있는 과목들을 수강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개인적ㆍ목회자적인 면을 넘어 나라의 독립과 국가건설문제, 나아가서 기독교의 지상천국 실현 문제 등을 당시의 국제정세와 관련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은 지상천국의 건설과 사회복음에 관한 신학적인 성찰, 파시즘에 대항하는 미소 협조체제의 형성, 한국문제 해결에 소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등의 정치적인 문제에 쏠려 있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사상은 대립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는 당시 독일에서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머무르고 있던 Otto Piper 박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Joseph L. Horomadka 박사를 만나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 파이퍼 박사는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피하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후에 그의 아들이 징집되고 독일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탐구와 그 실현에 있었다. 배민수의 관심사와 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드카 박사도 반 히틀러주의자였다. 체코슬로바키아나 한국의 상황이 비슷했던 까닭에 두 망명객은 쉽게 가까워졌고, 함께 울기도 했다. 그는 로마드카를 빈민구원의 사회복음과 지상천국의 건설을 희구하는 신학자로 보았다. 배민수는 그런 면에서 로마드카와 공감했고, 그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논문을 써서 바치기도 했다. 로마드카는 그 때 이미 체코의 재건은 소련과의 협조 하에 추진될 것으로 보았고, 배민수에게 한국의 재건도 소련과의 협조 하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민수는 로마드카의 신학 사상에는 공감했으나, 현실적 측면에서의 소련 접근론은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이상론으로 보았다. 1943년 초,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부장관 Jan Masaryk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 인근의 프린스톤 대학교에 강연 차 왔다. 로마드카는 마사리크와 배민수를 함께 그의 집에 초대했다. 배민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드카는 후에 영국에 망명한 자국의 대통령 Benes에게 한국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이차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되어 외교적인 이득을 얻지는 못했으나, 애국자의 노력하던 모습은 기억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미국에서의 세 번째 단계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뉴욕에서 문서 검열관으로 활동하던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였다. 미국무성은 일본의 우편과 비밀문서를 검열하기 위해 한국인 25명으로 팀을 구성하였는데, 주변의 권유로 19435월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자 곧 이에 참여하였다. 이 기간은 비록 미국에서지만 그의 배일사상이 무한이 표출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으로 최대한 열성으로 봉직했을것으로 여겨진다. 이 해 가을에 오하이오 주의 애쉬랜드에서 단합대회(Recognition Conference)가 열렸다. 여기에 신두식(James Shein), 후에 장면 정부의 주 유엔 대사를 역임한 임창영(Chaning Leim) 박사 등이 참석했으며, 이때를 전후로 그가 이승만의 동지회계와 가까워졌다. 배민수는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같은 길을 갔다. 배민수는 안창호와 조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함께 농촌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사후에 그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 이승만이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로 반공과 반소노선에 공감했던 점, 배민수가 이승만이 세운 뉴욕 한인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 등이 친 이승만계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차 도미의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뉴욕한인교회를 담임 목회하던 시기였다. 그는 미국정부의 문서 검열관 일을 이차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그만두고 목회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배민수는 1941년부터 맨하탄의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다. 이 교회는 이승만 박사 등이 주축이 되어 1920년에 세운 교회였다. 미국 감리교 소속으로 25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였으나 재정적으로는 적자였다. 그는 1945년 정초부터 그의 친구요 과거 기독교농촌 연구회의 회원이었던 김준성의 뒤를 이어 이 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첫 사업은 교회 적자를 메우기 위한 캠페인과 바자회였다. 이러한 사업으로 $5,000을 모금했고, 후에 감리교 본부가 $20,000의 부채를 해결해주었다. 아울러 25주년 기념예배도 거행했다. 그러나 그 목회 기간은 한 해도 채우지 못했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을 돕기 위해 윤응팔 목사에게 직분을 넘기고 교회를 사임했다.

 

IV. 3차 도미

 

해방 후 그는 7년 반 만에 귀국했다. 가족과 상봉하기 위함은 물론 미군정청의 고문격 통역으로서 조국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정 때는 통역정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통역관의 역할이 중대하였다. 게다가 그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임명된 수석통역관이었기 때문에 미소 관계와 좌우 정치세력의 대립 및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정책수립에 있어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그는 해방정국이 좌파와 우파 및 중간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할 때 철저한 우파 편에서 활약했다. 그는 좌파세력이 강한 김제와 남원지역에서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섰다. 19469월에 서울 노동부에서 일하는 L.A. Shaw 대령의 통역관이 된 후에도 그의 반공활동은 변치 않았다. 공산주의를 대구의 10월 폭동, 여순 반란사건에서 보듯 기독교에 피해를 많이 입힌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보았다. 또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가 인간을 대량 학살시킬 원자폭탄 수소폭탄을 만들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 기간에 그는 공무활동 이외에 목회활동도 하였다.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을 위해 성도교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 교회는 단기간에 1,5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실향민에게 영적인 쉼을 주고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이들을 도우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주한 미군철수령에 의해 미국으로 갔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도미였으며, 19481218일에 서울을 떠나 한국전쟁 중인 195211월에 다시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체류했다. 그는 한국에 설립된 주한 경제 협조처(EAC)’나 한국정부에서 더 일할 수도 있었으나 좌익의 암살위협 같은 신변안전 문제, 자녀교육, 목회활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등으로 인해 도미를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미국으로 떠나는 그를 부러워하였으나, 본인은 불확실한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까닭에 가장 가슴 아픈 여행이었다고 토로했다.

