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주문모 신부 최초의 내한 가톨릭 성직자 들어가는 말 한국 최초의 가톨릭교회 성직자, 주문모(周文謨, Jacques Vellozo, 1752-1801)신부는 성직자로서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는 청국인으로서 1795년부터 1800년까지 6년 4개월 동안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순교했다. 1784년 창설된 한국 가톨릭교회는 10여년의 신부 영입활동으로 주문모 신부를 영입했다. 조선교회는 그를 정점으로 세계와 연계되는 가톨릭교회의 일원적인 조직을 갖게 되었다. 창설 이듬해부터 천주교 금령을 당해 지하교회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신부를 정점으로 한 이 지하조직은 박해를 견디는 힘이 되었다.
조선 가툴릭교회의 역사와 주문모의 활동은 일제 후기에야 일본인 학자와 한국교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야마구치의 연구가 관심의 길을 열었다. 1939년 개신교의 김인서는 『신앙생활』이란 잡지(2월호)에 “첫 목자 주문모와 여사 강완숙의 순교”라는 제목으로 주문모의 순교를 소개하였다. 일본인 아카키(赤木仁兵衛)는 1941년에 “신부 주문모의 입선(入鮮)”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천주교의 『경향잡지』는 1942년 5월호부터 1943년 1월호까지 주문모의 약전과 문초 기록을 연재하였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대체로 1980년대에 들어 가톨릭 교회 창립 200주년 전후하여 그는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경위와 한국 내에서의 사목활동,그리고 그의 행적과 순교의 의의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주문모의 입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소개된 『천주실의』를 접한 이후 17-8C의에 조선 유생들은 ‘서학’(西學)을 접하고, 이를 높은 호기심 속에서 연구하였다. 중국에 갖다온 연경사절단이 들여온 책들 곧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180여 종의 서학 책들이 그 대상이었다. 실학에 눈을 뜬 일군의지식인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토론하다가 신앙화 될 때까지 서학은 150여년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 세월 후에 유학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는 서양과 관련된 일체를 철저히 배격하자고 주장하는 공서파의 배타적 태도였다. 둘째는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되 도덕과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충적 입장이었다. 셋째는 서구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종교까지 받아들여 일대변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적극적 수용파들이었다. 세 번째에 속하는 자들은 숙종 이래 정권을 잡아 보지 못한 남인계열이었다. 성호 이익을 중심한 성호학파 가운데 청년층 중심의 좌파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홍유한처럼 스스로 종교로 받아들이고홀로 믿은 이들도 있었다.
그 보다는 서학 서적을 함께 모여 연구 토론하고 신앙을 고백한 자들도 있었다. 바로 이들에 의해 이벽의 집에서 1784년 9월 20일 조선 가톨릭교회가 창립되었다. 이승훈이 북경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고 온 후여서 대세를 줄 수 있었다. 선교사의 전파에 의하지 않고 조선인의 독서와 연구에 의해 자주적으로 발생한 신앙을 따라 세워진 독특한 교회였다. 꾸브리엥 신부(Mgr. de Guebrient)는 1925년 5월 9일 교황 비오 XI세에게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은 근대 선교 역사에서도 독특한 예이라고 보고하였던 바 있다.
