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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와 한국 최초의 전기불

알렌과 전기불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13 [03:42]

빛으로 오신 예수와 한국 최초의 전기불

알렌과 전기불

최재건 | 입력 : 2021/01/13 [03:42]

빛으로 오신 예수와 알렌 선교사와 전기 불

 건달불'과 '덜덜불'

예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영적인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당나라 때 초대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처음 전파될 때도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경교(景敎)라고 했다. 빛의 종교라는 뜻이다. 당나라 수도에 불교 못지않게 크게 발전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이라는 말씀 따라 살려고한다. “빛의 사자들이여라는 찬송도 즐겨 부른다.

 

한국에 상주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알렌(Horace N. Allen)의사였다. 그가 빛 되신 예수를 전하려 입국하던 1884년에 조선에 새로운 빛 전기가 도입되었다. 알렌이 직접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1882년 조미통상조약 체결 다음해인 1883년 미국에 조선정부가 보빙사들을 미국에 파견한 것이 계기였다.

그들이 미국에 가보고 놀란 것은 밤에 불 빛이 너무 밝았다. 에디슨 발명한 전기 불 빛 때문이었다. 밀초나 쇠기름의 촛불만보다가 백열등의 빛은 너무나도 신기하였다. 전기로 움직이는 에레베이터를 처음타고는 지진이 난 줄 알고 엎드려 사방을 헤매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은 발전소, 전신국을 호기심 속에 방문했다. 전기의 위력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절단들은 감격한 나머지 에디슨 전기회사를 찾아가 주문 상담까지 했다. 귀국 후 고종에게 전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고종은 이미 외국사신과 선교사를 통해 전기에 관해들은 바가 있었다. 곧 설치토록 허가되었다. 전등 설치 작업은 급속도로 진전 되었다. 경복궁이 그 첫 시설 처였다. 갑오경장으로 다소 지연되었던 전깃불 공사는 18873, 경복궁 건천궁에 처음으로 백촉 짜리 전구 두 개가 그 위력의 불 빛을 밝혔다.

그 뒤로도 공사는 계속되어 경복궁 전체에 750여개의 전구가 빛을 발했다. 시설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 유지비도 많이 들었다. 고장도 자주 났다. 그래서 건달 불 이라고도 불렀다. 전깃불의 고장이 잦은 이유 중의 하나는 담뱃불을 붙이느라고 무리를 하여 퓨즈가 나간 것이 제일 많았다.

 

전깃불에 대한 관민의 관심은 아주 높았다. 한미 합작회사인 한성 전기회사가 설립되었다. 궁정 중심으로 시행된 전기 가설공사는 일반관공서를 비롯한 시설들로 확대 되었다. 종로 네거리에도 가로등을 설치케 되었다. 마침내 일반인도 전기 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004월이었다. 1900년에는 덕수궁, 1903년에 경운궁에, 세브란스 의학교의 첫 졸업생이 배출된 1908년에는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에도 시설이 되었다. 창덕궁에도 전기불이 밝혀졌다.

 

시골에서 올라온 초기 간호사 지원생 처녀는 기숙사 방의 전기 불을 끄고 자라는 말을 듣고 밤새 불어도 꺼지지 않아 잠도 한 쉼 못자고 아침을 맞았다는 일화도 있다. 그 이후로도 전깃 불을 끌 줄 몰라 일어난 비슷한 일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전깃불에 이어 전차가 등장했다. 알렌이 선교사를 사임하고 미국공사관의 대리공사로 있을 때였다. 고종은 알렌을 직접 만나 전차의 부설과 운영에 관해 대화도 나누었고 그에 따라 사업도 급속하게 추진되었다. 18995월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 까지 단선으로 전차가 개통되었다. 개통식에는 고관대작들, 외교사절들 및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가마나, 당나귀, 말이나 타다가 전차를 타 보니 신기하였다. 끄는 말도 소도 없이 달리는 것이 하도 이상하여 일부러 시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업으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타는 사람들은 물론 시골에서 일부러 전차 타러 서울에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차는 1920년대가 되어서야 일반대중화 되었다.

 

전깃불을 귀신불’ ‘도깨비불로 알았던 서민층에게 다가간 초기 선교사들의 성경말씀은 대개의 경우,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무속 외에 거의 무종교 상태였던 당시의 민중들에게 들려진 기독교의 복된 소식은 유언비어로만 들렸다. “ ‘예수가 신도 되었다가 사람도 되었다가 한단다.’ ‘처녀에게서 태어낫단다.’ ‘죽었다가 살아났단다.’ ‘예수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단다.’”는 지금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로 들리지만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다.

 

거기에다가 서양 사람들에 대한 곡해와 오해도 많았다. 양인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소문이었다. 성찬예식에 대한 오해였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서도 있었고, 조선후기 가톨릭교회가 처음 전파될 때 서울에서도 있었던 일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갓 태어난 어린이들을 잡아 살은 구워먹고 눈을 빼어 사진기를 만든다. 눈을 빼서 밀가루에 넣고 갈아서 유리판에 말려 사진이나 약을 만든다. 젖소도 없는데 우유를 마시는 것을 보고 여자를 납치해서 가슴을 절단해서 젖을 짜 마신단다.” 것이 주종이었다.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해서 초기 선교사 경영의 학교에 온 이들은 대개 고아들이었다. 이 고아들은 잡아먹는 것으로 오인 한 민중들은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의심했다. 다른 서양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뒤에 전차가 들어와 개통 일주일 만에 어린이가 치여 죽는 사고도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서구문명 서양문화 와 종교에 대한 반감의식이 작용해 소위 영아소동이란 사건도 일어났다. 서양인에 대한 폭행이었다. 선교사들은 보호요청을 했으나 오히려 더 오해를 받게 되어 군중들이 외국인 거주 지역을 습격하게 되었다.

사태가 악화되어 진압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고종이 진압에 나서 당시 제물포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해병대, 프랑스, 러시아 해병대가 투입되고서야 서울의 거리는 잠잠해졌다. 반 서양, 반 선교사정서는 중국에서도 있었다. 비슷한 영아소동사건이 중국에서도 일어난 것을 보면 그 영향일 수도 있다고 하겠다.

 

알렌은 그리스도의 빛 되심을 전하러 왔다가 전깃불, 전차를 소개하는 역할까지 했다. 가스나 전기와 같은 조명 기구나 시설이 없어 어두웠던 조선에 선교사와 같은 시기에 들어온 전기불은 쉽게 서양 과학기술의 우위성을 인식케 했지만 영적인 빛을 보는 안목은 전기불보다 훨씬 더디게 뜨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영적인 빛을 전깃불 보다 밝게 비추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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