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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선선교사서간집 간행을 보고

출판사가 도용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5/25 [10:58]

한부선선교사서간집 간행을 보고

출판사가 도용

최재건 | 입력 : 2021/05/25 [10:58]

                                 『한부선 선교사 서간집간행을 보고

  선교사가 편지에 담은 해방 후 한국교회의 모습-국민일보

한부선 선교사 서간집1, 2, 3, 4가 2018년 723일자로 간행되었다.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가 1946~1948년에 걸쳐 자기 부인 캐터린(Katherine Blair Hunt)에게 쓴 편지를 편찬한 서간집이다. 한평생 그의 선교활동을 추적해 온 필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그 편지를 찾아 모우고 출판단계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출판사가 출판만 하지 않고 필자와 상의도 없이 멋대로 편집하고 번역하고 출판하는 상식을 벗어난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가 한부선 선교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려서 부터였다. 연세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신사참배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된 것도, 한 평생 선교사를 연구의 주관심사로 정하게 된 것도 한부선 선교사의 영향이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하라는 부친 최경환 장로의 말에 기꺼이 순종하고 지내던 터라 한부선교사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하게 듣고 알고 있었다.

 

한부선 선교사를 처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6.25 전쟁이 휴전하기 전 1952-34월쯤이었다. 그가 필자가 다니던 시골교회를 방문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미국사람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흥겨웠다. 그가 한국말을 너무 잘하였고 설교도 한국말로 유창하게 했다. 한국 음식도 잘 먹는 것에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그때 설교 통해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되었을 때 당한 고통담이었다. 감옥에서 물이 먹고 싶은데 물을 주지 않아 다음 날 부터는 아침에 비누로 세수한 물을 아껴 두었다가 갈증을 달랬다고 했다. 필자의 어린 마음에 왜 천국과도 같은 미국에서 살지 않고 그런 고생을 자초하고 전쟁하는 나라에 와서 고생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후로 그의 동향에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길거리에서 노방전도 하는 모습도 보았고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강의 하면서도 주일에는 지역 교회에 나가 설교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았다. 1960년 미국 정통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고신 측과 승동측이 합동총회를 구성하였을 때 그도 함께 참여하였으나 고려파가 합동측 총회에서 환원 할 때 그는 고려파와 함께 환원하지 않았지만 그 관계는 유지 하면서 고신측과 합동측 양쪽에 활동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교회사를 전공으로 삼은 것도 그의 영향이었다.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한국선교를 미국교회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까닭에 미국교회사도 한국교회의 연장선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헌신적인 삶과 그들이 남긴 자료를 찾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지금까지 지내왔다. 일반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상가나 제왕학 같은 분야로 가지 않고 계속 선교사와 선교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첫 20여년은 현지에서 공부하며 형편이 되는 대로 자료 수집에 힘썼고 후반 20여년은 학기 중에는 강의하고 방학 때는 형편에 따라 필라델피아의 미국 장로교 문헌 보관소, 드류대학교 구내의 감리교 문헌 보관소, 워싱턴디시의 미국 국립문헌보관소, 버지니아 노폭의 맥아더 기념도서관 및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신학도서관과 문헌 보관소를 돌며 한국교회사와 한국현대사 관계 자료들을 섭렵해 왔다. 토론토의 캐나다 연합교회 문헌 보관소, 캐나다 노바스코시아 주의 달하우지대학교 문헌 보관소는 가끔 들린 곳이었다. 그 외에도 스탠포드대학교의 후버 인스티튜트와 인디아나의 그리스도교 문헌 보관소 등등 헌신적이었던 선교사들, 특히 내한 선교사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사명과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여파와 능력과 자금 등의 사정으로 가시적인 출판의 결과를 내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필자보다 후에 시작한 이들도 저마다 자료집을 간행하고 논저를 출판하는 것을 보며 무능을 자책하고 많은 생각을 했다.

 

