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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나라의 독립과 결혼한 삶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7/11 [03:01]

김마리아

나라의 독립과 결혼한 삶

최재건 | 입력 : 2021/07/11 [03:01]

나라의 독립과 결혼한 삶,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 3·1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열사 < 인터뷰/인물탐구 < 오피니언/피플 < 기사본문 - 일요서울i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일제 치하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교육자이자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1892년 음력 618일 광산(光山) 김씨인 아버지 윤방(允邦) 김언순(金彦淳, 1861-1892)과 무장(茂長) 김씨인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1852-1904) 사이에서 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 솔내)가 본적지다.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다. 그는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김마리아의 본명은 진상(眞常)이었다. 근포(槿圃)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김마리아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애국지사의 가문이었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규식의 부인이며 김순애가 나이 많은 5촌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1회 졸업생인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 김마리아의 큰언니 김함라(金涵羅, 1887-?)는 신학박사학위도 취득했고 6.25 동란 때 납북당한 목사인 남궁혁 (南宮赫, 1882-1950)의 부인이었다. 둘째 언니 김미렴(金美艶, 1889-?)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 방합신(方合信)의 부인으로 평생을 여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인 김필례(金弼禮, 1891-1983)는 김마리아의 막내 고모였다.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사내아이를 기대하였던 아버지의 뜻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이 여장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필례의 자서전에서 김마리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어려서부터 꼭 사내 같은 포부를 가졌던 마리아는 입버릇처럼 장군이 되겠노라고 하였어요. 그것도 을지문덕은 어디가 좋고 김유신은 어디가 훌륭하고 이순신은 어디가 본받을 만하다고 예를 들면서 말하지요. 여자애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포부를 가지고 자랐던 마리아는 어찌나 솔직하고 담대한지 같은 여자인 우리도 무안할 때가 많았어요.”

 

지역사회의 유서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기독교와도 일 찍 접했다. 고향인 솔내(송천리)1884년에 이미 서상륜(徐相崙, 1848-1926), 서경조(徐景祚, 1852-1938) 형제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최초의 교회당도 건립된 곳이었다. 1885년에 이곳에서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세례식이 치러지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또한 1896년에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 선교사와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송천리를 방문하였고, 이후 많은 내한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김마리아는 어려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더욱이 1897년 김마리아의 고모인 김구례(金具禮)와 서경조의 차남인 서병호(徐丙浩, 1885-1972)결혼하게 되자 더욱 기독교와 가까워졌다. 독립운동에도 열열히 참여하게되었다. 서경조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로 장립한 7인 중 한 명이었다. 서병호는 1885년 언더우드에 의해 한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가문의 대를 이은 신앙인이 되었고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인물이었다. 특히 서병호는 1947년에 상해에서 귀국, 새문안교회의 장로로서 경신학교(儆新學校) 이사,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등을 거쳐, 1950년 경신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에 1968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80년에는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김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가정에 변고가 많았다. 1892년 김마리아가 태어나기 직전에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 성첨(聖瞻) 김응기(金應淇)가 작고하였고, 아버지 김윤방이 1894년 세상을 떠났다. 다만 숙부인 김필순(金弼淳, 1880-1919)의 노력으로 온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필순은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의 매제로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9-1956) 선교사의 지도하에 공부하였으며, 1901년 제중원(濟衆院)에 입학했다. 1908년 제중원의 전통을 이어받은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의사면허 1호로 자격증을 받았고 함께 졸업한 7인 중의 한 사람인데 졸업 후에는 만주(滿洲)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임종 이후 사실상 김마리아의 부친 역할을 한 큰 숙부 윤오(允五) 김용순(金容淳, 1865-?)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협력하여 소래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도 지속적으로 후원하여 김구(金九, 1876-1949), 안창호(安昌浩, 1878- 1938) 선생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김용순은 1903년 김마리아 등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이전하여 세브란스 병원 건너편에 김필순과 함께 김형제상회를 운영하였다. 이 당시 에비슨 원장은 김마리아를 각별히 총애하였다고 한다. 김마리아는 김필순 가족이 살림을 하던 세브란스 병원을 드나들며 언더우드와 에비슨 등으로부터 강력한 기독교 신앙을 체득했다. 아울러 김윤오, 김필순 두 숙부, 서병호와 그의 부인인 고모 김구례, 김규식과 그의 부인인 고모 김순애(金淳愛, 1889-1976), 막내 고모인 김필례로부터 헌신적인 독립정신도 배웠다.