19491, 미국에 도착하여 연고지와 친구들이 있던 여러 지역들-Chicago, Toledo, Jersey Shore, New York-을 경유하여 2West VirginiaWheeling에 정착했다. 목회활동이나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상황을 교민들에게 알릴 필요도 있었고, 언제라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 자유로운 직업인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다. 강연의 주제는 그간에 그가 체험한 공산당의 테러와 적화통일의 음모였다. 순회강연 중에 원한경 박사 부인이 공산당에 의해 피살된 일을 듣고 도처에서 이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소련의 불럭화 정책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음과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탄압을 강조하며 미국 교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후원을 촉구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반공을 더한층 강조했다. 여순 반란사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당에게 피살당했으나 손 목사가 그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사 자신이 후에 공산당에게 피살당한 실화도 자주 인용했다. 목사로 그의 친우였으며 후에 대구 폭동의 주역이 된 최문식을 통해 들은 정보로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그는 소련의 세계 제패 야욕과 3차 세계대전에 맞설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승리를 확신하며 자유와 주님을 사랑하는 미국사람들이 그 임무를 다해 줄 것을 요청하고 언론에 홍보도 하였다. 또한 많은 구호품을 수집하여 전란 중에 있는 민중들에게 보냈다.

배민수의 이러한 미국의 참전요청 강연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네소타 대학의 유학생 조승복이 쓴 글이었다. 그 글의 논지는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미국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파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했다는 것, 현 한국의 분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투쟁이므로 미국의 개입이 부당하다는 해방정국 중간파의 논리였다. 이에 대해 배민수는 친일파도 좌익척결을 위해 같이 종사한다면 용서 받을 수 있고 한국문제를 한국인에게 맡기는 것은 좌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내 버려두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자기는 이승만 노선을 지지 한다고 반박했다. 시종일관된 그의 이러한 사상은 계급주의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반공주의 국가관과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회강연 중인 195164Minnesota주의 St. Paul에 있는 Macalester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그의 장남이 또한 학사학위를 받아 가족의 기쁨은 더 컸다. 그를 위한 박사학위 추천은 이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고 배민수가 청주의 청남학교를 다닐 때 은사였던 Edwin Kagin 박사가 하였다. 학위기는 한국에서의 4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포함한 애국활동과 농촌운동 그리고 미국에서의 한국을 위한 활동을 기리고 있었다. 그는 이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이 세 번째 도미에서 미국 전역을 오가며 약 800여회의 순회강연과 설교를 했던 그는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전란 중에 있는 조국을 생각하여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기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다가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한 농촌운동을 위해 195211월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애국정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V. 4차 도미

 

그는 6.25 전쟁 중에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농민을 돕는 일을 자청하여 금융조합연합회(지금의 농협중앙회 전신) 회장직을 맡아 눈부신 활동을 했다. 평생의 삶의 지표인 농촌운동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고 최대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한편, ‘새농민잡지를 매월 20만부씩 간행하였고, 극빈 농민을 구제하는 일들을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금융조합의 농촌 단말조직인 식산계를 통해 협동조합운동, 영농개선운동, 생활개선운동도 벌였다. 이때 벌인 농촌운동도 변함없이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의 정신에 근거하였고, 그의 목표는 농촌자립을 통한 농촌 복음화였다. 방기중은 그의 사상에 대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반공의식을 매개로 미국식 가치관이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활약하여 자유당 중앙위원 15인회에까지 진출하였다. 당시에 포스트 이승만을 노리던 이기붕은 배민수가 부통령 선거운동을 한다고 하여 이승만과 상의해서 금융조합연합회 회장직을 박탈시킨 것은 물론 자유당의 실세에서도 퇴거시켰다, 본인은 부통령 선거운동 설을 부인하지만 후에 그가 Alexandria 제일장로교회에서 시무하던 Paul Dahlstrom을 만나러 갔을 때 한 지방 신문이 그를 한국의 목사요 애국자요 한때 거의 부통령이 될 뻔했던 배박사라고 소개했던 것을 보면 그의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후 그는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중농정책을 펼치면서 농촌문제에 기여한 공로로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대전에서 농민학원을 운영하며 지내다가 다시 힘을 얻어 그를 도와 준 선린회의 재정비와 회원 재 모집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네 번째 도미한 그는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서 체류했다. 이때도 친구인 Arthur C. Prichard 목사의 주선으로 가는 곳 마다 설교하며 적극적으로 미전역을 돌며 활동했다. 일년동안 986차의 강연과 설교를했다. 이 방문은 과거에 그에게 후의를 베풀었던 이들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고 변함없는 우의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네 번째 미국 방문에 대해서는 그 일정이 밝혀져 있지만 구체적인 활동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VI. 결론