<편지 원본 >

한부선 서간집의 원본은 미군정기인 1946년에서부터 1948년에 이르는 동안 한부선 선교사가 그 부인에게 쓴 편지다. 다른 내한 선교사들의 출판된 서간집과는 달리 사신이고 보관 장소도 지금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보관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공장소가 아닌 한부선선교사의 사저에 있었다. 필자는 1987년 봄에 한부선이 거처하던 필라델피아 근교의 그의 거처에서 두 주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의 집에 머물며 그의 선교 활동담도 들었다. 때로는 필라델피아 제1장로교회 (당시 김만우목사 시무) 객실에 머물기도 하고 모텔에도 자기도 했다. 그의 부친 한위렴 선교사와 장인 방위량 선교사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선교관계 자료들과 본인의 선교활동상을 볼 수 있는 자료가 대부분이었다. 필자는 당시에 워싱턴의 국립문헌 보관소를 비롯하여 세계 최대의 선교자료를 소장 하고 있는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 캐나다 연합교회,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문헌 보관소를 몇 번씩 갔던 터라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많은 양의 푸른색의 항공우편(Air Mail) 물이었다. 손으로 쓴 일련의 편지였다. 한 두장 읽어보니 부인에게 쓴 편지였지만 당시의 한국 사정들을 쓴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좋은 자료라고 판단되어 같은 기간의 편지들이 혹시 다른 곳에도 더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상자들을 다 살폈다. 새로 눈에 뛰는 것들은 한 상자에 담았다. 모두 세어보니 약 1,500장 가량 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부인에게 쓴 편지이지만 당시의 한국사회와 교계 상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해방 후의 한국교회와 한국의 불안했던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쓴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판단하기에 좋은 자료라고 여겼다. 해방 후 미군정 기간 동안에는 좌익의 테러와 정치적 불안과 여러 여건으로 치안이 불안하여 선교사들의 입국을 제한했으나 주일 맥아더 사령부의 선교사에 대한 특별 배려로 남자들만 제한적으로 내한 할 수 있었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한 그는 다른 선교사 보다 빨리 내한 하였고 근 3년 동안 혼자 한국에 머물면서 그의 부인 에게 매일 쓴 것이었다.

 

한국교회나 사회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자료라고 판단하고 요즘처럼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서 복사하기로 마음먹고 양해를 구했다. 한목사님께 편지들을 빌려주시면 복사하고 정리해서 돌려 드리겠다고 했더니 쾌히 승낙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소장 할 수 있도록 1부 더 복사를 요청했다. 그의 양해를 받아 코넷티컷, 뉴헤이븐의 집에 와서 복사하는 곳에서 그 항공 엽서 한 장 한 장 모두 복사하였다. , 월 및 날짜의 순서도 대충 맞추었다. 1주일 뒤에 필라의 근교에 다시 한부선선교사 댁에 들려 원본과 사본 1부는 그에게 전달하고 1부는 편자가 가졌다. 그 후 복사 한 것을 다시 복사하여 한국의 국회 도서관, 필라 제1교회 집회 인도차 오셨던 오병세 박사를 통해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에도 보냈고 몇 몇 개인들에게도 전했다.

 

귀국 후 몇몇 지인들에게 번역과 출판에 관해 문의 했으나 선교사 편지는 자료집이어서 다들 별로 관심들이 없었다. 더구나 근 4반세기만에 귀국한 터이라 지인들도 별로 없었다. 학교는 후배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교단 관계는 필자가 다닌 학교가 신학적으로 진보경향이어서 고신(高神)측 교회와 인사들에게 누가 될 것 같아 일체 찾아가지도 않았다. 필자가 다녔던 학교들의 동창회 등에도 일체 참석 않고 사회생활을 접었다. 강의하고 연구실에서 자고 주일에 명성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선교사의 활동자료 번역하고 출판하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다고 느껴졌을 때 별생각들이 다 들었다. 지도교수들도 왜 하필 그런 분야를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대체로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에는 상당하게 관심이 많아 호응도 하지만 과거에 내한했던 선교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을 안후에는 별 서두르지도 않았다. 한번은 작고하신 홍치모 교수께 문의를 드렸더니 어느 날 출판에 관심을 가진 분을 소개하겠다고 해서 나 갔더니 정주채 목사였다. 그는 필자와 같은 고향 경남하동의 고전교회 출신이어서 잘 알던 사이었다. 출판에 적극 동의하여 일을 착수하기로 했다.

 

<영문타이핑 본>

우선 손으로 쓴 편지를 영문으로 타이핑하는 것이었다. 정 목사님은 비용의 전액 600만원 담당 하였다. 타이핑을 한 분은 미국인이었고 홍치모 교수께서 알선 하였다. 그 분의 인적사항을 몰라 유감이다. 다음은 이 영문 타이핑 본의 교정이었다. 홍치모 교수께서는 필라 영생교회 (당시 이영걸 목사 시무)의 지창욱, 윤두한 두 장로가 각기 $1,000을 희사하신 것으로 한부선 선교사의 따님에게 영문 타이핑 한 것의 교정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본서의 출판에 기초 작업이 이루어졌다.