예수회 측에서는 임진 왜란때 경남 웅천 지역에 고니시 주둔한 일본군의 종군 신부로 내한한 세스페데스가 한국 가톨릭교회를 창립했다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교회 설립의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교회 창설 후 서학은 정약용 삼형제와 권철신 등 양반들을 중심으로 서울 경기 지방에 전파되었고, 또한 충청, 전라 지역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이에 따라 성례를 집행하며 교회를 이끌 직분자를 필요로 한 그들은 교회의 전통에 대한 무지에서 몇몇 주도적 인물들을 신부로 추대하였다. 이 가성직은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교황청 입장에ㅔ서는 독성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전주의 유항검이 이 일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북경주교에게 확인하고 난 후 가성직단은 조직된 지 일년 만인 1787년에 해체되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에 고무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 제도와 집행을 무지와 선행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구원을 얻기 위해 참회하고 또한 성사에 참여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책으로 수용한 교회의 한계였다. 이 일로 조선신도들은 교리와 직제 문제를 새로이 인식하고 수차례 신부영입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1795년에 이르러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도적전승의 교회로 태어나기 위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진취적이고도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구베아 주교는 1790년 북경으로 그를 찾아온 조선의 윤유일에게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약속하고, 마카오 출생 중국인 오(吳, Johan dos Remedios)신부를 지명하였다. 그는 1791년 2월 국경에 도착했으나 조선교인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주문모는 오신부의 별세로 두 번째로 임명된 조선 파견 신부였다. 주문모 신부의 영입 이면에는 구베아 주교의 선교열과 조선교회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그가 교황으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위촉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 자체는 조선교인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처럼 선교단체의 임의적인 파송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주문모는 중국 소주부(蘇州府) 곤산현(崑山縣)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신도였던 7,8세에 연이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에게서 양육을 받았다. 그의 문자교육도 고모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20세에 결혼하여 3년 만에 상처한 후로는 재혼하지 않고, 거자업(擧子業)에 종사했다. 그는 신설된 북경교구 신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었고, 1791-1794년 사이에 구베아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았다. 그는 과거시험을 치를 정도로 상당한 학식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이런 점은 후에 조선에 와서 양반층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42세 되던 1794년 2월 북경을 떠나 후 20여 일의 도보여행 끝에 조선과의 국경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조선 교인들을 만났으나 조선 국경을 통과할 수가 없어 결빙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만주에서 교회들을 순회하다 12월이 되자 변문에서 1794년(甲寅) 동지사 일행을 따라온 조선교회의 밀사인 지황과 윤유일을 만나 그들의 인도로 12월 3일(음) 의주에 잠입하였으며, 마부로 가장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12월 14일(양 1월 14일)경 서울로 들어왔다.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한양에서 주문모 신부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머물렀다. 그의 집에는 천주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맨 처음 신부에 의해 미사가 집전된 것은 179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다. 첫 신부를 맞은 조선 교인들은 ”그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천신처럼 공경했다.” 주문모 신부의 도착은 신자들에게 글이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큰 위안을 주었다.
주 신부는 우선 언어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말 공부에 주력하면서 구도자들에게는 영세를 주었다. 이미 영세 받은 자들에게는 보례(補禮)의식을 거행하였다. 교리를 보급하기 위해 낮에는 책을 번역하여 저술하고 가르쳤다. 교인들의 교리와 성례전의 결함을 지적하여 고치게 하고 모든 계율을 충실히 지키게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포교에도 힘썼다. 활동을 암암리에 해야 했음으로 주로 야밤을 이용했다. 지역적으로는 전라도 전주에까지 갔고, 계층적으로는 위로 역모죄로 처형당한 왕실의 은언군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상계군 부인 신씨에게 전도하여 세례를 주었다.