 

유학과 망명생활로 점철되었던 4차례의 미국방문 기간을 통합하면 배민수는 대략 15년 정도를 체미한 셈이었다. 일제 때나 해방 후에나 정치적 피해를 당해 어려울 때마다 그는 미국으로 도피하여 미국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국내에서 활동할 기금도 마련했다. 미국에서 기독교사상을 체득한 것과 특히 매코믹 신학교 유학 중에 사회복음주의를 접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신앙을 생활화 할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이 되었다. 아울러 미국생활을 통해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반공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반공 반소 의식은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고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어려울 때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면 그의 대미관은 어떠했는가? 그는 순회강연 도중에 청중들로부터 미국의 부정적인 면 어두운 면을 얘기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의 대답은 미국의 좋은 점, 밝은 면만을 보고 배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며 부정적인 대답을 피했다. 물론 그도 미국이라 하여 다 옳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는 좋은 점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미국이 반소ㆍ반공의 기독교주의 사상에 철저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는 점,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는 점, 북미대륙에 맨 처음 왔던 청교도(Puritans)들과 순례자(Pilgrim Fathers)들이 가졌던 신앙심이 어디서나 귀감이 된다고 보았고, 죠지 워싱턴, 아브라함 링컨, 우드로우 윌슨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지도자가 많은 점을 좋게 보았다. 이런 긍정적인 대미관은 그가 어려울 때 미국 전역을 다니며 도움 받고 은덕을 입은 일과 매코믹과 프린스톤에서 받은 신학교육 그리고 주한 선교사와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기독교신앙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던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은 수차에 걸친 오랜 미국생활 속에도 불변하였다. 미국에서의 삶도 그의 평생 지표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와 실현을 추구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어디에서나 그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했다.

그는 뚜렷한 직업이 없이 미국에서 체류하며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과의 폭넓고 지속적인 교제는 자신의 역경을 헤쳐 나가는 발판이 되기도 했지만 일제 때와 해방 후에 농촌활동을 하기 위한 후원금을 모금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실로 초지일관하여 어려울 때나 평안할 때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하나님사랑, 농촌사랑, 노동을 사랑한 목회자였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과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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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배민수, 농민학원, 삼애, 프린스턴, 숭실. 뉴욕, 미군정, 한국전쟁. 농촌운동,

독립운동.배민수 목사의 미국에서의 활동

 

최재건

 

1. 서론

 

배민수 목사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후 농민생활이란 잡지가 시골에 배포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배민수 박사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후 1960년대 초반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을 방문하고 인근에 있는 대전기독교 농민학원을 둘러보던 중 배민수 박사가 그 학원의 설립자로 각인된 것을 보고 그가 농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회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레 그가 일제 때 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농촌부에서 벌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필자가 뉴욕 근교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할 때는 배민수 목사의 장남인 배영 박사가 미국의 교육계와 미국 장로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초빙하기도 했다. 그와 유족은 배민수 목사가 서거한 후 그의 유지 실현을 위해 6만여 평의 토지를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며 연구를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배민수 목사의 활동에 관해 많은 연구가 진척되었다.

배민수 목사에 대한 업적과 평가는 10여 회에 걸친 배민수 목사 기념강좌와 다원 농촌 목회자 프로그램에서 발표된 것들을 비롯한 여러 논저들에서 이미 거의 드러나고 정리되었다. 그 결실로 배민수 자서전과 자료집 및 그에 관한 연구서가 발행되었다. 그의 자서전인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이 예수교장로회 농어촌부와(1993)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2002)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어 번역본이 배민수자서전이란 명칭으로 출판 되었다. 그에 관한 자료집이 방기중에 의해 편찬되어 출판되었으며, 그의 사상도 방기중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배민수 목사(1896-1968)는 충북 청주에서 대한제국 청주감영 진위대 부교인 부친 경주裵氏 裵昌根(1867-1909)과 모친 張喜云(1867-1945)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친구들의 안내로 밀러(F. S. Miller) 선교사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예수를 믿어 자신의 영혼도 건지고 나라도 건지겠다는 것이 개종동기였다. 그의 부친은 망국의 상황에서 의병대장으로서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저항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부친의 유언 중 하나는 나라를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부친이 보여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뜻을 이어받아 그는 敬天愛人의 애국자와 농촌운동가와 성직자의 삶을 살았다. 일제하에 선친의 애국혼과 당시 한국 기독교회가 지닌 나라사랑 정신에 따라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족을 돌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편모는 아래구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神意를 성취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방법은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이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1) 사람을 사랑함이 예수를 사랑함이오.

