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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목사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만주의 사도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05 [07:34]

한경희 목사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만주의 사도

최재건 | 입력 : 2021/01/05 [07:34]

한경희 목사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만주의 사도

 

이학인·김만수 목사의 '만주의 사도바울 한경희 목사' < 문화 < 뉴스 < 기사본문 - 한국성결신문한경희 (韓敬禧, 1981-1035) 목사는 일제 때 만주에서 목회 하다가 공산당에 의해 피살된 순교자였다. 그는 1881115(음력, 양력은 1225)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옜주소:평안도 의주군 양광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승주(韓承周)와 어머니 달성(達成) ()씨 사이의 32녀 중 막내로 어려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貪官汚吏)들에 의해 수탈을 당해 가세가 점점 기울어 졌고, 4세 되던 1885년 가족들은 양서면(楊西面)으로 이사를 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6세 때 서당에 다니게 되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그 것 마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의주에서 장사를 시작한 형들 덕분에 형편이 풀리기도 했지만,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으로 의주 전체가 폐허가 되면서 다시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안도 북부 일대를 전전하며 가족과 함께 극도로 힘들게 지낸 한경희는 19세가 되던 1900년 신효정(申孝正)의 장녀 경원(敬元)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심정으로 술 취함과 생활의 방탕함은 극에 달했다. 특히 후일 목사가 된 이봉태(李鳳泰)를 비롯하여 기독교를 전도하는 이들을 마구 구타하기도 하였고 신자들을 박해까지 하여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던 중 한경희는 1903년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전도인으로 후에 목사가 된 송문정(宋文正)의 전도를 받았다. 그가 준 구세론(救世論)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 했다. 같은 해 10월 첫 주일부터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변했다. 그동안의 방탕한 생활이 죄란 것을 깨달았다. 지은 죄들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가족과 이웃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가문으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성경읽기와 기도로 시련을 감내했다. 마침내 그렇게 핍박하던 맏형 한찬희(韓燦禧)도 나중에 회개하고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한경희는 23세가 되던 1904622일 동문외교회에서 부부가 학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리집사로 임명받았다. 다음해인 19051116일 이 교회에서 선교사 계인수(Carl E. Kearns, 桂仁秀) 목사로부터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고 동시에 집사로 피택 되었다. 이후 그와 함께 많은 전도여행을 하였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간증을 하여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1905)이 일어났다.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에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경희의 전도는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목사는 드물어 지역교회를 순회해야 하기에 교인 가운데 교회를 인도할 이를 뽑아 영수(領袖)라는 직책을 주었다. 그는 19077월 동문외교회의 영수로 선출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영수가 된 그는 자신의 학문이 교회를 이끌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곧 창신학교(昌新學校) 속성반에 입학하여 6개월 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오히려 학교 직원들과 인근 주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고향인 의주와 평안도 일대에 어느 정도 그 성과가 나타나자, 1909년부터 한경희는 당시 동포들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이주하여 살던 만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낯선 땅으로 이주한 그는 고초 속에서도 그의 전도는 마침내 훌루투(葫蘆套)와 자피구(夾彼溝) 두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한경희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일어나던 1910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했다. 신학생으로 재학 중에도 전도와 교회봉사를 열성적으로 하였고 후일 저명한 목사가 되어 한국교계를 이끌게 되는 동료들을 사귈 수 있었다. 191451533세 때 평양신학교의 제7회 졸업생이 되었다.

 

한경희는 평북노회에 소속으로, 같은 해 87일 철산읍(鐵山邑) 예배당에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양전백(梁甸伯, 1869-1933) 목사에 의해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중동선(中東線) 지역의 전도목사로 안수 받았다. 평북 지역의 여러 유명교회에서 한경희 목사를 청빙하고자했다.

 

그는 헐벗고 가난한 만주의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심하였다. 당시 만주의 동포들에 비참한 생활에 대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 쿡(Welling T. Cook, 鞠裕致, 1878-1952)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만주에 오는 조선 이민자의 고통은 심지어 그들의 불행을 실제로 목격하는 사람조차도 완전하게 묘사할 수 없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중에서 흰 옷을 입은 말없는 군중은 혹 10여명 혹 20여명 혹 50여명 떼를 지어서 산비탈을 기어서 넘어온다. 그들은 만주의 나무 많고 돌 많은 산비탈의 척박한 토지와 더불어 악전고투하며 한 가지 살길을 찾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오는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꾸준한 노력으로 중국인의 밭 위에 있는 산비탈의 불모지를 괭이와 호미로 땅을 갈고 손으로 심고 손으로 거두며 흔희 생을 유지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초근목피를 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식량부족으로 죽어갔다. 부인과 소아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얼어 죽었다. 그들의 비참한 생활에 질병이 엄습해왔다. 여러 명의 조선인이 강에서 맨발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얼음 조각이 섞인 강을 건너서 저편 언덕에서 바지를 내리고 신을 신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엷은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한 채 유아를 등에 업고 간다. 그와 같이 업음으로 해서 서로 조금이라도 체온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다리는 엷은 옥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점점 얼어붙어 작은 발가락들이 서로 붙어 버린다. 굽은 등과 주름살 많은 얼굴을 가진 남녀 늙은이들은 끝없는 먼 길을 걸어서 기진맥진하여 몇 발자국도 더 이상 걷지 못한다. 젊은이든 나이 많든 다 이러한 모양으로 고향을 떠나온다. 이와 같이 과거 일 년 간 1920년에 75,000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이 만주로 건너왔다. 현재 동북지방인 만주에 산재한 조선인들은 500,000을 헤아린다.