 

<번역>

영문 타이핑본을 토대로 번역에 들어갔다. 초역자가 중도에 그만 둔 경우가 몇 번 생겼다. 뒤에 안 일이지만 초역을 맡은 분들이 번역비가 작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출판이 보다 오랜 세월을 끌게 된 한 원인이었다. 초역은 한 부분만(4)을 최영근 박사가 그 외는 모두 문백란 박사가 담당하였다. 정주채 목사님이 다시 400만원을 박은조 목사님도 그 일부(300만원)을 부담 하셨다. 필자도 비용을 200만원을 지불하였다. 번역본을 보고 부족한 점들은 있지만 출판과정에서 교정을 통해 보완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출판 과정>

출판은 정주채 목사도 은퇴 한 뒤여서 진척 되지 않았다. 처음 출판의 수락은 당시 고신대학교의 이상규 교수였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 출판이 되지 않아 문의했더니 번역이 너무 존대체라고 했다. 수정을 해야 되겠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한 두 학기가 지나 번역을 새로 검토키로 하고 다시 초역 자들에게 재검토를 의뢰했다. 번역의 재교는 비교적 빨리 진척 되었다. 필자의 번역에 관한 견해는 몇 권의 번역서를 내면서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처럼 누가 번역해도 정도의 차이지 완역은 없다는 점이었다. 필자의 경우 번역서는 주로 최소한 3번의 교정을 거치면서 마무리하였다. 이 번역도 교정시에 보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번역을 문제 삼으면 일축했다. 다른 사람의 번역에 좀처럼 만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번역의 교정 중에 다시 정주채 목사의 주선으로 한국 고등신학 연구원에서 출판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 전자 메일을 통해 원장도 출판에 관여하겠다고 했다. 필자는 단연코 반대했다. 출판사는 출판만 하면 되는 것이지 처음 듣는 얘기여서 상식 밖이라고 적극 반대했다. 그런 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측도 그 뒤에 관례에 따르기로 약속하여 출판키로 했다. 그러나 이듬해 사순절에 출판되리라는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한해가 더 지나 한차례의 전자 메일을 통해 이상규 교수, 박응규 교수의 글을 실리겠다고 하여 다소 의아해 했고 왜 편집에 손대려는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분들의 새글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과 처음 약속을 지키는 내용이어서 그대로 수용했다. 그 후에도 번역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교정 요청도 없었다. 다만 필사본 카피를 빌려달라고 했다. USB에 담겼다는 것이었다. 한해 뒤에 카피본을 돌려받을 때 USB 에 담은 것도 달라 했더니 다음으로 미루고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책 선전 팸플릿을 만든다고 글 쓰라고 해서 응했다. 금년 들어 서문과 필자 약력을 달라 해서 써 보냈다. 4월에야 4권의 책 모습과 표지도 선명하게 일반 상식과 또 약속에 따라 필자 명으로 인쇄 되어 있었다. 드디어 출판하게 되었다고 감사했다.

 

 

그 후 사무실을 마포구로 옮겼다고 해서 한차례 찾아갔다. 필라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도 갔다 왔다고 했다. 거기에 가야 할 특별히 중요한 것이 없는 데 왜 갔는지가 의아스러웠다. 모금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뒤 필자 약력을 2줄로 다시 달라고 해서 더 줄여 보냈다. 75일에 카카오 톡으로 인쇄에 들어간다는 글과 표지 사진도 다시 보내왔다. 다만 반가워 제대로 보지도 않고 조금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표지에 편자의 이름이 복수로 보였지만 초역했던 번역자들의 이름일 것이라 추정하고 수고한다고 답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고 내 불찰이었다. 직접 만나 얘기 한 것도 아니었고 전화도 아니었다. 전자 우편도 아니었고 잘 보이지도 않았고 가끔 보는 카카오 톡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변덕을 부려 상식과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표지판을 고쳐 새로 인쇄할 줄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 88일에 출판된 책을 보내겠다는 카카오 톡이 있어 주소를 보냈다. 서울의 거소지로 8월말 귀국해서 보니 책이 3질 와 있었다.

 

<번역 출판본>

책 표지를 보고 놀랐다. 마지막에 표지도 다시 바꾼 것이었다. 서간자료집의 통례에는 없는 출판사의 김재현이란 이름과 그가 선정한 낮선 번역자 이름도 있었다. 번역을 새로 해야 될 것 같았으면 최소한 필자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자기 멋대로 번역인을 고용했다. 책을 펴 보니 필자가 쓴 서문은 보이지 않았다. 출판사 대표인 김재현이 서문을 썼다. 필자가 쓴 서문은 박응규 교수의 글 뒤에 실려 있었다. 번역본은 선교본부가 영어로 무엇인지도 모르고 ‘headquarter’라고 번역한 것이 눈에 들어와 더 보지도 않았다. 선교본부를 문제는 출판사가 자의로 필자와 상의도 없이 번역을 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 번역하려면 상의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번역했다. 번역에 문제가 있어 출판을 못할 정도였으면 필자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지 무슨 권한으로, , 출판사가 자의로 번역을 했는지?

 

국민일보에 출판에 관한 기사도 보았다. 솔직한 심정은 강도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할 말이 많다는 전자 우편만을 보냈다. 추석 때가 되도록 아무 답도 전화도 없었다.

 

 

울산=·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97698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97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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