2)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함이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함이오.

3) 사람을 미워함이 곧 예수를 미워함이니

4) 예수의 가르친 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사상의 표현이 하나님을 사랑하자, 농촌을 사랑하자, 노동을 사랑하자고 하는 三愛思想으로 나타났다. 그의 사상은 신앙을 실제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것으로 억압받고 피폐한 농촌을 구하려 한데서 현실로 표출 되었다. 이러한 삶은 일제 때 시작하여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제 때 미국에서 이승만과 조우한 이래 해방 후에 미군정의 고문을 거처 이승만 정권하의 금융조합회장으로 농촌운동을 계속했던 일이 정치적 도약을 꾀한 행위로 비쳐져 그의 농촌운동은 또 한 번 좌초를 겪었다. 그러할지라도 그의 농촌운동은 자유당 정권 때나 군사정권 하에서도 농민생활이란 잡지를 간행하고 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한평생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이것이 그의 유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당시의 장로교회가 개인구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참여의 경지까지 끌어 올린 실천적 목회자였고, 신앙을 생활화 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또한 Global man이었다. 그의 활동무대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평원과 태평양너머 북미대륙까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의 하나님 사랑으로 인한 농촌운동과 애국적인 독립운동은 그 일들의 활동무대가 주로 국내였기 때문에 이미 많이 연구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미국에서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그는 모두 4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체류하며 학업을 연마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활동을 했다. 그곳에서의 연구와 활동이 그의 사상과 이후의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하려는 것이 본 논고의 주지이다. 나아가서 그의 애국사상과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을 살펴,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이 어떠한 경로로 해서 당시 조선교회의 주류 사조와 결부될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려고 한다.

 

II. 1차 도미-유학

 

그의 첫 번째 도미는 신앙이 생활화된, 성숙한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3단계에 걸쳐 확립되었다. 첫 단계는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한 것이었다. 부친의 영향과 어렸을 때 교육받은 기독교학교인 청남학교와 숭실학당 및 교회의 영향으로 배민수는 1923년 숭실전문 예과에 입학할 무렵까지 민족주의적인 사상과 신앙을 갖고 있었다. 숭실학당 재학 시에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민회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하다가 국민회 사건으로 수감되었고, 3.1운동 때도 함경북도 성진에서 체포되어 1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둘째 단계는 개량적인 민족운동으로 전향한 것이었다. 숭실에서 조만식을 만나 그와 더불어 농촌을 위해 활동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다니며 영적 생활과 현실생활, 교회와 사회에서의 선교와 신앙운동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했으나 그들의 추상적인 반론에 실망하였다. 신학교는 물론 당시의 교회도 실천적인 생활이 없이 영적인 면만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가서 자유와 민주주의와 물질적인 생활의 영성화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셋째 단계가 바로 이 미국 유학생활 통해 신학사상이 형성된 것이었다.

그가 1931년에 도미하여 유학한 곳은 시카고의 장로교 신학교(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곧 오늘날의 매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였다. 내한 선교사로 초기 한국교회 형성의 주춧돌을 놓은 S.A. Moffett이나 W.M. Baird가 수학할 때는 이 학교의 신학적인 경향이 보수적이었고 청교도주의 적이었다. 그러나 배민수가 공부하던 1930년대 초반에는 신학교 교수들이 근본주의적도 아니고 현대주의적도 아닌 중도적 경향에 있었다. 이무렵 한국인 학생들은 배민수 외에도 해방 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金仁俊, 세브란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金鳴善을 비롯하여 원산에서 온 이규영, 의주에서 온 백낙봉, 문창근 등이 유학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한국학생들과 달리 그룹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모여 기도와 토의를 하다가 기독인 협력 친우회’(Cooperative Christian Fellowship)란 모임을 조직했다. 모임의 표어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으로 하였고, A. 신조간의 (이해와)협력, B. 인종간의 우애, C. 경제적 삶의 풍요 등 3가지를 세부지침으로 삼았다.

이 모임은 가급적 2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극단적 환상주의와 현대주의를 극복하고 신조가 다른 교단과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토의했다. 아울러 인종문제나 경제적 불균형의 문제 등에 관해 기독교 지도자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관해 구체적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모임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회원들은 모임의 취지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 구체적인 변화가 배민수에게도 나타나 시야가 세계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넓어졌다.