 

안수 후 바로 사역지를 향해 떠난 한경희 목사는 마적(馬賊)의 출현이 빈번하고 혹독하게 추운 기후 속에서 무려 3,500리 이상을 다니며 전도여행을 하였다. 또한 소작인이 대부분이라 수탈당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던 동포 농민들에게 조합을 결성하도록 지도하였다. 3곳의 조합을 결성하는 성과도 일구어 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1914년 당시 만주에 30만 명의 신도를 지닌 대종교(大倧敎)와 격렬하게 대립되었다. 한경희 목사는 대종교가 신으로 섬기는 단군(檀君)이 민족에게 중요한 인물이지만 결코 창조주가 아님을 강하게 설파하였다.

 

각고의 노력으로 한경희 목사는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 석두하자(石頭河子),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派), 목릉현(穆稜縣) 목릉(穆稜), 팔면통(八面通), 그리고 밀산현(密山縣) 백포자(白泡子), 십리와(十里窪) 등 모두 일곱 곳에 교회를 설립 하였다. 하지만 총회 전도국에서 노회의 전도 지역을 조정함에 따라 그는 남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그의 열과 성을 다한 노력으로 한경희 목사가 세운 교회들은 이후 크게 성장하였다.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5개현을 담당하였다. 이 지역은 경학사(耕學社),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등을 통한 독립운동으로도 유명한 이 지역이지만, 일찍이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즈 선교사(Harry A. Rhodes, 魯解理, 1875-1965)에 의해 전도가 시작된 지역이었다. 동포들의 생활상은 매우 어려웠는데, 한경희 목사는 전도를 하면서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여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한경희 목사는 부임 후 그의 고결한 인품에 감동한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방기전(方基典, 1861-1920)19121010일에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2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의 지도로 은양학교는 1918년 학생 수가 8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나, 1920년 일제의 토벌군이 독립군에 대한 보복작전을 벌여 간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 때에 학교의 설립자 방기전 장로는 순교하게 되고, 학교는 불탔다.

 

한경희 목사도 이 때 일본군을 피해 은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삼원포로 돌아온 뒤, 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은양학교의 정신은 만주지역에 동포들이 설립한 군정기관인 정의부(正義府)와 한경희 목사의 열성으로 1921년 개교한 동명학교(東明學校)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여성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부임 직후, 그가 시무하던 삼원포교회 지도자들이 191410월 설립한 삼성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경신참변 후 학교를 재건하고 1928년 말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학교의 발전을 위해 계속 근무하였다.

특별히 조선인의 딸이지만 중국인에게 부당하게 팔려가 고생하고 있던 11세의 진점순(陳漸順)9세의 박남순(朴南順)을 구하기 위해 평북지역에 모금운동을 벌였으며, 이들을 구출한 뒤 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후원하여 간도사회 전체로부터 큰 추앙을 받기도 했다.

 

또한 한경희 목사의 생활개선 노력에 감동을 받아 한족회(韓族會)에서는 1920410일 서간도 전() 동포사회에 한족회총장의 이름으로 금주, 금연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다음과 같은 허사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하였다.

 

술 마시는 동포들이여 너의 살림 어이하랴

술만 먹고 춤만 추면 너의 희망이 족할까?

 

(후렴) 어린 처자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앉았으니

네 장차 가련하다 술 마시는 자여

 

호미(胡米) 밥에 된장찌개 하루 두 번 어려운데

술만 먹고 춤만 추면 너의 희망이 족할까?

 

서간도 지역 전체의 큰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 한경희 목사는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931일을 기해 서울에서 일어난 기미독립운동을 간도지역에서 전개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의 주도하에 191937일 삼원포의 대화사(大花斜) 예배당에서 2,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렸다. 그 영향으로 간도와 남만주 전역에 만세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도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의 결성과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한경희 목사의 지도로 서간도 지역에서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새로 목회자들이 파송되어 오기도 했다. 또한 한경희 목사의 주도로 서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도자를 파송하는 일도 점차 늘어가게 되었다. 과거 그에게 전도하다가 핍박받은 일이 있는 이봉태 조사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20년 경신참변으로 간도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독립신문에 따르면 학살당한 동포의 수가 3,469명에 달하고 주택이 불탄 것이 3,209호이며, 학교와 교회가 불탄 것이 50여개라 할 정도였다. 남만노회록에 따르면 경신참변으로 인한 순교자는 삼원포 교회의 안동식, 방기전 장로를 포함하여 33인에 달한다고 했다. 당시 교회는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불탔으며, 순교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 군인에 의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하였다.