 

김마리아는 7살이던 1899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 학교에 입학하였다. 주로 남장을 하고 다녀 화제가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입학 후 6개월 후에 전교 일등이 되어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로 부터 상을 받기도했다. 1903년에는 소래학교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곧 힘든 일이 다가왔다. 김마리아 등 3자매가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1905년 음력 12월에 별세하였다. 김마리아의 가족은 서울의 큰 숙부 김용순의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4세가 되던 1906년 김마리아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홀로 지내는 기숙사 생활의 고독 때문에 곧 막내 고모 김필례와 두 언니들이 다니던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로 전학하였다. 특별히 1908년 김마리아는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서 밀러(F. S. Miller, 閔老雅, 1866-1937)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인 1909년에 김마리아가 다니던 연동여학교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를 다니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업과 더불어 신앙심과 애국심이 더욱 자라났다.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써 주목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18세가 되던 1910616,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4)하였다.

 

 

졸업 후 곧 광주(光州) 수피아여학교(Speer Girls' School) 교사로 부임하여 언니 김함라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해 829일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조선왕조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망국이 되었다. 김마리아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더 나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생각을 현실화하여 191220세의 나이로 일본 히로시마고등여학교(廣島高等女學校)에 유학할 수 있었고, 이듬해인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 시절 김마리아의 열정에 찬 교육과 뜨거운 애국심에 대해 여성 애국운동가인 유각경(兪珏卿, 1892-1966)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분은 참으로 열심이었어요. 공부에도 생활에도 그처럼 열심일 수가 없었어요.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기도실에 들어가 조국의 장래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나와 같이 있으면 항상 하는 얘기가 조국의 독립이었어요. 마리아의 비분강개를 듣노라면 나도 가슴속으로 뿜어 오르는 분노와 울분에 덩달아 울었지요.

 

당시 정신여학교의 교장인 루이스(Margo Lee Lewis, 1885-?) 선교사는 김마리아를 깊이 신뢰하였다. 루이스 교장은 19155월 기독교계 학교인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본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김마리아는 열심히 공부하여 19163월에는 본과를 졸업하고 고등과(대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또한 이즈음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장을 대행하다가 1917년에는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김마리아는 27세가 되던 19193.1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이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마리아도 최팔용(崔八鏞, 1891-1922) 등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에 황에스더(黃愛施德, 1892-1971) 등 여자친목회 회원들과 가입하였다. 주로 기독교인들이던 이들은 유학생회 총회를 빌미로 뜻을 모아 28, 동경의 조선인 YMCA에서 독립선언대회를 열었다. 3.1 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된 약 “2.8 독립선언사건이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김마리아는 일본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은 뒤, 217일 부산으로 입국하였다. 곧 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황해도 지역의 만세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36일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죄로 투옥되었다. 김마리아는 84일 방면이 되었지만, 극심한 고문을 받은 탓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후유증으로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였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는 같은 해 1019일 이혜경(李惠卿), 황에스더, 장선희(張善禧) 등과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국내에 15개 이상의 지부를 설치하였고 하와이(Hawaii)와 북간도(北間島)에도 지부를 두어 회원 규합과 군자금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1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앞으로 군자금 2천원과 애국부인회의 활동 취지문을 보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추적과 동지였던 오현주(吳玄州, 1894-?)의 밀고로 1128일 조직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성기(性器)를 불로 학대당하는 끔찍한 고문을 비롯하여 온갖 혹독한 악형을 당한 김마리아는 그러나 끝까지 담대하게 항거하였다. 이때 자원해서 김마리아의 심문을 맡은 가와무라(河村靜水) 검사는 19206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1호 공판에서 일본의 국적(國賊)’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고문에 의한 병으로 김마리아는 71일 다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고 다시 투옥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법정 투쟁을 하였다. 당시 김마리아에게 가해진 고문에 대해 김마리아의 전기를 쓴 김영삼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마리아를 끌어다 취조실에 앉힌 놈들은 마리아의 두 무릎 사이에 굵은 장작개비를 넣었다. 그리고 수갑을 채운 두 팔 사이에는 쪼개진 대나무를 끼운 뒤 빨래 짜듯이 비틀어 댔다. 그러나 마리아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삼키며 혹독한 고통을 참았다. 그러자 놈들은 다시 악형을 가중시켰다. 그것은 코에 고무호스를 끼우고 물을 넣는 수법이었다. (중략) 침묵으로 일관하는 마리아에게 그들은 무자비한 구둣발로 굵은 나무토막을 끼고 앉은 마리아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마리아의 얼굴과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중략) 고통에 못 이겨 실신해 늘어진 마리아를 가운데 놓고 놈들은 야만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죽은 듯 쓰려져 있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어다가 그때부터는 독방에 집어넣었다.