 

미국에 오기 전 나의 근본사상은 나의 조국과 동포에 대한 민족주의적 애국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전 세계적 입장에서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좋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친족애가 이기적이고 의미 없는 가족 친척 주의나 민족주의 보다 깊이 있고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안목이 넓어진 데는 학교 커리큐럼의 영향이 있었고, 미국의 다국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중 개방적인 자세를 갖게 된 데서도 연유했다. 당시에 이 학교의 교과과정에는 John A. Garber교수가 사회학을 담당하여 사회학개론’, ‘기독교와 사회발전(Christianity and Social Progress)', '농촌 사회학과 농촌교회(Rural Sociology and the Country Church)', '도시사회학과 도시교회(Urban Sociology and the City Church)', '사회적 종교적 기구로서의 가정(The Family as a Social, Religious Institution)', ’사회조사와 연구(Social Surveys and Research)'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사회 발전은 당시에 채택된 사회신조(Social Creeds)와 사회개혁 등의 제반 문제를 교과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과과정이 제공된 것은 산업화ㆍ도시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W. Rauschenbush의 사회복음 신학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신학훈련은 1933년에 귀국한 후 바로 그 결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민족현실을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인식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기독교 사회복음과 빈곤문제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인식하였다. 현실의 교회가 근본주의적 신앙과 부르주와적인 성격을 강하게 견지한 것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적 입장과 계급해방 투쟁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기독교 농촌연구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수탈정책과 지주의 횡포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농촌을 복음화시켜 예수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이러 일을 위해 상당히 많은 금액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액수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31년에 그를 도와 준 그린리로프 여사가 찾아와서 $4,000을 희사하며 학업보다도 즉시 한국에 돌아가서 활동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통고하고 희사금을 당시 한국 교계의 거물인 X목사에게 전했다. X목사를 민경배는 정인과 목사로 단정한다. 배민수가 자서전에서 이 기금의 관리가 불분명했던 것으로 기록한 사실을 주목하고 정인과는 안창호의 흥사단계였으나 배민수는 이승만의 동지회계여서 두 사람의 사이에 처음부터 간격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배민수가 이승만계와 가까워 진 것은 1940년대 초반이었다. 배민수가 귀국했을 때 정인과는 그를 장로회 총회 농촌부의 총무로 인준시켰다. 그는 농촌문제에 대한 사명감과 향후 4년간 그 부인이 지급한 희사금으로 인해 총무로 활동했다. 모호한 희사금 관리 속에서도 그녀는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때 그룹 활동을 같이 했던 커틀러(J. Kenneth Cutler) 목사를 통해 선교비를 보내주었다. 농촌을 향한 그의 사랑의 봉사는 1937년 타의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III. 2차 도미-미국 망명

 

두 번째의 도미는 일종의 망명이었다. 그의 농촌운동과 사상이 몰이해되어 총회에서 농촌부가 해체되었고, 일제는 그가 농촌연구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음모했다고 보았다. 그의 농촌운동이 설 땅은 없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님과 이웃(농촌)과 노동에 대한 사랑의 삼애 정신이고 그 근본바탕은 하나님나라 사상이었다. 이것은 영적신앙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하나님나라 실천운동이었다. 이 사상은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이나 YMCA 및 장로교 농촌운동처럼 단순히 농촌의 경제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정도를 넘어선 조선농촌의 예수화였다. 생산량 증가운동에 분배운동도 가미시킨 것이었다. 장로교의 원로였던 채청민과 신앙생활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하던 논객 김인서도 이 점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농촌부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다른 한편 그의 활동은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도 대립되어 탄압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신사참배를 또한 적극 반대하고 있어서 그의 농촌운동은 반체제운동으로 몰렸다.

그는 국내에 있을 수 없어 미국에 있는 친구 Cutler에게 부목사로 초빙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친구의 주선으로 1938년에 동경과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LA의 김성락 박사 집에 머물렀다. 주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하여 그 부근에 사는 마펫을 만나 그간의 한국교회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동부로 가면서 Salt Lake City의 몰몬교회에 들려 장엄한 파이프 올갠 연주도 들었다. 19387Indiana주의 Gary City에 도착하여 Ken Cutler 목사가 시무하는 ‘43번가 장로교회의 부목사 자격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 시기의 활동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순회하며 강연 및 설교를 하던 시기였다. 그는 19389월부터 1941년 여름까지 미전역에서 순회설교를 행했다. Fort Callins에서 시작하여 이후 3년간 New York, L.A., California, Vermont, New Hampshere, Houston, Texas 28개주와 여러 도시들을 돌며 학교와 교회, 봉사단체, 여성ㆍ청년모임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여기에는 매코믹신학교 동기생들의 도움과 협조가 컸다. 매코믹신학교 동기였던 Harold Congdon이 시무하는 IwoaSandwitch 교회에서는 한 주일에 7번 설교한 적도 있었다.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따라 노래도 하고 풀루트도 불며 대화도 나누었다.