 

이 시기 한경희 목사는 다행히 신자 9가족과 함께 액목현(額穆縣)으로 이주할 수 있었으며 농민들을 모아 조합을 결성하고 바른 삶의 길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18월 다시 삼원포교회로 돌아와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성도들과 주민들을 위로하며 특별기도회를 인도하였다.

 

한경희 목사의 사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마침내 1922821일 열린 제4회 남만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3년 그는 남만교육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24년에는 남만노회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때 동포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농민공사(農民公司)를 조직하였다. 이어 1925년 다시 남만노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이 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협조를 받아 흥경삼성중학교(興京三省中學校)를 설립하였고, 또한 기독교협진회를 설립하였다. 1927년 한경희 목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노회에서는 그를 4번째로 남만노회장에 추대하였다.

 

한편 많은 중국인들이 만주로 들어오면서 동포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을 보면서 한경희목사는 1928년 귀화한족동향회(歸化韓族同鄕會)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였고 간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동포들에게 귀화를 권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동포들이 소작인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중국에 귀화입적하게 되면 땅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인들이 귀화하는 것을 가장 반대한 것은 조선인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였다. 19248월 이래 정의부 계통 학교인유하현 삼원보 소재 동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28년 음력 6월 사임할 때까지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목회 활동과 민족교육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한경희 목사를 일제는 1928년 동포들의 귀화입적을 돕고 돌아오던 그를 불법으로 체포하고 해룡현(海龍縣) 일제 경찰서로 연행한 뒤 재판에 회부하였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인이 되는 것을 피하고 합법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 국적을 버리고 이미 귀화한 그에 대한 명백한 불법체포였다. 1929319일 일제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한경희 목사에게 32월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신의주 감옥에 수감하였다. 거기에는 아리랑이란 저술로 유명한 김산도 수감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모진 학대를 당하였지만, 오히려 바른 언행과 생활로 죄수는 물론 간수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21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들이 그를 돌보기 위해 평북에 돌아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경희 목사의 수감 중에 자녀들을 셋이나 잃었다. 첫째 아들 한청옥은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었다. 그는 삼원보를 중심으로 공산 활동에 빠져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차례 테러를 자행했다. 어느 날 그는 회의 도중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한다. 셋째 병옥도 삼원보에서 죽고 딸 영옥도 치료를 못 받아 죽었다고 한다.

 

한편 한경희 목사가 수감 되어 있었을 때인 1931, 일제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동포들의 고초는 더한층 심해졌다.

 

또한 길림성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는 기독교 전도가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전임 사역자를 구하기 어려워 교회의 운영 및 설치에 큰 애로가 있었다. 자원하는 성직자를 찾기 매우 어려운 이 지역의 사역을 한경희 목사는 담대하게 자원하였다. 이때 친구들은 그 일대는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그는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전도목사로 파송된 한경희 목사는 19341월 북만주의 밀산현 일대에서 한인 동포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했다. 그러던 193511, 그는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다.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와 마적,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인한 혼란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을 버려진 양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고 하여, 호림, 요하, 수원현 지역 교회를 방문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14일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 지점에서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한경희를 붙잡고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며 고문했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와 4명의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음물 속에 집어넣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오인 받아 순교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심한 구타를 당하여 사경에 이르러서도 주변의 신자들이 달아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배려하였다. ‘총에 맞더라도 뛰어 도망가라는 말을 듣고 있던 5명의 신자 중에 4명은 총살당하고 이낙섭(李洛燮)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들 비적들 중 일부는 곧 체포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복수하려 하는 둘째 아들 순옥(順玉)의 꿈에 한목사가 나타나 꾸짖어 순옥은 이들을 용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의 둘째 아들 한순옥이 삼촌에게 보낸 편지가 한국장로교회 총회장 이인식 목사에 의해 기독신문에 게재되면서 알려졌다. 한순옥도 처음에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부친이 참살당한 후 교회로 돌아왔다. 1944년 만주의 봉천신학교를 졸업한 뒤 평북 양시교회의 부목사로 봉직했다. 8.15 해방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공산당원들에게 그마저 피살되었다고 한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다니엘의 결심이란 기록된 설교를 남겼다. 한 가정 속에서도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뇌하며 2대에 걸처 공산당에 의해 순교의 길을 간 그 가족의 순교는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에 의해 두 아들을 잃고, 마침내 6.25동란 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손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194111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한경희목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이학인, 김만수. 만주의 사도 바울 한경희목사. UC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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