 

29세가 되던 1921629일 병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마리아는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1878-1941) 선교사의 제자인 윤응념(尹應念)의 도움으로 중국(中國)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해 728일 위해위(威海衛)에 온 김마리아는 임시정부의 영접 대표인 큰 고모부 서병호를 만났고 마침내 810일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이 널리 알려진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어느 정도 치료한 1125일 상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주최로 열린 환영회에 참석했고, 이듬해인 192221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마리아는 애국운동 속에서도 면학의 꿈은 계속 있었다. 실력양성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생각으로 남경(南京)의 기독교계 학교인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할 수 있었다. 특별히 1923년 상반기에는 김마리아를 아끼던 안창호 선생이 결혼하도록 주선했으나, 거절하였다. 그 후 이광수(李光洙, 1892 -1950), 홍언(洪焉, 1880-1951), 사회주의자인 김철수(金綴洙, 1893-1986) 등 많은 이들이 구애했으나 김마리아는 모두 사양하였다. 김마리아에 대한 전기를 쓴 박용옥(朴容玉) 박사는 그 제목을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로 하였다.

 

김마리아는 고등교육 받을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23621일 상해를 떠나 도미하게 되었다. 712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독립운동가들과 많은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독립운동이란 맡은 일을 열심히 하여 꾸준히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역설하였다. 이후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에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고생도 하였다.

 

 

김마리아의 해외 유학과 활동의 배경에는 선교사의 도움이 컸다. 1911년의 이른바 ‘105인 사건’(관서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인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1852-1919]를 암살하려 한다고 조작하여 600여 명을 체포, 123명을 기소,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건)에 의해 미국으로 일시 추방되어 있던 윤산온 선교사의 추천으로 김마리아는 192497일 미국 미주리(Missouri) () 파크빌(Parkville)에 위치한 파크대학(Park College)3학년으로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사가 이미 19189월 윤산온 교장의 추천으로 윤산온 교장의 모교인 파크 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한 경우와 거의 같은 경우였다. 체미 기간중에 또한 김마리아의 담당 검사로 고문을 주도한 가와무라를 1926년 뉴욕(New York)에서 만나 사과를 받은 것도 화제가 되었다.

 

김마리아는 35세인 1927년 파크대학을 졸업하면서 문학사 학위와 평생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쉬카고를 거처 뉴욕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811일 뉴욕에서 항일 여성단체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그해 9월 콜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에 입학하여 1929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해에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고 한국학생연맹 부회장에 선임되어 봉사하는 한편 뉴욕신학교(New York Biblical Seminary) 종교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교육자로 활동하기 위한 준비라 여겨진다.

 

 

40세가 되던 1932년 김마리아는 귀국길에 올랐다. 718일 일본 고베(神戶)에서 9시간의 조사를 받고 7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캐나다(Canada) 연합교회 여선교회의 후원으로 원산(元山)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일제의 간여로 바로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일련의 조사 과정을 거쳐 1933년 봄부터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귀국을 가장 먼저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東亞日報)였다. 1932725일자 신문에 전 애국부인단장 김마리아양 귀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중략)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김마리아 양이 지난 20일 밤 단신으로 가방 한 개를 들고 아무도 모르게 경성역에 나타났다. (중략) 결석 판결을 받은 지 만 11년이 작년 5월이므로 시효가 이미 지났다 한다. 그러나 인물이 인물인 만치 부산에 상륙하자 수상서원에게 약 8시간 동안이나 심문을 받고 경관이 경성까지 동행하였는데 동 양은 경성에서 고() 의사의 집에서 1박한 후 바로 원산 마르타윌슨 여자성경학교로 가 버렸다. (중략) 2주일가량 원산에 체재하다가 또다시 상경하여 지우들을 만나보게 되리라 한다.

 

김마리아의 귀국은 유명한 독립투사의 귀국으로 애국시민들의 화제가 되었다. 특히 여성계로 확산되었다. 1934년 장로교여전도회 총회에서 제7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10대까지 4대에 걸쳐 회장직을 연임하며 봉사하였다.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에서 열성을 다해 가르치는 일에 임한 김마리아는 1935년 자신이 3년간 생활비를 대면서 가르친 배학복(裵學福)을 양녀로 삼았다. 이어서 1937629방금 갓난 아이로 선생의 집 앞에 버려진 채 발견된 아기를 양자로 입양하였고 태국(泰國)’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호적에 올리기도 하였다. 배학복과 태국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소중히 양육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였다. 후일 배학복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아를 위한 사역 등 주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었고 태국은 해방 이후 남북분단으로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일제 말엽의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의 일환인 신사참배(神社參拜)강요에도 맞섰다. 1938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마저도 신사에 참배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자신이 이끌던 여전도회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집회에서 김마리아는 일제에 대한 국민의례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했다. 신사참배 거부에 불굴의 의지로 일관한 대가로 조선총독부는 마르다윌슨 여자신학원 마저 폐교 조치를 하였다.

 

일생을 하나님 나라의 일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마리아는 51세가 되던 1943127일 원산의 자택에서 졸도하여 중태에 빠지게 되었다. 19443월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313일 소천하였다. 해방을 불과 1년 반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대동강(大同江)에 뿌려졌다. 김마리아는 망국의 아픔 속에서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 크리스챤 신여성의 귀감이 되었다.

 

28 독립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었다.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3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어록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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