강연이나 설교의 내용은 장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동소이했다.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는 민족이란 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한국 백성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참석, 헌금, 전도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특히 일본의 종교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기독교 탄압정책을 폭로하며 이기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활동을 예화로 들기도 했다. 나라 잃은 망명객의 혼신을 다하는 애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설교 대상으로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어른들에게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고등학생ㆍ청년 여름수양회에 즐겨 참석했다. 그 수양회가 젊은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고 미래를 설계하는 귀중한 시간이 되는 점을 감안하여 준비도 많이 하였다. Colorado에서 시작하여 Kansas, New Hampshire, Vermont, Massachusetts, Minnesota, Montana, South Dakota, 그 외 여러 주에 걸쳐 청년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3년간 28개주의 약 440개 교회와 단체에서 1300여 회를 설교했다. 청중은 대략 90,000여명이나 되었다. 받은 사례비는 $5,000 정도이고 훗날에 한국에서 일할 기금으로 $1,250가량을 저축했다. 그는 이 활동을 바탕으로 'The Good Samaritan Project in Korea'라는 이름의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미국인 2~3천명이 여기에 동조했다.

두 번째 단계는 19419월부터 19435월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다시 학업을 연마하던 시기였다. 그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거의 다 찾아보았기 때문에 미국 전역을 다니며 3년간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원하던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1941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연구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학위에 관심이 있었으나 희랍어와 히브리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포기하고 관심 있는 과목들을 수강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개인적ㆍ목회자적인 면을 넘어 나라의 독립과 국가건설문제, 나아가서 기독교의 지상천국 실현 문제 등을 당시의 국제정세와 관련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은 지상천국의 건설과 사회복음에 관한 신학적인 성찰, 파시즘에 대항하는 미소 협조체제의 형성, 한국문제 해결에 소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등의 정치적인 문제에 쏠려 있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사상은 대립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는 당시 독일에서 와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머무르고 있던 Otto Piper 박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Joseph L. Horomadka 박사를 만나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 파이퍼 박사는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피하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후에 그의 아들이 징집되고 독일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탐구와 그 실현에 있었다. 배민수의 관심사와 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드카 박사도 반 히틀러주의자였다. 체코슬로바키아나 한국의 상황이 비슷했던 까닭에 두 망명객은 쉽게 가까워졌고, 함께 울기도 했다. 그는 로마드카를 빈민구원의 사회복음과 지상천국의 건설을 희구하는 신학자로 보았다. 배민수는 그런 면에서 로마드카와 공감했고, 그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논문을 써서 바치기도 했다. 로마드카는 그 때 이미 체코의 재건은 소련과의 협조 하에 추진될 것으로 보았고, 배민수에게 한국의 재건도 소련과의 협조 하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민수는 로마드카의 신학 사상에는 공감했으나, 현실적 측면에서의 소련 접근론은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이상론으로 보았다. 1943년 초,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부장관 Jan Masaryk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 인근의 프린스톤 대학교에 강연 차 왔다. 로마드카는 마사리크와 배민수를 함께 그의 집에 초대했다. 배민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드카는 후에 영국에 망명한 자국의 대통령 Benes에게 한국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이차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되어 외교적인 이득을 얻지는 못했으나, 애국자의 노력하던 모습은 기억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미국에서의 세 번째 단계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뉴욕에서 문서 검열관으로 활동하던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였다. 미국무성은 일본의 우편과 비밀문서를 검열하기 위해 한국인 25명으로 팀을 구성하였는데, 주변의 권유로 19435월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자 곧 이에 참여하였다. 이 기간은 비록 미국에서지만 그의 배일사상이 무한이 표출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으로 최대한 열성으로 봉직했을것으로 여겨진다. 이 해 가을에 오하이오 주의 애쉬랜드에서 단합대회(Recognition Conference)가 열렸다. 여기에 신두식(James Shein), 후에 장면 정부의 주 유엔 대사를 역임한 임창영(Chaning Leim) 박사 등이 참석했으며, 이때를 전후로 그가 이승만의 동지회계와 가까워졌다. 배민수는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같은 길을 갔다. 배민수는 안창호와 조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함께 농촌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사후에 그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 이승만이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로 반공과 반소노선에 공감했던 점, 배민수가 이승만이 세운 뉴욕 한인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 등이 친 이승만계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차 도미의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뉴욕한인교회를 담임 목회하던 시기였다. 그는 미국정부의 문서 검열관 일을 이차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그만두고 목회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배민수는 1941년부터 맨하탄의 뉴욕한인교회에 출석했다. 이 교회는 이승만 박사 등이 주축이 되어 1920년에 세운 교회였다. 미국 감리교 소속으로 25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였으나 재정적으로는 적자였다. 그는 1945년 정초부터 그의 친구요 과거 기독교농촌 연구회의 회원이었던 김준성의 뒤를 이어 이 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첫 사업은 교회 적자를 메우기 위한 캠페인과 바자회였다. 이러한 사업으로 $5,000을 모금했고, 후에 감리교 본부가 $20,000의 부채를 해결해주었다. 아울러 25주년 기념예배도 거행했다. 그러나 그 목회 기간은 한 해도 채우지 못했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을 돕기 위해 윤응팔 목사에게 직분을 넘기고 교회를 사임했다.

