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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이야기 8

최초의 악보 찬송가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1 [17:28]

언더우드이야기 8

최초의 악보 찬송가

최재건 | 입력 : 2020/12/11 [17:28]
[한국 기독교 초석 놓은 언더우드] (8) 언더우드와 찬송가 기사의 사진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4년 한국 최초로 4성부 ‘찬양가’를 출판했다.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찬송가를 편찬하는 방면에서도 개척자였다. 그는 1888년 고종황제 탄신일에 새문안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애국정신을 고양하는 뜻을 지닌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높으신 상주님, 자비로운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하소서.”

그는 한국어 찬송가를 조속히 간행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그가 편찬한 ‘찬양가’의 서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것을 찬송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1889년 여름, 한영사전의 원고를 탈고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찬송가 편찬에 착수했다. 그는 미국에서 장로교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한국어 노랫말을 서양 곡조에 맞추는 번역 작업은 까다로웠다. 이는 글자에 정한 수가 있고 자음에도 고하청탁(高下淸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92년에 출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888년까지 13곡을 골라 번역했다.

원래 계획은 성경번역 작업과 마찬가지로 감리교회와 함께 연합찬송가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찬송가가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내용 조정이 필요해지면서 지연됐다. 그러는 동안 1892년 감리교 선교사들은 ‘찬미가’를 출판했다. 로드와일러와 존스 선교사의 편찬으로 27곡이 수록된 무악보 찬송가(가사만 있는 찬송가)였다.

한국 최초의 4성부 음악책

언더우드는 독자적으로 출판을 계획하고 계속 추가하여 번역하고 개정해 갔다. 마침내 1894년 요코하마에서 ‘찬양가’란 이름으로 인쇄돼 출판했다. 이 책은 예수성교회에서 간행하였고 삼문출판사에서 보급했다. 출판 과정에서 소요된 적지 않은 비용은 언더우드의 형이 헌금해 충당했다.

찬양가는 4성부 악보로 작성된 찬송가로, 88곡에 악보가 붙어 있었다. 한국 최초로 서양음악 악보가 제시된 음악책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문맹이던 시절에 곡조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서야 나왔다. 1894년 간행된 찬양가는 근대 한국음악사에서 가장 귀중한 유물이 되었다. 지금 이 책은 ‘문화재청 고시 제2011호, 등록문화재 #478호’로 등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찬양가에 대해 “우리나라 최초의 오선 악보집이면서 최초의 악보 있는 개신교 찬송가집으로 한국 근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고 소개했다.

찬양가는 117장으로 편집되었다. 가사의 번역은 다른 사람의 것도 있었다. 그 찬송가들 가운데 7곡(또는 9곡)은 한국인이 작사한 것이었다. 93장의 “어렵고 어려우나 우리 쥬가 구하네”는 백홍준 장로가 작사한 것이었다. 그 외 6곡은 작사자 미상이다. 한국인이 작사한 이 곡들은 제4장의 ‘이 세상을 내신 이는’, 29장의 ‘우리 주의 피를 보면’, 38장의 ‘우리 예수 큰 공로가’, 61장의 ‘예수의 높은 이름이’, 113장의 ‘깃브다 구쥬 왕되니’, 115장의 ‘나는 밋네, 나는 밋네 여호와’였다. 찬양가는 판을 거듭할수록 분량이 늘어났다. 1895년 판에는 159곡, 1896년 3판 때는 160곡이 되었다. 1898년 4판 발행 때는 164곡이 수록되었고 1900년에는 182곡이 수록되었다.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번역 출판, 사용 과정에서 많은 난관을 겪었다. 이 책에서 그가 신(神)의 호칭으로 ‘여호와’와 ‘아버지’만 사용하였다는 점과 선교사들의 연합찬송가 출판 결정에 위배되었다는 것 등이 반대 이유였다. 이 때문에 전체 장로교회들이나 전국 교회들에서 사용되지 못했다. 주로 서울 지역과 남장로교 선교 지역에서만 사용됐다. 이북 지역 장로교회에서는 ‘찬셩시’가 주로 사용됐다. 찬양가는 1908년 감리교와의 합동 찬송가가 출판될 때까지 사용됐다.

초기 찬송가는 100부 합창

초기 교인들은 찬송가를 어떻게 불렀을까. 처음에 교인들은 중국어 찬송가를 우리말로 ‘주예수애아(主耶蘇愛我)’라고 음역해 가사 뜻도 모른 채 불렀다. 세월이 흘러서는 찬송가 가사를 한지에 써서 걸고 선교사가 먼저 부르면 회중이 따라 불렀다. 어떤 곡들은 미국인들의 이별가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추어 불렀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우리나라의 뱃노래 가락에 맞추어 작사하기도 했다. 전통 민요인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서양 음률을 따라 부르는 일이 쉽지 않아 교인들은 제각각 곡을 넣어 불렀다. 따라서 100명이 모이면 100부 합창이 행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는 ‘예수사랑 하심을(Yes, Jesus loves me)’ 찬송을 영어로 불렀다.

찬송가는 한민족이 지닌 음악 혼을 깨웠다. 서양 음률로 보급된 찬송가는 한국 음악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 배후에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기도와 사랑의 씨 뿌림이 있었다. 교회는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음악은 교회를 통해 전승,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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