또한 사목의 중심을 교회 조직과 제도의 확립에 두었다. 그래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폐제사 문제로 발생한 신해박해로 흩어진 교인들을 모우고 신부를 중심으로 하나로 묶는 조직을 하기 시작하였다. 신도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행하면서 명도회(明道會)라는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그 명칭의 뜻대로 명도회는 신도들에게 교리지식을 심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등 천주교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나아가 박해로 인한 순교자와 배교자의 속출로 신도들의 숫자가 격감하는 데 따른 신도들의 재조직화가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이 회는 각 지구별로 남녀를 구별하여 조직되었고, 회장이 책임을 분담시키고 효율화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문모는 각 명도회의 책임자를 모아 총회장을 임명했는데, 중인 출신 관천 최창현이 첫 번째 총회장이 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제도나 관습에 반(反)하여 천주교회의 평등사상을 실현한 것이었다. 최초의 여자 회장이 된 강완숙과 윤점혜는 여자들을 상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여성회장으로 활약하였던 것을 보면 이미 여신도들의 모임이 활발하였던 것 같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일체 허용되지 않던 당시에 여회장제도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확인하게 하는 조치였다. 이러한 계층을 초월한 비밀 조직은 조선 사회에서 이전의 지배종교였던 불교나 유교와는 조직 면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천주교회는 평신도 위주의 공동체 조직을 갖추어 자주 모이며 서로 돕고 격려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 조직에는 자선을 베푼다는 면에서 사회 복지적인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리공부와 소그룹 중심의 신앙 강화 도모는 보이는 교회당도 없는 지하 활동 가운데서도 계속되는 조정의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었다.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과 주문모 신부의 피신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관가에 알려졌다. 새 신자였던 진사 한영익이 주 신부를 만나보고 적대감을 갖고 있던 이석에게 밀고했던 것이다. 이석은 이벽의 동생이었다. 이석의 전언으로 조정은 주 신부 체포령을 내렸다. 1795년 6월 27일(양)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 일행이 최인길의 집을 급습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주 신부는 이미 피신하였다. 주문모를 보호하기 위해 신부라고 자처한 역관 최인길과 신부 영입에 관계된 지황과 윤유일이 잡혀가 취조 당했다. 그들 3인은 신부의 거처를 묻는 물음에 끝내 함구하다가 그날로 모두 장살되고, 시체는 한강에 버려졌다. 그들의 희생은 신부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사랑, 고귀한 순교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일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권유를 비롯한 공서파는 사건이 하루 만에 속결된 것을 문제 삼고 서학도들이 외세와 접촉하고 있는데 정조가 그들을 비호한다고 상소하였다. 주 신부는 그 후 관청의 추적을 피해 극도로 조심하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 것이 도리어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보여준 주신부의 조심성과 재능과 열성과 덕행은 일반사람의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고 인정되었다. 경계가 더욱 강화된 후 부터는 숙소를 양반 과부 강완숙과 그의 양아들 홍필주 모자의 집으로 주 신부를 숨기고 거기서 신도들의 모임을 가졌다. 강완숙의 집에 의탁하고 있던 윤점혜는 매월 모여서 예배한 것이 6,7차 또는 10여 차 되었고 첨례하는 날에는 각 곳에서 남녀교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신유박해와 주문모 신부의 순교 남인을 비호하던 영의정 채제공도 죽고 정조 마져 죽은 후 신유년(1801)에 소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자파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학 박멸령을 전국에 내림으로써 최초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났다. 정약종 등 주로 양반 신도 300여명이 순교 당했다.
그 가운데 주문모 신부가 있었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떠났다가 한양으로 돌아와 포도청에 자수하여 순교했다. 한국 최초의 신부는 초대교회 베드로가 로마를 탈출하다가 돌아와 순교하였듯이 1801년 5월31 일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새남터에 묻혔다. 그의 순교는 그 후에 내한하였던 최초의 빠리 외방전교회의 세 신부도 순교하였는데 그 귀감이 되었다.
조정의 명분은 사학박멸이었으나 실제적인 동기는 정치적인 데에 있었다. 신유박해는 시파와 벽파를 중심한 안동 김씨와 경주 김씨의 대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서학도들은 항상 외세의 앞잡이로 지목되었고, 폐제사는 교회설립 초기부터 큰 논란거리였다. 계층간의 평등사상은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녀가 한 곳에 모이는 것도 멸기난상의 사교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주자학만을 정학으로 알았기에 서학은 사학(邪學)으로 취급되었다. 순조 임금명의로 천주교를 금하는 척사윤음이 전국에 반포되었다. 한문과 한글을 병서한 포고문이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 후의 첫 한글을 사용한 공문이었다.
나오는 말 초기 교인들의 신앙생활에는 첨례가 중심이었다. 천주교 금지령 속에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첨례는 새 힘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교우들과의 유대와 결속강화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교우들은 첨례용 기도서와 개인 신심을 위한 책들과 성인전 등을 통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며 교리서를 읽음으로써 영적 훈련을 쌓고 박해의 시련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서학은 자주적으로 수용되었다. 국력을 기울인 금교령과 박멸정책 속에서도 근절되지 않았다. 일만여 명이 순교에 이른 피흘림의 연단을 통과하면서 서학은 신앙의 뿌리를 내렸다. 그 선봉에 최초의 신부 주문모의 순교가 있었다. 신부 대망 속에 처음 내한한 주문모 신부는 그 소임을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데 까지 다했다.
조선 후기 초기 가톨릭교회의 교우들은 영원에 대한 소망 등 기독교의 진수를 체득하여 개신교 성장의 터전을 닦았다. 조선 조정의 가톨릭 금교 정책은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망국과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하는 데 일조했다. 최초 성직자 주문모 신부의 순교정신과 서학은 중화중심의 세계관을 서구 중심의 세계관으로 확대시켰으며, 서양문화 개방화에 촉매 역할을 한점을 제대로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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