 

IV. 3차 도미

 

해방 후 그는 7년 반 만에 귀국했다. 가족과 상봉하기 위함은 물론 미군정청의 고문격 통역으로서 조국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정 때는 통역정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통역관의 역할이 중대하였다. 게다가 그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임명된 수석통역관이었기 때문에 미소 관계와 좌우 정치세력의 대립 및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정책수립에 있어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그는 해방정국이 좌파와 우파 및 중간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할 때 철저한 우파 편에서 활약했다. 그는 좌파세력이 강한 김제와 남원지역에서 좌익세력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섰다. 19469월에 서울 노동부에서 일하는 L.A. Shaw 대령의 통역관이 된 후에도 그의 반공활동은 변치 않았다. 공산주의를 대구의 10월 폭동, 여순 반란사건에서 보듯 기독교에 피해를 많이 입힌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보았다. 또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가 인간을 대량 학살시킬 원자폭탄 수소폭탄을 만들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 기간에 그는 공무활동 이외에 목회활동도 하였다.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을 위해 성도교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 교회는 단기간에 1,5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급성장했다. 실향민에게 영적인 쉼을 주고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이들을 도우려고 애썼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주한 미군철수령에 의해 미국으로 갔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도미였으며, 19481218일에 서울을 떠나 한국전쟁 중인 195211월에 다시 귀국할 때까지 미국에서 체류했다. 그는 한국에 설립된 주한 경제 협조처(EAC)’나 한국정부에서 더 일할 수도 있었으나 좌익의 암살위협 같은 신변안전 문제, 자녀교육, 목회활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등으로 인해 도미를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미국으로 떠나는 그를 부러워하였으나, 본인은 불확실한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까닭에 가장 가슴 아픈 여행이었다고 토로했다.

19491, 미국에 도착하여 연고지와 친구들이 있던 여러 지역들-Chicago, Toledo, Jersey Shore, New York-을 경유하여 2West VirginiaWheeling에 정착했다. 목회활동이나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상황을 교민들에게 알릴 필요도 있었고, 언제라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 자유로운 직업인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다. 강연의 주제는 그간에 그가 체험한 공산당의 테러와 적화통일의 음모였다. 순회강연 중에 원한경 박사 부인이 공산당에 의해 피살된 일을 듣고 도처에서 이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소련의 불럭화 정책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음과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탄압을 강조하며 미국 교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후원을 촉구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반공을 더한층 강조했다. 여순 반란사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당에게 피살당했으나 손 목사가 그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사 자신이 후에 공산당에게 피살당한 실화도 자주 인용했다. 목사로 그의 친우였으며 후에 대구 폭동의 주역이 된 최문식을 통해 들은 정보로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그는 소련의 세계 제패 야욕과 3차 세계대전에 맞설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승리를 확신하며 자유와 주님을 사랑하는 미국사람들이 그 임무를 다해 줄 것을 요청하고 언론에 홍보도 하였다. 또한 많은 구호품을 수집하여 전란 중에 있는 민중들에게 보냈다.

배민수의 이러한 미국의 참전요청 강연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네소타 대학의 유학생 조승복이 쓴 글이었다. 그 글의 논지는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미국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파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했다는 것, 현 한국의 분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투쟁이므로 미국의 개입이 부당하다는 해방정국 중간파의 논리였다. 이에 대해 배민수는 친일파도 좌익척결을 위해 같이 종사한다면 용서 받을 수 있고 한국문제를 한국인에게 맡기는 것은 좌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내 버려두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자기는 이승만 노선을 지지 한다고 반박했다. 시종일관된 그의 이러한 사상은 계급주의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반공주의 국가관과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회강연 중인 195164Minnesota주의 St. Paul에 있는 Macalester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그의 장남이 또한 학사학위를 받아 가족의 기쁨은 더 컸다. 그를 위한 박사학위 추천은 이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고 배민수가 청주의 청남학교를 다닐 때 은사였던 Edwin Kagin 박사가 하였다. 학위기는 한국에서의 4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포함한 애국활동과 농촌운동 그리고 미국에서의 한국을 위한 활동을 기리고 있었다. 그는 이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이 세 번째 도미에서 미국 전역을 오가며 약 800여회의 순회강연과 설교를 했던 그는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전란 중에 있는 조국을 생각하여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기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다가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한 농촌운동을 위해 195211월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애국정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V. 4차 도미

 

그는 6.25 전쟁 중에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농민을 돕는 일을 자청하여 금융조합연합회(지금의 농협중앙회 전신) 회장직을 맡아 눈부신 활동을 했다. 평생의 삶의 지표인 농촌운동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고 최대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한편, ‘새농민잡지를 매월 20만부씩 간행하였고, 극빈 농민을 구제하는 일들을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금융조합의 농촌 단말조직인 식산계를 통해 협동조합운동, 영농개선운동, 생활개선운동도 벌였다. 이때 벌인 농촌운동도 변함없이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의 정신에 근거하였고, 그의 목표는 농촌자립을 통한 농촌 복음화였다. 방기중은 그의 사상에 대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반공의식을 매개로 미국식 가치관이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활약하여 자유당 중앙위원 15인회에까지 진출하였다. 당시에 포스트 이승만을 노리던 이기붕은 배민수가 부통령 선거운동을 한다고 하여 이승만과 상의해서 금융조합연합회 회장직을 박탈시킨 것은 물론 자유당의 실세에서도 퇴거시켰다, 본인은 부통령 선거운동 설을 부인하지만 후에 그가 Alexandria 제일장로교회에서 시무하던 Paul Dahlstrom을 만나러 갔을 때 한 지방 신문이 그를 한국의 목사요 애국자요 한때 거의 부통령이 될 뻔했던 배박사라고 소개했던 것을 보면 그의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후 그는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중농정책을 펼치면서 농촌문제에 기여한 공로로 재건국민운동 중앙위원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대전에서 농민학원을 운영하며 지내다가 다시 힘을 얻어 그를 도와 준 선린회의 재정비와 회원 재 모집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네 번째 도미한 그는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서 체류했다. 이때도 친구인 Arthur C. Prichard 목사의 주선으로 가는 곳 마다 설교하며 적극적으로 미전역을 돌며 활동했다. 일년동안 986차의 강연과 설교를했다. 이 방문은 과거에 그에게 후의를 베풀었던 이들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고 변함없는 우의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네 번째 미국 방문에 대해서는 그 일정이 밝혀져 있지만 구체적인 활동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VI. 결론

 

유학과 망명생활로 점철되었던 4차례의 미국방문 기간을 통합하면 배민수는 대략 15년 정도를 체미한 셈이었다. 일제 때나 해방 후에나 정치적 피해를 당해 어려울 때마다 그는 미국으로 도피하여 미국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국내에서 활동할 기금도 마련했다. 미국에서 기독교사상을 체득한 것과 특히 매코믹 신학교 유학 중에 사회복음주의를 접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신앙을 생활화 할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이 되었다. 아울러 미국생활을 통해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반공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반공 반소 의식은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고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어려울 때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면 그의 대미관은 어떠했는가? 그는 순회강연 도중에 청중들로부터 미국의 부정적인 면 어두운 면을 얘기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의 대답은 미국의 좋은 점, 밝은 면만을 보고 배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며 부정적인 대답을 피했다. 물론 그도 미국이라 하여 다 옳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보다는 좋은 점이 많다고 보았다. 그는 미국이 반소ㆍ반공의 기독교주의 사상에 철저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와 종교의 중심지가 되는 점,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는 점, 북미대륙에 맨 처음 왔던 청교도(Puritans)들과 순례자(Pilgrim Fathers)들이 가졌던 신앙심이 어디서나 귀감이 된다고 보았고, 죠지 워싱턴, 아브라함 링컨, 우드로우 윌슨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지도자가 많은 점을 좋게 보았다. 이런 긍정적인 대미관은 그가 어려울 때 미국 전역을 다니며 도움 받고 은덕을 입은 일과 매코믹과 프린스톤에서 받은 신학교육 그리고 주한 선교사와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기독교신앙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세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던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은 수차에 걸친 오랜 미국생활 속에도 불변하였다. 미국에서의 삶도 그의 평생 지표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와 실현을 추구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어디에서나 그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했다.

그는 뚜렷한 직업이 없이 미국에서 체류하며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과의 폭넓고 지속적인 교제는 자신의 역경을 헤쳐 나가는 발판이 되기도 했지만 일제 때와 해방 후에 농촌활동을 하기 위한 후원금을 모금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실로 초지일관하여 어려울 때나 평안할 때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하나님사랑, 농촌사랑, 노동을 사랑한 목회자였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과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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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배민수, 농민학원, 삼애, 프린스턴, 숭실. 뉴욕, 미군정, 한국전쟁. 농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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